“어린 시절에는 도로나 전봇대 같은 시설이 없던 마을이 지금은 이렇게 발전했습니다. 그 가난하던 나라가 지금은 이렇게 잘 살고 있지요. 변화의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일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정성 들여 키운 작물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기분이었죠.”
선재혁(88) 선생은 남면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울산 김씨인 어머니는 지방 관료 출신의 딸이었고, 아버지는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데릴 사위였다. 덕분에 제법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말한다.
90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대부분의 삶을 남면 땅에서 줄곧 보내왔다. 고향이 주는 포근함과 이웃들의 정이 있기에 불편함은 없고 늘 감사한 마음뿐이라 말한다. 매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일까. 남들은 치를 떠는 군복무도 선 선생에게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선 선생은 부산에서 육군 수송부로 군복무를 했다. 별다른 연고도 없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아직 세상을 많이 경험해 보지 못한 시골 젊은이에게, 낯선 지역이 주는 신선함은 가슴을 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때는 TV가 귀한 시절이라 바다를 책으로만 접해봤어요. 그토록 보고 싶던 바다를 매일 볼 수 있으니 저는 참 운이 좋았죠. 주말이면 친구처럼 지내는 동기들과 외박을 나가 영화도 보며 시내를 누빌 수 있었으니, 참 의미 있는 경험이었죠.”
전역을 한 선 선생에게는 뜻밖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와 큰 형은 고생한 동생을 위해 1,200평의 논과 700평의 밭 그리고 집을 선물로 물려준 것이다. 어려서부터 농사를 짓는 것이 꿈이었던 선 선생에게는 그 무엇보다 뜻깊은 선물이었다. 농사짓는 과정을 설명할 때도 선 선생은 ‘감사’라는 단어를 아끼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날에 하루 종일 일하면 진이 다 빠져요. 하지만 덕분에 저녁이 더욱 맛있게 느껴지고, 잠자리는 더욱 포근하게 느껴졌습니다. 비가 오면 노동으로 오른 열기가 식으니 그것도 감사하지요. 가을이 오면 고생한 대가를 치를 수 있고, 겨울이 오면 편하게 쉴 수 있고, 다시 봄이 오면 다시 돈을 벌 수 있으니 사계절 중 고맙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이렇듯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선 선생이지만, 그에게도 어려운 시절은 있었다. 선 선생의 아버지인 선광채 선생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던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의협심은 무력으로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에도 향해 있었다.
선 선생의 아버지는 조국 독립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고자 가지고 있던 재산을 팔아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추후 이것이 발각되어 일본 순사들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 선생의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묻어났다.
그렇게 선 선생의 아버지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3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선 선생이 불과 8살이던 시절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아버지께서 독립을 보고 가셨던 거죠.”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 때문인지, 선 선생은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에 무엇보다 큰 기쁨과 안도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가장 좋았던 시절을 묻는 질문에도 마을이 빠르게 발전해가던 ‘새마을 운동’을 언급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되는 마을의 모습을 보니 정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열심히 살아가던 선 선생은 26살에 중매로 3살 연하의 아내와 결혼했다. 아내는 징용 가족 출신으로, 선 선생 못지않게 일제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비슷한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은 다짐했다. 후손들에게는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자고.
마음이 잘 맞았던 두 사람은 2남 2녀를 낳았다. 자녀가 생긴 뒤로 선 선생의 손발은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늘 흘린 땀이 미래의 양분이 된다는 마음으로 일했기에 힘들지는 않았고 오히려 매일매일이 보람 있었다 말한다. 수십 년간 농사를 지은 선 선생은 가장 성공한 농사로 자식 농사를 언급했다.
“우리 큰 아들이 카이스트 출신이에요. 다른 자식들도 큰 아들 못지않게 좋은 대학을 나왔고, 손주 중에는 연세대를 다니는 아이가 있어요. 저는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는데 참 장하죠.”
자녀들과 손주 자랑을 하는 선 선생의 얼굴에 웃음이 가시질 않는다. 요즘에는 소일 거리 삼아 밭을 가꾸고, 종종 강연을 듣거나 글을 쓰는 등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만족스러운 삶이지만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선 선생은 개를 좋아하지만, 키우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별이 주는 아픔 때문이다.
“키울 때는 좋죠. 나만 보면 좋다고 꼬리 흔드니 얼마나 예뻐요. 하지만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하잖아요. 정들었던 개를 보낼 때 너무 가슴 아프더라고요.”
정이 많은 선 선생은 다른 이들과의 이별에 유독 큰 상실감을 느낀다. 나이를 먹어가며 하나 둘 떠나는 지인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정들었던 이들이 떠날 때마다 참 속상해요. 그래도 많은 이들 덕분에 행복한 추억을 쌓을 수 있었으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운 마음이 들 때면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어놀던 연못 근처나 학교를 종종 찾아간다. 비록 예전과 그 모습이 달라졌지만, 보고 있으면 그리운 시절이 떠오르니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 위원회의 지원을 받아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