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넓어 천 칸이라도 누워자는 데는 8자(2m40㎝)의 방이면 가능하고,
금싸라기 땅 만평이 있다한들, 하루 먹는 데는 쌀 두되면 족하다.
이 얼마나 통쾌한 명문인가? 넓은 집에 산다고 교만 떨지 말고 땅 부자라고 잘난척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알량한 의식주(衣食住)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들 의식주에 목숨을 건다.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도 옛날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여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떻게 말을 하는지, 학문의 수준은 어떤지로 평가했는데, 지금은 어떤 옷(메이커)을 입는지, 어떤 식사를 즐기는지, 어떤 아파트에 사는지, 어떤 차를 타는 지로 판단하려 한다. 하지만 의식주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조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그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하고, 어떤 식사를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으로 사는가가 중요하며, 어떤 아파트에 사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뜻으로 사는지가 중요하다.
의식(衣食)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식(意識)이 중요하며, 얼마나 넓은 아파트에 사느냐가 중요한ㅇ 것이 아니라 얼마나 넓은 마음의 소유자이냐가 중요한 것이니,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고,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라는 성현의 말씀은 위 글과 서로 통하니 아 분명 명언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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