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의 누정문학(樓亭文學) 2
장성의 누정문학(樓亭文學) 2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4.01.16 10:30
  • 호수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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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수정
관수정

2. 觀水亭(관수정)

 

송흠(宋欽)1459313일에 태어나 154789세로 세상을 떠났다. 1480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492년 식년과(式年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서 근무하다가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 재위 때는 주로 외직인 전라도사, 보성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반정(反正) 뒤인 1516년에 복직하여 홍문관 박사(博士), 사헌부 지평(持平) 등의 관직에 올랐다. 특히 1528년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된 뒤, 장흥부사(長興府使), 전주부윤(全州府尹), 전라도 관찰사(觀察使) 등 지방의 외직을 오랜 기간 역임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지방관이 사용할 수 있는 역마의 수를 관직에 따라 법으로 정해 놓고 있었다. 부사(府使)의 경우에는 부임이나 자리를 옮길 때 짐을 운반하는 말 1필을 포함하여 3필의 말을 쓸 수 있고, 수행하는 사람을 위해 4필의 말을 쓸 수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 지방관은 78필 이상의 말을 타고 부임하였지만 송흠은 늘 세 필의 말만 사용하여 검소하게 행차했으며 짐도 단출하였다. 이로써 그는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렴한 관리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렸다.

송흠의 호는 지지당(知止堂)으로 그의 호에서도 그의 가치관과 삶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도덕경에 지족(知足)이면 불욕(不辱)이요, 지지(知止)면 불태(不殆)니라.”라고 했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말은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평화롭다는 뜻이다. 이런 송흠을 일컬어 삼달존(三達尊)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맹자에 나오는 말로 벼슬나이(장수)’ 그리고 을 다 갖춘 사람이라는 뜻이다.

관수정은 조선 중종 34(1539)에 송흠이 지은 정자로, 관수정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뜻이다. 송흠은 효성이 지극하여 101세 된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지방에서 외직을 맡아 효행으로 상을 받고, 효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관수정은 앞면 3·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오른쪽 2칸은 마루를 깔고 왼쪽 1칸은 방을 두었는데, 3면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열개문으로 하여 개방적인 면이 보인다. 좌우 옆면에는 낮은 평난간을 돌리고 뒷면은 벽으로 처리하였다.

관수정 송흠 원운
관수정 송흠 원운

1876년 그의 10대 후손인 송익좌가 중수하였고, 6·25동란으로 불에 타자 1955년 다시 지었다. 관수정에는 송흠의 원운(愿韻) 한시(漢詩)'관수정기' 등을 비롯 김안국, 소세양, 양팽손, 송순, 임억령, 김인후, 유사 등 당대 쟁쟁한 23분의 차운시를 새긴 27개의 현판으로 가득 차 있다. 당대 남도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곳 관수정에 모여들었음을 알 수 있다.

관수정에 편액된 시는 모두 송흠의 원운을 차운한 것으로 쌍계루와 요월정에 편액된 시들이 여러 명의 제영시가 걸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쌍계루가 특정인이 주인이 아닌 사찰의 누각이고, 요월정은 주인 김경우가 기대승의 시를 상운(上韻)으로 한 것과 달리 관수정은 주인인 송흠과의 인연에 의해 지어졌기 때문이다.

 

元韻(원운)

 

위구임류하역한(危搆臨流夏亦寒) : 시냇가 높은 정자 여름에도 서늘해

노부무일불빙란(老夫無日不憑欄) : 늙은이가 난간에 기대지 않는 날 없다오

기전곡구쌍계수(旣專谷口雙溪水) : 골짜기는 두 시냇물 이미 독점했으니

해선용문팔절탄(奚羨龍門八節灘) : 어찌 용문에 팔절탄을 부러워하리

정영침광진가락(靜影沈光眞可樂) : 고요한 그림자 잠긴 빛을 즐길만하니

청장우말최감관(晴粧雨抹最堪觀) : 맑은 단장 비에 씻긴 모습 가장 볼만해

천자만태혼미안(千姿萬態渾迷眼) : 천만 가지 자태가 온통 눈을 어지럽히나니

요취청란세아간(要取淸瀾洗我肝) : 맑은 여울물로 내 마음을 씻어보리라

 

이 시는 관수정의 원운(元韻)으로 지지당의 주인인 송흠이 지었다. 이 시에 주옹자제(主翁自題)라고 하여 주인이 직접 썼다는 것을 기록하였다.

이 시에 소세양, 김안국, 김인후, 송순, 임억령, 양팽손 등의 차운하여 현재 관수정에 편액되었다.

 

龍門八節灘(용문팔절탄) :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용문담(龍門潭) 부근에 있는 물살이 센 팔절석탄(八節石灘)을 말하는데, 이곳은 일찍부터 물살이 세고 암초가 많아서 지나가는 뗏목이 파선되어 주민들의 불편이 컸었다.

당나라 형부상서를 지낸 시인 백거이(白居易)이가 팔절탄을 고치고 다듬어 수로 통행을 편하게 하고 향산에 석루(石樓)를 짓고 개용문팔절탄시(開龍門八節灘詩)를 더했다. 그 후로 여러 시인이 계곡이 아름답고 물이 힘차게 흐르는 모양을 빗대어 龍門八節灘이란 글구를 인용하였다.

 

요월정
요월정

3. 邀月亭(요월정)

 

요월정(邀月亭)은 명종 때 공조좌랑을 지낸 김경우(金景愚, 1517~1559)가 지은 정자로 정면 3, 측면 3간의 팔작지붕으로 조성하였다. 2개의 방과 동쪽의 마루로 이어져 있어 평면 구조로 보면 정보다는 당()에 가깝다. 1811년 김경찬이 1차 중건하였으며 1925년 후손 김계두가 중건하였다.

강 건너 월봉산 옥녀봉을 마주하고, 정자 아래는 황룡강이 굽이쳐 흐른다(현재는 강줄기가 옮겨졌으나 과거 강줄기의 흔적이 남아있다). 아름드리 노송(老松)과 베롱나무(백일홍)가 우거져 있으며 황주 김경찬이 요월정 중수 때 조선제일황룡리(朝鮮第一黃龍里, 조선에서 제일가는 황룡이 아닌가)라고 했다고 한다.

하서 김인후(金麟厚), 고봉 기대승(奇大升), 송천 양응정(梁應鼎) 등의 명사가 교유하며 시를 읊었고, 삼연 김창흡(金昌翕), 김창집(金昌集) 형제와 문곡 김수항(金壽恒), 병계 윤봉구(尹鳳九), 노사 기정진(奇正鎭) 등 시문 현판이 보존되어 있다. 김경우는 1517년생, 김인후는 1510년생, 기대승은 1527년생, 양응정은 1519년생으로 기대승은 김인후를 스승으로 여겼다.

요월정에 편액한 시를 보아 김경우와 그 후손들은 정치적으로 노론과 서인에 가까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요월정 상판운은 기대승이 지었고, 김인후와 김수항이 시를 지었다. 김수항은 노론의 영수였으며 영암(낭주)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1680년 영의정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요월정에는 김수항의 아들인 김창흡, 김창집, 김창즙 그리고 이희조, 이이명 등의 창수와 김경우의 후손인 김후광, 김극광 등이 서로 창수하였다.

요월정 기대승
요월정 기대승

전하는 시문의 내용으로 보아 요월정을 노래한 시는 수백 편에 가까울 것으로 짐작되나 현판에 편액한 시는 38편에 머문다. 김경우는 광산김씨 문숙공파로 김숭조의 손자며, 중종 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활발한 언론 활동을 펴면서 나라를 바로잡으려던 김기의 아들이다. 김숭조의 자는 희지(禧之)1480(성종 11) 진사가 되고 1495(연산군 1)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504년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연산군 아래에서 벼슬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청맹(靑盲)’이라 일컫고 밖에 나오지 않았다. 김기(金紀, 미상 ~ 1535(중종 30)의 자는 중강(重綱), 1519(중종 1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22년 정언이 되고, 1525년 헌납(獻納지평(持平)이 되었다. 1534년 장령(掌令),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1535년 김기의 죽음을 뒤늦게 안 중종은 일찍이 대간 등의 벼슬로 시종한 사람의 죽음은 반드시 알리라고 지시하였다. 요월정 일대에 그 후손들이 500여 년에 걸쳐 세거하며 일명 황룡파를 이루었다. 국무총리를 지낸 김황식, 전 국회의원 김효석, 전 장성군수 김흥식, 동신대학교 총장 김필식이 황룡파다.

요월정에 편액된 시는 원운이 없이 비교적 자유롭게 작시되었으며 김수항의 시에 그의 아들들과 김경우의 자손이 창수하여 차운한 시가 가장 많은 특징이 있다. 또한 형식에서도 자유로워 김인후, 양응정의 시는 운율시의 정석인 칠언율시가 아닌 오언절구로 지었다.

 

邀月亭板上韻(요월정 상판운)

高峯 奇大升(고봉 기대승)

 

부군재기합승거(夫君才氣合乘車) : 그대의 자질은 벼슬자리 마땅한데

둔적강호방랑여(遯跡江湖放浪餘) : 강호에 몸을 감춰 방랑생활 얼마던가

재주인선풍색라(載酒引船風色懶) : 술 싣고 배를 타면 바람이 산만하고

예화부장월화허(藝花扶杖月華虛) : 꽃 심고 지팡이 끄니 달빛도 아름답네

경심구학유심야(經心舊學惟深也) : 가슴속 경학 깊숙이 연구하고

탈수신시갱분여(脫水新詩更賁如) : 뛰어난 새로운 시 다시 빛나구려

우로구천응하루(雨露九天應下漏) : 임금의 높은 은전 마땅히 내릴터니

직장위망압주려(直長威望壓周廬) : 직장의 명망이야 주려를 압도하리

 

요월정 편액
요월정 편액

기대승(奇大升) : 1527년 광산구 신룡동에서 출생하여 1572년 향년 44세에 사망. 호는 고봉(高峯), 존재(存齋)이다. 복재 기준(奇遵)의 조카로 윤원형이 그를 시기해 고의로 과거시험에서 탈락시켰다고 전한다. 1558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제수되었다. 그때 서울에 있던 퇴계 이황(李滉)을 배알하고 사단칠정론(四端七情)에 대해 변론하였다. 1566년까지 퇴계 이황과 8년간에 걸쳐 사칠이기논쟁(四七理氣論爭)을 펼쳤는데 이는 조선 유학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1566년 퇴계 이황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 시는 요월정의 상운(上韻)으로 가장 머리에 두었으나 이 시를 차운한 시는 보이지 않는다.

 

直長 : 요월정의 주인 김경우를 일컬음

周廬 :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이 머무는 집

 

일심정
일심정

4. 一心亭(일심정)

 

일심정은 북이면 사거리 동령동에 만암 김진웅씨가 중건한 정자다. 동령동은 울산김씨가 세거(世居)해온 마을이다. 동령동은 김진웅씨의 고조인 월은(月隱)공 시중(時中)이 처음 입향하였고, 증조인 죽헌(竹軒)공 병주(秉柱)가 시정(詩亭)을 지어 시를 읊고 유유자적하였다.

1981년 만암의 선고(先考)인 동원(東園)공 성규(性奎)가 정자를 지어 일심(一心)으로 편액(扁額)하였다. 동원공이 상량문을 짓고, 동암 김병효가 상량시를 지었다. 정자의 네 기둥에 죽헌(竹軒)공이 쓴 옥봉명월(玉峯明月), 노령청풍(蘆嶺淸風), 방장낙조(方丈落照), 성산숙무(城山宿霧)가 주련(柱聯)으로 걸려있었다.

사거리 동령동마을은 묘동마을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둔 한 부락으로 동령동 마을은 울산김씨가 세거하였고, 묘동마을은 김해김씨가 세거하였다. 따라서 정자 이름을 일심정이라고 부른 것은 두 마을이 일심으로 화합하고 상부상조하자는 동원공의 소망을 담았다.

세월이 흘러 정자가 기울고, 또한 여름철에만 사용할 수 있는 구조여서 2003년 만암이 툇마루와 방이 있는 전통 정자 형태를 갖추어 중건하였다.

동원공이 일심정을 지을 때 성주 이백순이 기문(記文)을 썼고, 중건기는 대구시 서정민(徐廷玟)이 썼다.

일심정의 원운은 주인인 만암이 짓고, 류한상, 이백순, 변시연, 남대희 등 서울과 부산, 대구, 경남, 전북, 충청 등 전국의 시인들이 차운하여 176수가 모였다.

일심정의 누명은 선명루(蟬鳴樓)로 만암의 원운에 방장낙양선난조(方丈落陽蟬亂噪)의 선()

일심정 원운
일심정 원운

성산숙무조미명(城山宿霧鳥迷鳴)의 명()에서 빌린 것이다. 일심정은 가장 최근에 중건한 정자로 176수의 차운시와 함께 기와 문이 갖추어진 정자문학의 정형을 갖추어서 의미가 크다.

대개의 정자는 경치가 빼어난 곳에 짓는 것이 보통이나 일심정은 만암의 증조와 선고가 지은 터에 중건하여 경관을 조건으로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령사경은 만암의 증조인 죽헌공이 제()한 것으로 만암이 7언절구(七言絶句)하였다.

여기서는 만암의 원운과 동령사경 그리고 차운시 7수를 소개한다.

 

一心亭 元韻 晩巖 金鎭雄(일심정 원운 만암 김진웅)

 

동록창송취죽영(東麓蒼松翠竹縈) : 동쪽 기슭 푸른 솔과 대숲 둘렀으니

사간복축일정성(斯間卜築一亭成) : 이 사이 터를 잡아 한 정자를 이루었네

옥봉명월정중만(玉峯明月庭中滿) : 옥녀봉에 밝은 달은 뜰에 가득하고

노령청풍함내영(蘆嶺淸風檻內盈) : 노령산 맑은 바람 난간에 넘치도다

방장낙양선난조(方丈落陽蟬亂噪) : 방장산에 해 기우니 매미 요란히 울어대고

성산숙무조미명(城山宿霧鳥迷鳴) : 성산에 안개 북어 새들 헤매 우는구나

선유이파선인거(仙遊已罷仙人去) : 신선 놀이 이미 파해 선인은 가셨으니

유촉마사감구정(遺躅摩挲感舊情) : 남긴 자취 어루만지며 옛정에 젖어 드네

 

옥봉(玉峯) 시루봉에서 매봉과 옥녀봉으로 뻗어 동령동 뒷산으로 이어지는 옥녀봉이다.

성산(城山) 성산은 산성산이라고 하며 금성산성으로 널리 알려졌다.

선인(仙人) - 선인은 신선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돌아가신 선조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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