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의 누정문학(樓亭文學) (1)
장성의 누정문학(樓亭文學) (1)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4.01.09 09:00
  • 호수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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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루
백양사 쌍계루

<누정의 시원>

누정(樓亭)은 누각을 의미하는 '()'와 정자를 의미하는 '()'을 합친 말로, 주거공간과 구분되는 별개의 건축물이다. 누정은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왕실이나 관아에서 운영한 공적 누정이 대부분이었으나. 16세기 이후부터 개인이 경영하는 사설 누정이 크게 늘었다. 사설 누정이 늘어나면서 누정을 출입하는 문인들에 의해 누정문학이 넓게 이루어졌다.

누정문학은 그 성격에 따라 00, 00, 00, 00, 00, 00정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명명되었으며 오래된 누정을 중수 또는 중건하면서 원래의 용도와 구조는 바뀌어도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광주의 환벽당(環碧堂),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제천의 응청각(凝淸閣), 담양의 명옥헌(鳴玉軒)이 누정으로 이름 붙여지지 않았으나 그 용도가 누정과 비슷한 경우다.

우리나라 누정에 관한 기록은 삼국 시대부터 나타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488년 정월에 신라 소지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다고 하여 처음으로 누정의 명칭이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500년에 백제 동성왕이 궁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짓고 이곳에서 왕과 신하들이 밤새도록 연회를 즐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636년 백제 무왕이 망해루(望海樓)’에서 군신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삼국 시대의 누정은 주로 왕실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운영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의 누정은 왕실은 물론이고 관아 및 사적인 문벌귀족까지 확산된다. [고려사(高麗史)]에서 누정에 관한 기록이 삼국 시대보다 자주 등장한다. ‘1073년 문종이 평리역에 정자를 지었다’, ‘1104년 숙종이 지금의 서울인 남경의 누정에서 유흥을 즐겼다’, ‘1106년 예종이 가창루(嘉昌樓)’에서 신하들과 시를 짓고 활쏘기를 하였다‘, ’1157년 의종이 궁궐 옆 민가 50여 채를 헐어 대평정(大平亭)을 비롯해 여러 채의 누정을 지어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했다는 기록 등이 나타난다.

지방 관아의 객사에도 누각이 건립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밀양 영남루(嶺南樓)나 진주 촉석루(矗石樓) 등이다. 조선 시대가 되면 사대부의 사적인 누정이 급증한다.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이 조선 중기 이후 사림(士林)을 통해 지방으로 확산되고, 네 번의 사화를 거치면서 지방으로 낙향한 여러 선비에 의해 건립된 사적인 누정이 급격히 늘어나게 된 것이다. 1977년 간행된 문화유적총람에 등재된 전국 누정은 모두 569곳인데 이 가운데 양반 사대부의 누정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누정문학>

16세기 조선 중기에 이르러 누정 건립이 본격화되는데, 이는 1498(연산군 4)의 무오사화, 1504(연산군 10)의 갑자사화, 1519(중종 14)의 기묘사화, 1545(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 등 4번의 사화로 인해 중앙의 사대부와 관료들이 낙향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치가 좋은 곳에 누정을 짓고, 누정 주인과 개인적 인연이나 친분이 있는 문인들이 반복하여 누정을 방문하면서 시문을 주고 받았다. 누정문학 작품은 누정 경내 현판이나 문집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누정문학의 대표적 유형은 누정제영(樓亭題詠)이다. 쌍계루의 원운은 백양사 청수스님이 포은 정몽주에게 부탁하여 포은이 짓고, 여러 시인과 관리들이 이를 차운하였다. 그런데 관수정은 주인인 송흠이 원운을 짓고 그의 문인들과 그를 흠모하는 관리들이 이에 차운하였으며 요월정은 주인인 김경우가 원운을 짓지 않아 고봉 기대승이 가장 먼저 시를 지었다하여 상운(上韻)이라고 했다. 따라서 백양사 쌍계루와 관수정의 시는 칠언율시의 운을 지켜 차운하였으나 요월정의 시는 이런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특징이 있다.

 

<장성의 누정문학>

백학봉 쪽에서 본 쌍계루
백학봉 쪽에서 본 쌍계루

장성의 쌍계루와 관수정 그리고 요월정은 담양과 광주의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송강정, 면앙정과 함께 조선 중`후기 호남 누정문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 송순, 김인후, 양응정, 양산보, 박순, 기대승, 송익필, 백광훈, 임억령, 양팽손 등의 시가 교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호남의 학맥은 김굉필, 최부, 송흠, 박상, 이항, 김안국 등 여섯 계열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관수정과 요월정에는 이들과 관련한 인물들의 시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관수정의 주인 송흠은 양팽손-나세찬-송순-안처성-양응정-김인후-임형수로 이어지는 호남 인맥 좌장이다.

쌍계루는 고려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관리와 시인 묵객이 포은 정몽주의 시에 차운하여 우리나라 누정 문학의 최고봉에 이른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쌍계루가 두 계곡의 물이 만나는 곳에 지은 것이 상징하든 불교와 유교라는 종교와 서인과 동인 그리고 노론과 소론이라는 정치적 이념 등이 모두 초월하여 만나는 곳이다.

관수정은 송흠이 은퇴하고 지은 정자로 그를 흠모하는 문인과 후배들이 송흠의 원운을 차운하여 엄격한 운율을 따르고 있으며 대부분 송흠의 청빈하고 세속의 욕망을 초월하여 유유자적하는 인품을 자연에 빗대어 차운한 특징이 있다.

요월정은 주인인 김경우가 낙향하여 당대의 명사인 김인후, 기대승, 양응정 등과 교유하였던 곳이다. 하지만 김경우가 이들보다 나이가 적고, 스스로 겸양하여 원운을 짓지 않고, 한 사람의 시에 그의 후손 또는 지인들이 차운한 사례 등이 보인다.

2003년 북이면 사거리 동령동에 만암(晩巖) 김진웅(金鎭雄)씨가 증조인 죽헌공이 처음 시정을 지었고, 선고(先考) 동원공이 중건하여 일심정이라고 현액했던 정자를 복원하여 이백순씨 등이 기()를 쓰고, 주인인 만암이 원운을 지어 산암 변시연 씨등 근현대 인사들의 200여 수에 이르는 차운시가 문집에 실렸다.

여기서는 쌍계루와 관수정 그리고 요월정과 일심정에 편액된 원운과 차운시 가운데 일부 인사들만의 시를 발췌하여 실었다.

 

1. 백양사 쌍계루

백양사는 처음에 백암사로 불렀다가 고려 때는 정토사로 조선 때는 백양사로 개칭되었다. 도량 입구에 세워진 누각은 운문암에서 내려오는 계곡의 물과 천진암에서 흘러오는 물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쌍계루라 붙여졌다.

1350년 각진국사가 세웠으나 1370년 큰비로 무너져 1377년 청수스님이 다시 세우면서 목은 이색이 기문(記文)을 쓰고 포은 정몽주가 시를 지었다. 포은의 시에 송순, 김인후, 박순, 기정진, 기우만 등이 차운하여 200여 편의 시가 남게 되었다. 19506.25 전쟁으로 불에 타버렸고, 1985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2009년 해체하여 다시 세웠다.

쌍계루는 지금으로부터 672년 전인 1350년 백양사 중흥조이며 시호가 각엄존자이고, 고려 충정왕과 공민왕 양대에 걸쳐 왕사를 역임한 각진(覺眞)국사가 건립하였다. 각진국사는 승보종찰인 송광사 16국사 중 제 13국사로 말년에 이곳 백양사(당시 정토사)에 주석하며 쌍계루를 세웠고 700여년 가까운 시간 동안 시공을 초월하여 수많은 시인 묵객이 쌍계루에 시문을 남겼다.

포은 정몽주 쌍계루 원운
포은 정몽주 쌍계루 원운

처음 세웠을 때 이름이 다리 위의 누각이라는 뜻의 교루(橋樓)’인 것으로 보아 지금의 위치보다 남쪽 지점인 연못에 임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370년 이곳에 대홍수가 나서 둑이 무너지고 소용돌이가 쳐서 교루가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정토사를 이끌던 청수(靑叟)대선사가 1377년 예전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누각에 담긴 각진국사의 뜻을 기리고, 이를 후대에 전하고자 누각의 기문(記文)을 얻고자 노력하였는데 이 때 고려 조정의 친원(親元)정책을 비판하다가 탄핵을 받아 나주로 귀양 온 삼봉(三峯) 정도전이 귀양 마지막 해인 13772월 무열(無說)선사의 안내로 정토사에 청수 대선사를 뵙고자 찾아와 대사께서 기문을 청하게 되었다.

무열선사는 목은(牧隱) 이색이 스님 중의 한림학사라고 칭송할 만큼 학문이 높아 그 이름이 원나라에까지 알려진 스님이다. 무열선사는 당시 용진사(나주 용진산)에 주석하였는데 삼봉과 함께 백양사에 청수대선사를 뵈러 왔다. 교루(쌍계루)를 중건한 청수대선사는 고려말 최고의 명문가로 문희공(文僖公) 이존비(李尊庇), 문헌공(文憲公) 이우(李瑀), 문정공(文貞公) 이암(李嵒), 경공(文敬公) 이강(李岡) 이렇게 4대에 걸쳐 문자시호(文字諡號)를 받은 고성이씨 철성부원군 이암의 아우로 조부인 문희공 이존비 선생의 아들인 각진국사와는 속가(俗家)로 숙질(叔姪) 사이가 된다. 청수대선사는 원래 과거에 급제한 뒤 관료생활을 하다가 삼촌인 각진국사의 권유로 출가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분으로 정일품삼중대광복리군(正一品三重大匡福利君)이라는 봉호(封號)를 받게 된 당시 불교계의 큰스님이었고 삼봉이 바로 청수대선사를 뵙기 위해 정토사를 찾은 것이다.

그리하여 청수대선사의 뜻으로 삼봉에게 기문(記文)을 청하자 몸소 살펴본 감흥과 무열선사의 말을 참고하여 글을 쓰니 그 글이 바로 삼봉 전도전백암산 정토사 교루기문이니 그때가 13772월이다.

 

<목은 이색이 쌍계루라고 이름을 짓고>

삼봉이 기문을 짓고 4년 뒤인 1381, 기문만 있고, 누각의 이름이 없어 교루로만 불리던 것을 안타까워하던 청수대선사께서 문도(門徒)인 절간(絶磵) 스님을 통해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원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그 이름이 조정에서 으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누각의 작명을 청하게 된다.

청수대선사가 목은 이색에게 누각의 작명을 부탁하게 된 데는 두 분 사이의 깊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수 대선사의 속가 형님인 행촌(杏村) 이암(李嵒)은 고려 말 대문장가이자 문하시중(현 국무총리)로 당시 고려 조정을 이끌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특히 그가 쓴 단군세기(檀君世紀)’는 우리의 국조가 단군임을 밝히는 상고사(上古史) 연구에 매우 소중한 책이다.

그런데 청수대선사의 형인 행촌 이암은 목은 이색의 스승이었을 뿐 아니라 목은 이색의 부친인 가정 이곡(稼亭 李穀)과는 친구 사이였다. 더구나 행촌의 아들인 문경공 이강(文敬公 李岡)과 목은 이색 또한 친구 사이여서 집안 간에 깊은 세교(世交)가 이어져 있었기에 청수대선사가 목은에게 스스럼없이 누각의 작명을 청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청수대선사의 명을 받은 절간(絶磵)스님의 전후사정을 듣고 그가 함께 들고 온 삼봉 정도전의 교루기문을 토대로 그 유명한 장성현 백암사 쌍계루 기문을 작성하면서 쌍계루라고 명명(命名)하게 되었다.

또한 청수대선사의 문도이며 포은(圃隱) 정몽주에게 시를 청한 절간스님은 그와는 평소 많은 시를 주고받는 문우(文友). 포은 정몽주는 오래도록 깊은 인연이 있었던 절간스님의 말씀과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목은 이색의 기문을 기초로 기제 쌍계루(寄題 雙溪樓)’라는 명시를 남기게 되었다.

 

<쌍계루의 인문학사적 의의>

강암 송성룡, 석호 서옹스님의 쌍계루 현판 글씨
강암 송성룡, 석호 서옹스님의 쌍계루 현판 글씨

쌍계루는 한국불교의 정맥인 조계종의 큰스님들과 조선유학의 정맥인 성리학자들의 시가 걸려있어 종교를 초월하였다. 또한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은 고려말 성리학자로 태종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 후 포은은 집권세력의 필요에 의해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을 받게 되고, 삼봉은 개국 1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역도(逆徒)로 몰려 죽임을 당한 뒤 조선조 말 고종 대에 이르러서야 신원(伸冤)되었다. 조선대학교 특임교수를 역임한 김병조 교수는 쌍계루에 대해 이처럼 정치노선과 사후의 모습이 극렬히 대비되는 두 사람의 글이 쌍계루에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은 쌍계루가 이념을 초월하여 대화합을 이루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또한 조선왕조 정여립 사건 이후 서인(西人)의 공격에 앞장섰던 동인(東人)의 우두머리 아계 이산해의 시와 서인을 대표했던 사암 박순의 시문이 쌍계루에 함께 걸려있다. 정치적 이념을 초월한 의미다.

쌍계루 현판에 걸려있는 시 가운데는 조손(祖孫)사이의 시가 함께 걸려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계 이산해는 목은 이색의 7대손이다. 포은 정몽주와 월사 이정귀 사이는 외가의 후손이 되는 사이이고, 대제학 이민서와 대제학 이휘지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다. 노사 기정진과 송사 기우만도 조손 관계이고, 추사 김정희 선생의 종조부인 생원 김항주와 나주목사 김유희 사이도 조손관계다.

따라서 쌍계루는 종교와 당파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여 함께 만나는 화합과 공존의 자리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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