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故이영구 선생 대통령 표창
독립유공자 故이영구 선생 대통령 표창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11.20 14:44
  • 호수 994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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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읍 백계리 출생, 항일 독립운동으로 옥고 치러
남강 이영구 선생
남강 이영구 선생

독립유공자 남강(南岡) 이영구(李瑩銶) 선생이 타계한 지 43년 만에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지난 1117일 제84주년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광주 광덕고등학교에서 열린 광주`전남 행사에서 이 선생의 유족이 대한민국 독립과 국가 건립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이영구 선생은 1900819일 장성읍 백계리 478번지에서 이치홍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립장명학교(현 성산초등학교)와 서당에서 공부했고, 1913년 나주 임씨와 혼인했다.

이 선생의 조부는 해남군 현감을 지낸 이용중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야은재(野隱齋)를 지은 인물이다. 이용중은 성재 기삼연이 의병을 일으킨 것을 알고 군량미에 쓰라고 900(현재 6천여 만원 추정)을 쾌척하였다. 고종이 승하하자 북쪽을 향해 통곡하며 그 자리에 망곡단(望哭壇)을 세웠다고 한다.

이영구 선생은 영산홍이 필때 광주, 전남, 장성 유지들을 초대해 화전놀이를 했다.
이영구 선생은 영산홍이 필때 광주, 전남, 장성 유지들을 초대해 화전놀이를 했다.

이용구 선생의 부친 이치홍은 망국의 한을 품은채 은둔하며 마을에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하며 500여 수의 한시를 남겼다. 이영구 선생의 숙부인 이치학은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와 장성협동조합에 가입해 독립자금 등을 지원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처럼 민족의식과 대한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집안의 가풍을 이어받은 이영구 선생은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191931일 인산(因山, 장례식) 참석을 위해 상경하여 3.1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신간회 활동으로 본격적인 항일운동 시작>

1927년 신간회가 설립되고, 이선생은 1928년 신간회 장성군 재정부장을 역임하고, 1929년 검사위원(감사)에 선임되었다. 이때 광주학생운동 진상조사위원이 되어 서울에서 내려온 허헌, 황상규, 김병로(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와 회합하게 된다.

이영구 선생은 이때부터 장성출신으로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었거나 도피 중인 학생들을 지원하며 은신처를 제공하였다.

야은재(전남 문화재 자료)
야은재(전남 문화재 자료)

1931년 신간회가 해산되자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에 수탈되고 있는 경제를 우리 손으로 살리자는 뜻으로 농민협동조합등을 설립하게 된다. 인도의 간디가 영국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산 장려운동을 펼친 것과 다르지 않다. 이영구 선생은 장성협동조합 창설준비위원 및 부조합장이 되었다. 조합장은 월평초등학교 설립자인 김시중이 맡았다.

하지만 협동조합이 독립운동의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며 일제는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1933318일 전북경찰이 장성협동조합 주요활동가 10여 명을 검거하였고, 이영구 선생은 전주형무소에서 7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하지만 일경의 고문과 구타 등으로 이영구 선생의 몸은 중환자가 되어 있었다. 가족들은 이 선생을 백양사에서 휴양하게 하였고, 수개월의 치료 끝에 겨우 몸이 회복되었다.

 

남강의 조부 이은 이용중(야은재 건립)
남강의 조부 야은 이용중(야은재 건립)

<교육 활동 등 지역에 봉사>

이영구 선생 후손들이 대통령표창장을 받았다.
이영구 선생 후손들이 대통령표창장을 받았다.

옥고를 치르고 몸이 망가진 이영구 선생은 어려운 형편의 주민들을 돕거나 지원하는 일을 했다. 해방 후 장성읍 의회 초대의장과 제2대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재건국민운동 장성군지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전라남도 도정 자문위원, 장성군 자문위원 등을 맡아 지역발전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6.25전쟁으로 불타버린 장성북초등학교를 다시 짓게 되자 자신의 전답을 희사하여 백계리(남양촌길 19)로 옮겨 신축하게 된다. 학교를 지은 뒤에는 1953년부터 10년 동안 기성회장을 역임하며 학교 발전에 기여했다.

1963년 장성에 집중 호우가 내려 황룡강 제방이 무너지고,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는데 당시 국가재건회의 의장이던 박정희가 현장을 점검하러 왔을 때 강 양쪽에 제방을 쌓아 재난을 막아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영구 선생은 자신의 전담을 양보하고 주민들을 설득하여 제방을 쌓는데 협조하여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이영구 선생은 1979년 부인 임금례 여사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1980년 향년 80세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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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증순 2023-11-22 07:31:37
멋진 기사 감사합니다!

명예장성군민 2023-11-21 23:05:32
선민의식과 결개가 대단하신 분이시네요

이준환 2023-11-21 22:24:48
소설같은 재미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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