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3.1운동 별기(別記) 열사 박영관
장성 3.1운동 별기(別記) 열사 박영관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11.13 14:32
  • 호수 9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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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동척 사건의 숨은 이야기를 찾아

장성공원에 1972<3.1운동열사장성의적비>가 건립되었고, 북이면 모현리 만세운동과 삼서면 소룡리 만세운동 그리고 장성 출신으로 광주에서 만세운동을 벌여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 24인의 명단이 새겨있다.

24인은 신경식, 신상우, 신태식, 신국호, 고용석, 오상구, 박영관, 정선유, 임춘열, 김응현, 최경동, 류상능, 류상순, 류상학, 류상설, 정병모, 박광우, 변순기, 류희영, 송주일, 정길언, 나상철, 오석완, 박일구 지사이다.

이 가운데 박영관 지사는 장성 출신이 아닌 고창군 출신으로 장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24인에 포함된 인물이다. 그런데 박영관 지사는 3.1만세운동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을 제외하고 장성군 삼서면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박영관 지사가 3.1만세운동 이후에도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1923년 대한독립단 통의부원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보충하기 위해 지폐를 위조하다 1928년 일경에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이리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하기 위해 준비하였다가 사전에 정보가 새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는 등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또한 박영관 지사가 여생을 보낸 삼서면에는 그의 행적이나 자취를 알 수 있는 새김돌이나 안내판 하나도 세워져 있지 않다. 3.1만세운동과 동척폭파사건 등의 배경과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고창군 무장면에서 태어나 1919년 장성으로 오다>

박영관 지사의 호는 송와(松窩)이고 본관은 밀양이며 189977일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 284번지에서 박경삼과 설명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박지사의 나이 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6세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박지사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농사일을 했다. 청년 시절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일제의 수탈에 분해하던 박지사는 1919년 무장면 도곡리 자택을 찾은 송흥진과 송주일을 만나 고창 만세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그리하여 1919315일 무장면 장날을 기회로 400여 명의 학생과 주민이 모여 박영관지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박지사는 송흥진의 고향이며 송주일이 거주하고 있던 장성군 삼서면으로 숨어들어와 가명을 사용하며 생활하였다. 송흥진은 북하면 대악리 출신으로 1911년 대악리 장로교회에 신자가 되었고, 1913년 남장로교 타마자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15년 숭일학교 농감으로 부임했는데 숭일학교와 수피아여고는 남장로교 유진벨 목사가 설립한 학교로 1919년부터 1930년대까지 광주`전남의 항일운동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으며, 두 학교는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었다가 1945년 광복 이후 복교했다.

송주일은 고흥군 남양면 출신이며 송흥진의 숭일학교 제자로 삼서면 소룡리 교회 소속 소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고창군 무장면은 삼계면 생촌리와 산 하나를 넘어 닿아있는 지역으로 삼서면에 거주하던 송주일이 어떻게 박영관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송주일을 만난 뒤 315일 무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박영관지사는 장성으로 넘어와 44일까지 장성군의 만세운동에 함께하였다. 송주일은 그해 411일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박영관 지사의 증언에 의하면 고창 만세운동을 벌인 뒤 일본 헌병에 잡혀 포승줄에 묶이려는 순간 헌병의 얼굴을 가격하여 목포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대한독립통의부 조인현과 만나다>

장성에서 다시 목포로 숨어 들어간 박영관지사는 19233월 목포 관해장 여관에서 대한독립통의부 조인현을 만나게 된다. 대한통의부는 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단체로 조선인의 민족교육과 무장운동을 펼쳤다. 박영관지사는 조인현을 만나 대한통의부에 가입하기로 하고, 대한독립통의부의 전남 책임자가 되었다.

조인현의 재판기록에 그는 1917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독립단 통의부에 가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인현은 19286월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익산)지점을 폭파하기 위한 주모자로 체포되어 19303월 재판에서 징역 4년을 언도받았다.

박영관지사는 통의부에 가입한 뒤 3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모집하여 대한통의부 본부로 보냈고, 1927528일 오석완이 조인현으로부터 받은 권총과 실탄을 받아 항아리에 넣어 보관하였다. 오석완은 삼서면 수양리에 거주하며 두월리에 거주하던 박영관 지사와 담양의 정기환 등과 함께 통의부에 가입해 활동했다. 박영관지사가 1923년 통의부에 가입한 것으로 보아 오석완은 박지사의 권유로 통의부에 가입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박영관 지사와 오석완은 조인현이 주도한 동척 이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6개월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박영관 지사는 19286월에 체포되어 19303월 재판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숱한 고문을 당했고, 193010월 감옥에서 나왔을 때는 온몸이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왜 동양척식주식회사였는가>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조선 땅의 개간과 농업 발전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세워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는 역할을 했다. 일제는 모든 토지를 조사하여 예전에 조선 정부나 왕실이 소유했던 많은 농토나 숲, 산지 등을 조선 총독부 소유로 넘겼고, 조선 총독부는 이 땅을 다시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넘겨 관리하도록 했다.

동척은 조선 최대의 지주가 되어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거나 곳곳에서 직접 농장을 경영했다. 동척으로부터 땅을 빌린 농민들은 수확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내야 했다.

또한 동척은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에게 헐값으로 땅을 넘겨주었다. 조선을 안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적당한 숫자의 일본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 일본인 지주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동척이 조선의 농민들을 괴롭히고 착취하자 동척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적개심도 높아졌다. 1920~1930년대에는 동척을 상대로 소작인들의 저항(소작 쟁의)이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의열단원 나석주는 1926년 동척에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폭탄이 터지지 않자 건물 안으로 들어가 일본의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였고, 일본인 직원들을 사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인현은 박영관, 오석완 등 8명과 함께 동척 이리지점을 폭파하기 위해 화약제조자를 구하고, 권총과 실탄 등을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영관지사는 192864일 체포되어 19301013일 전주형무소에서 출소했다. 출소한 박지사는 체포되기 전에 은신했던 삼서면 두월리 947번지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터를 잡은 박지사는 1937년 마흔이 다 되어 스무살 차이가 나는 봉분례 여사와 혼인하였다. 봉여사와 7남매를 둔 박지사는 마지막 여생을 삼서면 두월리에서 살았다.

하지만 삼서면 두월리 어느 곳에도 박영관 지사의 흔적을 알 수 있는 표지판 하나도 없어 안타깝다. 고창군이 박영관 지사의 생가를 독립운동가의 사적으로 지정하고 관리하는 것과 비교하면 장성군이 독립지사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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