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3
장성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3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10.10 10:41
  • 호수 9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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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못했으나 기억해야 할 사람들
정부가 주지 못한 훈`포장 국민이 새겨 주어야
북로 독군부 대원들
북로 독군부 대원들

<만주 등에서의 독립운동>

19193.1만세운동 이후로 일제의 탄압은 혹독하였고, 독립전쟁을 위해 부득이 중국 등에서 군사력을 길러야 했기 때문에 많은 애국지사가 만주와 러시아 국경 등에서 독립군을 창설하고 일제와 싸웠다.

192066~67일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 등은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웠다.

이 전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이 전사한 반면 아군은 불과 4명만 전사했다고 발표했다.

청산리 전투는 192010월 김좌진, 이범석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을 주축으로 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등 간도에 10여 차례 출병한 일본제국 육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장성출신으로 독립전쟁과 관련하여 서훈을 받은 인물은 이만준 의사(황룡면 월평리), 오석완 의사(삼서면 수양리)가 건국훈장 애족장을 정완면 의사(장성읍 성산리)는 건국포장을 받았다.

이만준은 회당 이시영 선생의 휘하에서 청년들을 모아 독립군을 양성하는 백산학교에 입학시켰으며 군자금을 모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2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징역 5년의 옥고를 치렀다.

오석완은 군산에서 장재여관을 경영하며 일경의 감시를 피해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는 위조지폐를 만들어 군자금으로 이용하려다 체포되어 징역 8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완면은 대한독립군비단 부단장으로 활동하며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장성 사람>

성진회원, 송동식과 가까웠던 장재성(중앙 오른쪽 두번째)
성진회원, 송동식과 가까웠던 장재성(중앙 오른쪽 두번째)

19193.1 독립운동이 일어난 뒤 1919411일 중화민국 상하이시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해산하였다.

임시정부 내에는 군무부(軍務部)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한국의 청년들을 중국 사관학교에 입학시켜 독립군 간부로 양성하였다. 1939년 임정은 중국 정부로부터 광복군 창군을 승인받았다. 독립군의 군사 활동이 중국 땅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국 정부의 승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병우(삼계면 상도리)의사는 서울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19193.1만세 시위에 가담한 뒤 상해로 탈출하여 임시정부 상해 특파원으로 전라도에 파견되어 동지들을 규합하고 독립자금을 모으는 역할을 했다. 1935년 서울 재동에 공인당 한약방을 운영하며 여운형, 한용운 등의 밀회 장소와 연락장소로 이용했다.

차영섭 의사는 일본 동경에서 유학 중 19402월 이정현 비밀결사 동맹회를 조직하여 독립의식 함양에 힘쓰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1942530일 출소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629일 대삼병원에서 25세의 나이에 순국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장성>

19193.1독립만세운동 이후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주춤했었다. 그런데 192911월 광주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3월까지 전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운동은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이다.

광주고보 학생들은 113일 광주에서 거리시위를 벌였다. 113(음력 103)은 일왕 메이지의 생일인 명치절(明治節)이어서 학생들은 이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명치절 행사를 마친 광주고보 학생들은 광주 시내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부 학생은 편파 보도를 했던 광주일보사로 몰려가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기도 했다. 이날의 시위는 광주고보만이 아니라 광주여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일부 참여했다. 일제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광주 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 학생 수십 명을 가두었다.

당시 학생들은 격문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의 자유 보장,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민족 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보장 등 9개 항목을 내세웠다. 이날의 시위로 수백 명의 학생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며, 광주 지역의 소식이 다른 지역에 알려지면서 학생들의 시위운동은 목포와 나주 등 인접 지역으로 퍼져갔고, 12월과 이듬해 1월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장성에서는 옥중에서 순국한 기환도 등 15명이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 서훈을 받았다.

황룡면 월평리 출신의 기환도의사는 광주서중 항일학생 결사인 무등회 소속으로 보성전문학교(현고려대학교)법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독립운동을 지속해 1943년 일경에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에 의한 후유증으로 1944410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월평리 출신 기태룡(기영도)는 광주서중 무등회 소속으로 옥고를 치렀고, 서삼면 출신 김기주는 광주사범 소속으로 옥고를 치렀다. 북하면 약수리 출신 김병기는 광주고보에 재학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서 옥고를 치렀고, 서삼면 장산리 출신 김종수는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대) 재학 중 강제퇴학 후 옥고를 치렀다. 진원면 진원리 출신 박중진은 광주사범학교 재학중 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한 뒤 옥고를 치렀고, 백재호는 삼서면 홍정리 출신으로 동경중앙대학에 재학중 임시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도모하다 옥고를 치렀다.

송동식은 장성읍 출신으로 광주사범학교에 재학했으며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남면 덕성리 출신의 기희준은 광주고보 재학 중 체포되어 기소되었고, 김상중은 영천리 출신으로 광주사범학교에 재학 중 옥고를 치렀다. 김창주(황룡면)는 광주고보에 재학 중 시위를 주도하여 퇴학당했고, 나금주(삼서면)는 광주서중 재학 때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노동훈(삼서면)은 광주사범학교 재학 중 옥고를 치렀다.

변진설은 독립운동가 변순기(3.1독립만세로 옥고)의 아들로 1928년 광주고보에 재학 중 동맹휴교를 전개하다 퇴학당했다. 그 후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백양사 송만암 스님에게 출가하여 월주(月珠)라는 법호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독립운동가 백용성 스님이 창건한 화과원 주지를 하며 독립자금을 조달하였다.

 

<독립의 열망은 끊이지 않았다>

변진설(월주스님) 중앙 가운데
변진설(월주스님) 중앙 가운데

강기환(삼서면 대도리)은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김영식(장성읍 영천리), 이기하(삼계면 상도리)는 대한독립애국단원이 되어 부호들에게 독립자금을 수합하다 옥고를 치렀다.

송병엽(삼계면 주산리), 송병일(주산리)은 농촌진흥회를 조직하여 독립의식을 고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홍종휘(삼계면 사창리), 변동갑(삼계면 삼계리) 신간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장성 신간회, 농민조합 그리고 노동조합 결성 등은 조합을 통한 항일 독립운동으로 192712월에 결성된 장성신간회는 1929년 부회장인 송중근이 구속되고, 김시중 등 5명은 집행유예를 언도받았다.

1934년 노동조합 사건으로 재판을 받아 옥고를 치른 인물은 월평초등학교 설립자인 집행위원장 김시중을 비롯해 나상운, 김인수, 남궁현, 김창한, 이수길, 기원흥, 기노춘, 송중근, 고형주 등 10명에 이르렀다.

[장성의병사]에 수록된 독립운동 미서훈자는 139명에 이른다. 하지만 독립운동 자료에 수록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역사를 잊은 국가는 지속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재산은 물론 목숨마저 던진 선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문향이며 의향(義鄕)으로 불리는 장성은 조선시대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뛰어넘어 수많은 애국지사가 탄생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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