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2)
장성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2)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09.25 14:59
  • 호수 9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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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못했으나 기억해야 할 사람들
정부가 주지 못한 훈`포장 국민이 새겨 주어야
부동교 반세운동 재현
부동교 반세운동 재현

<경술국치와 장성 사람>

19051117일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일본군을 동원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제국은 1905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본제국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대한제국(조선)의 일본 식민지를 묵인하고 동조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1910년 일제의 한일 강제합병 이전인 1905년 미국은 일제의 조선 침략을 묵인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미국이 언제 또다시 일본의 편에 서서 일본의 손을 들어 주며 한국에 등을 돌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최근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독도를 일본에서 사용하는 이름인 다케시마(竹島)로 사용하고 있다.

1910822일 조선이 일본에 강제 합병되자 서삼면 장산리 외연마을에서 출생한 반학영(潘學榮, 일명 반하경(潘夏慶))선생은 식음을 마다하고, 방안에서 통곡하다가 95일 경기도 파주 삽다리 장터에서 할복하고 자결했다. 반선생은 유서에 임금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은 통감(일본인)과 역신(逆臣)들 때문이라. 5백년 종사를 일본에 내주고 말았으니 통한(痛恨)하도다.(중략) 내 배를 갈라 죽어 의사 민영환과 여러 충신과 함께 역대 군왕을 섬기려니 수천만 동포는 혈심(血心)으로 단결하여 충성을 본받으라고 했다. 선생은 자결하기 전에 양숙부(養叔父)인 홍택주를 찾아가 나라가 망했으니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고 자결을 예고했다.

1937년 세워진 비석의 비문은 통정대부 김영한이 쓰고 글씨는 승록대부 윤용구가 썼다. 2001년 선생의 유해가 국립묘지 현충원으로 이장하면서 비석은 서삼면 장산리 남평반씨 선산으로 옮겼다. 비문을 쓴 김영한은 형조판서를 지낸 김석진의 아들로 김석진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고 일황의 작위를 거절하고 자결한 분이다. 김영한의 [급우재집]에 반학영전이 기록되었으며 1920년 박은식이 상해에서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비분강개하여 순절한 이가 많았으나 신문이 폐간되고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홍범식은 목을 매 자결하고, 이만도는 단식하여 죽고, 반학영은 스스로 칼로 찔러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선생의 비석이 세워진 것은 1937년 일제강점기 때로 일제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김영한, 윤용구를 비롯한 선생의 지인들이 뜻을 모아 선생의 거룩한 일생을 기록하였다.

 

모현리 3.1만세운동 후손들이 위령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모현리 3.1만세운동 후손들이 위령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3.1 독립만세운동과 장성>

경술국치(1910년 한일강제합병) 이후 조선의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은 잠시 주춤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중국, 만주, 미주 등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독립사상을 고취하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9193.1만세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열기는 전국으로 확산하였고, 장성에서도 모현리 3.1만세운동과 장성농민조합 사건, 장성노동조합 결성 그리고 광주학생독립운동 등에 가담하여 조직적인 항일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장성의 3.1독립운동 서훈자는 20명으로 10명이 모현리 만세운동 관련 인물이며 삼서면 소룡리 만세운동과 기타 만세운동과 관련된 분들이다.

모현리 만세운동은 191943일 신경식, 유상설, 유상순, 정병모씨가 중심이 되어 모현 마을 화전회를 핑계로 삼아 마을 주민 2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사건이다.

그날 사거리헌병주재소에서 고용석, 유상설, 유상학, 신진식씨를 주동자로 연행해가자 이튿날 오전 11시경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씨 등이 주민 200여 명과 함께 사거리 시장에서부터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연행해간 유상설씨 등의 석방을 요구했다. 사거리헌병주재소에서 헌병부대를 불러들여 총칼을 휘두르며 주민들을 강제 해산하였고 이 과정에서 주민 6명이 헌병부대원에게 부상당했다.

이 사건으로 고용석씨 등이 구속되어 1~2년의 징역형을 살았고, 1990년 고용석씨 등 6명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박광우씨 등 4명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1987년 애국지사의 뜻을 기리고자 모현리에 3.1사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1989년 완성하였고, 13인의 지사 위패를 봉안했다. 당시 징역형을 받았던 10인과 신경식, 류상능, 신종식씨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었다.

모현리 3.1사
모현리 3.1사

김기형씨는 북이면 백암리 사람으로 191924일부터 자신의 집에서 일본 명치대 유학생 정광호 등과 함께 일본에서 28일 선언한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여 시민에게 배포하고, 시위를 주도하여 체포되어 징역 16월의 형을 살았다. 진원면 산동리 박일구씨는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여 1919310일 광주부동교 아래서 숭일학교, 수피아여고, 농업학교 학생 등 1천여 명의 시위대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주동하여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의 옥고를 치렀다. 북하면 대악리 송흥진씨도 박일구씨와 함께 310일 만세운동을 주동하여 징역 2년형을 살았다.

삼서면 소룡리 송주일은 191938일 교회당에 모인 70여 명의 신자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징역 1년의 형을 살았다. 장성읍 장안리 변순기씨는 광주에서 교사로 재직 중에 310일 광주 부동교 만세운동 시위를 주도하여 징역 4월을 선고받았다. 진원면 김순천씨, 삼서면 노천목씨, 진원면 김학선씨도 310일 광주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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