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1)
장성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1)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09.18 11:00
  • 호수 9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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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못했으나 기억해야 할 사람들
정부가 주지 못한 훈`포장 국민이 새겨 주어야
동학농민운동 승전비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앞에 세워진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희영 선생의 흉상은 장병들이 훈련한 탄피 300kg(소총탄 5만 여발 분량)을 녹여 제작하였다.

국방부는 다섯 분의 흉상을 모두 육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했다가 국민의 반대에 부닥쳐 홍범도 장군의 흉상만 육사 밖으로 이전하고 나머지 네 분의 흉상은 충무관 앞에서 육사 내 다른 장소로 옮긴다고 한다.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뿐 아니라 해군 군함인 홍범도함의 함명도 바꿀 것으로 보인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의 영웅일 뿐 아니라 조국 해방을 위해 아내와 아들들의 목숨까지 나라에 바친 홍범도 장군을 역사에서 지우려고 하는 현 정권의 역사 왜곡과 친일 정책을 보면서 기록되지 못했거나 알려지지 않은 장성의 의병과 독립운동에 앞장선 애국열사들을 찾아본다.

장성군은 2021년 장성문화원(원장 김봉수) 주관으로 [장성의병사]를 발간하여 임진왜란, 정유재란 그리고 정묘병자호란에서부터 동학농민혁명과 한말의병 활동, 일제 강점기 3.1독립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개요와 장성군 관련 인물을 수록하였다.

[장성의병사]2001년 발간한 [장성군사]에 수록하지 못한 일제강점기 농민조합사건, 미서훈자 명단 기록 등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의병사에 수록되었으나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거나 의병사에 수록되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을 찾아 문향이며 의향(義鄕)인 장성의 자긍심과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동학농민혁명운동과 장성>

동학농민 혁명운동에서 장성군은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학농민전쟁에서 황룡전투의 승리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18944월 황룡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양총으로 무장한 정규군인 정예부대를 무찔러 사기가 오르고 자신감을 얻었으며 빼앗은 양총 100여 정은 전주성을 점령하여 전주화약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농민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재건을 도모하였지만 11월 전봉준장군의 체포와 함께 사실상 와해되었다. 장성에서도 30여 명의 농민군 가담자가 황룡장터에서 총살 또는 교수형을 당했다.

동학농민혁명군은 밖으로는 일본군과 싸워야 했고 안으로는 기존의 양반사회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과도 싸워야 했다. 당시의 기록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동학난으로 규정되었고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사람들을 동학 도적떼라는 뜻의 동비(東匪)’라고 부른 것을 보면 알고도 남는다.

봉남일기에 의하면 관군과 일본군은 189412월 동학군에 가담한 사람을 찾아 목을 잘라 죽이거나 불에 태워 죽이기도 했는데 북일면 구해마을에서는 동학농민군의 목을 베어 죽인 뒤 배를 갈라 쓸개를 싸가지고 갔다고 기록되었다.

하지만 동학군이 전주화약에서 맺은 조항 가운데 탐관오리 응징’ ‘노비제 폐지’ ‘청상과부 재가허용’ ‘토지의 평균 분작등은 당시의 유교적 신분제 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내용이었으며 장성황룡 전투 등 장성의 동학혁명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미미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성재 기삼연 선생 묘소
성재 기삼연 선생 묘소

<구한말 장성의 의병전쟁>

189510, 민비가 시해되는 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전국적인 반일 분위기가 성숙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졌다. 단발령이 양반들의 의병운동 참여로 촉발되어 본격적인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장성의병사
장성의병사

18962월 성재 기삼연이 의병을 모았고, 조선군대가 해산되자 1907년에는 마침내 호남창의회맹소를 일으켰다. 기삼연은 1851년에 태어나 종조숙(작은할아버지)인 노사 기정진에게 글을 배웠다. 1908년 순창 복흥산에서 은거하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1908년 광주시 서천교 아래 백사장에서 순국했다. 1985년 이후부터 1910년 한일강제합병 때까지 의병전쟁 등으로 서훈을 받은 장성 사람은 모두 42명이다.

김영백은 1907년 북이면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부, 정읍, 태인, 부안 등을 무대로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고, 교전하였다. 1909년 은둔지에서 적에게 노출되어 1910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양진여는 장성군 갑향면(현재 광산구) 출신으로 1908년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이 되어 광주, 나주, 장성, 등에서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190811월 광산구 대치산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싸워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추월산 전투, 강사문, 전해산 의병대와 장성, 담양의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였으며 1909년 담양 부동촌에서 교전 중 체포되었다. 1910530일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장성의병사에 수록된 수훈자 수
장성의병사에 수록된 수훈자 수

<일본군에 죽은 사람만 몇이던가>

강사문은 진원면 용산리 출신으로 1908년 김태원 의병대에 참여하였다. 김태원은 기삼연 의병장이 결성한 호남창의회맹소에 선봉장으로 활동하다 후에는 독자적으로 의진을 편성하여 나주, 장성, 함평 무안 등에서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강사문은 함평주재소 습격으로 일본 소장을 사살하는 등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나 창평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190912월 사형으로 순국했다.

고제남은 북이면 서거리 출신으로 김영백 장군과 함께 노령산맥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흥덕에서 일본 병참소를 습격하여 총기를 노획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1909년 정읍 소성면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총살당했다.

이 외에 국동완(장성읍 안평)1909년 고창에서 싸우다 체포된 뒤 처형되었고, 김기봉(김용구의 아들)은 흥덕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남면 녹진리 출신의 김봉수는 황룡 탑정리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김봉훈은 김봉수의 동생으로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최전방에서 싸우다 190811월 담양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북상면 출신 김원봉은 김봉수와 함게 황룡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신호리 출신 김익중은 기삼연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고, 고창에서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남면 녹진리 출신의 박준기는 담양 탑전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집으로 돌아와 치료 중에 체포된 뒤 순국하였고, 황룡면 출신의 이기창은 1908년 탑정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삼서면 대도리 출신의 이범진은 전해산 의병대의 도포장(都砲將)으로 수많은 공을 세웠으며 1910년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아 순국했다. 서삼면 이용순은 의병장 신보현의 선봉장으로 1909년 장성에서 일본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중백은 서삼면 장산리 출신으로 기삼연의 의진에서 싸우다 1909년 밀정의 고발로 체포되어 1910년 순국하였다.삼계면 수산리 출신의 이화삼은 삼계면 자초리에 있는 일가 50여 가구 장정과 의병을 일으켜 맹주가 되어 삼북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기삼연의 의진에 들어가 활동하다 1910년 전투 중에 순국하였다.

이 밖에 의병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른 사람들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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