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9)
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9)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04.24 13:58
  • 호수 96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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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유산에서 미래의 가치를 발견하다
확연루의 정면
확연루의 정면

9. 필암서원

 

<필암서원의 건립>

전남에서 유일하게 세계유산에 등재된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그의 사후 30년 뒤인 1590(선조23)년 문인 기효간, 변성온 등과 호남의 선비들이 기산리에 건립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에 탄 후 1624(인조2) 기산리 서쪽인 필암리 증산(甑山)으로 옮겨 재건하였다. 1658(효종9)년 전라도 유생들이 사액을 청원하여 1662(현종3)년에 필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증산리에 있던 서원이 홍수 때 침수의 위험이 있어 1672(현종 13)년 현재의 위치인 해타리로 옮기면서 마을 이름도 필암리로 바뀌었다.

확연루의 후면
확연루의 후면
청절당
청절당

필암서원은 평지에 세워진 서원으로 남북을 중심축으로 주요 건물이 들어서 있다. 확연루(廓然樓)는 서원으로 들어가는 정문에 해당하며 2층 누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생들의 휴식공간이기도 하며 확연(廓然)하서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히 크고 공평무사하다는 의미의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취한 말이다.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1672년에 세워진 확연루는 불에 타 사라지고 1752(영조28)년에 다시 세웠다.

확연루를 지나면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인 청절당(淸節堂)이 있다. 청절당은 정면 5, 측면 3칸의 건물로 중앙에 마루를 깔고, 좌우에 온돌방을 놓았다. 진원현의 객사였으며 1672년 이곳으로 옮겨와 지었다. 병계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 현판이 걸려있고, 청절당 현판은 동춘당 송준길이 썼으며 그는 필암서원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청절당은 송시열이 쓴 김인후의 신도비에 청풍대절이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부드럽고 맑게 부는 바람이며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개라는 뜻으로 김인후의 인품을 표현한 말이다.

청절당의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로 동재인 진덕재(進德齋)와 서재인 숭의재(崇義齋)가 있다.

경장각
경장각

동재와 서재 사이에 있는 경장각(敬藏閣)은 인종이 세자시절 김인후에게 내려준 묵죽도와 묵죽도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경장각의 현판은 정조의 어필이며 경장(敬藏)은 왕과 조상의 유물을 공경하여 소장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경장각의 주심포집에는 3마리의 용과 국화문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인종의 유품인 묵죽도가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화려하게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장판각(藏板閣)에는 하서선생전집의 목판, 백련초해 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모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우동사
우동사

<우동사>

서원은 크게 강학 영역과 제향 영역으로 나뉜다. 우동사(佑東祀)는 하서 김인후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1786년 문인이자 사위인 양자징을 추배하였다. 정면 3, 측면 2칸의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건물의 사방은 담으로 둘러져 있다.

우동사의 글씨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송나라 주희가 지은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집자한 것으로 송시열의 신도비명 중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 김인후 선생을 태어나게 했다는 동방의 동()자와 돕다의 우()를 취한 것이다.

계생비
계생비

우동사 입구에는 계생비(繫牲碑)가 세워져 있는데 봄과 가을 향사(享祀) 때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을 묶어놓고 검사하는 곳이다. 계생비는 다른 서원의 묘정비(廟庭碑)를 겸하고 있다.

우동사 왼쪽에 전사청(典祀廳)은 봄`가을 향사를 준비하는 곳이며 청절당 옆에는 서원을 관리하고, 유생들을 뒷바라지하는 노비 등이 거처하는 한 장사(汗丈舍)가 있다.

한편 우동사에 배향된 양자징은 소쇄옹 양산보의 아들이며 김인후의 사위이자 문인이다. 거창현감을 지냈으며 그의 첫째와 둘째아들인 양천경과 양천회가 기축옥사와 연관하여 국문을 받고 결국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과 김천일이 향병(鄕兵)을 모아 적을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셋째 아들 양천운(梁千運)에게 고경명을 따르게 하였고, 자신은 군량을 도왔다.

1594(선조 27) 담양의 집에서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하서 김인후>

신도비
신도비

하서 김인후는 동방 18(18)으로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도학(道學), 문장(文章) 그리고 절의(節義)가 조선 선비의 상징이 되는 인물로 평가된다.

김인후의 본관은 울산이며 자는 후지(후지) 호는 하서(河西)이며 1510년 황룡면 맥동마을에서 참봉 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6세에 시를 지어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화순에 유배해 있던 신재 최산두(기묘명현)와 모재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김안국에게 글을 배웠다.

1528(중종23)년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이때 퇴계 이황을 만나 9살의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서로를 존중하며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이황은 김인후가 서로 학문을 나누고 싶은 위대한 학자라며 '도학과 절의는 하서를 비교할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어사리
어사리

1540(중종35)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과 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세자(훗날 인종)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책을 맡았다. 세자는 김인후와 5살 차이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내고 지낼 수 있는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숭의재
숭의재

기묘명현(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피해를 입은 선비)의 신원(伸冤)이 이루어지지 않자 부모 봉양을 핑계로 옥과현감으로 나간다. 그런데 인종이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인종이 승하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한 뒤 낙향했다. 인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명종이 수차례나 관직을 내려 조정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김인후는 세상을 떠나기 전 을사년 이후의 관직은 쓰지 말라고 유언할 정도로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김인후는 시문이 호남 3걸로 꼽히는 신재 최산두에게 시문을 익히고, 기묘명현인 모재 김안국에게 소학과 성리학을 배웠다. 김안국은 정암 조광조와 함께 우리나라 성리학의 맥을 잇는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이다. 김안국의 성리학은 김인후, 송인수, 유희춘, 정지운 등에게 이어져 우리나라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560년 김인후는 5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전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명종대)의 관작은 쓰지 마라고 유언했다. 1568(선조1) 하서문집이 간행되었고, 1590년 필암서원이 건립되었다. 1662년 사액서원이 되고, 1669년 문정(文靖)의 시호가 내려졌다. 1796(정조20)문묘에 배향되었다.

 

난산비
난산비

<백화정과 난산비>

필암서원 서쪽 필암리 맥동마을은 김인후가 태어난 곳으로 그가 벼슬을 버리고 처가인 순창에서 2년여 동안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치다 돌아와 일생을 보낸 백화정(百花亭)이 남아 있다. 김인후는 순창에서 훈몽재(訓蒙齋)를 짓고, 송강 정철과 사위 양자징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특히 천명도를 완성하였다.

백화정은 인종이 승하한 음력 71일 김인후가 북쪽을 향해 하루종일 통곡한 난산(卵山)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백화정에서 인종이 하사하였다고 하는 어사리(御賜梨)가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며 아직도 가을이면 열배를 맺고 있다.

백화정
백화정

김인후는 인종이 하사한 배 3개 가운데 두 개를 간직하고 있다가 고향에 내려올 때 부모님께 드렸는데 배의 씨를 마당 옆에 심었더니 싹이 나고 크게 자라 열매를 맺었다고 한다. 현재 배나무는 당시에 심은 배나무의 3세라고 한다. 난산(卵山)은 달걀모양으로 생겨서 붙여진 이름으로 입구에는 난산비가 세워져 있고, 50여 미터를 올라 정상에 이르면 통곡대가 있다. 난산비는 석재 윤행임(1762~1801)이 짓고, 이익회(1767~1843)가 글씨를 썼다.

김인후의 무덤은 맥동마을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입구에 2개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비각 안에 세워진 신도비는 1742년 건립한 것으로 비문은 1682년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1982년에 건립한 신도비는 1979년 본손과 유림의 총의를 거쳐 1796(정조 20) 정조대왕 때 문묘 종사한 내용, 문정(文正)으로 시호를 바꾼 내용을 더했다.

 

<세계유산 필암서원의 '관광 자원화'>

세계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 가운데 현재 강학 기능과 제향 기능을 실행하고 있는 서원은 필암서원과 돈암서원 등 몇 곳에 지나지 않는다. 서원이 지속가능한 문화유산이 되려면 서원의 원래 기능을 지켜나가야 한다. 하지만 과거 서원의 교육 과정인 소학과 대학을 그대로 가르칠 수는 없다. 소학의 가르침을 현대에 맞게 재편성해야 한다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서원을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고 하지만 이와 같은 기본을 잃으면 결국 실패하고 만다. 소수서원 뒤편에 조성한 선비촌은 10개의 고택을 통해 선현들의 학문 탐구의 장소 및 전통 생활공간을 재현하여, 우리 고유의 사상과 생활상의 체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설립되었으나 관람용에 그치고 말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선비촌과 사람이 살고 있는 양동마을 고택이 주는 교훈이다.

장판각
장판각

달성 도동서원이 민가를 헐고, 서원 체험, 숙박 등을 위해 10여 동의 한옥을 건축하였으나 건물이 완성되고도 운영 주체도 결정하지 못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읍시가 무성서원에 한국문화수련원을 짓기로 하였지만 수련원을 운영할 사람을 찾기 쉽지 않다.

경주 옥산서원과 안동 도산서원 그리고 영주시 소수서원 등은 넓은 부지와 아름다운 주변 경관 등으로 충분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과 연계하여 지역의 소중한 관광자원이 되었고, 옥산서원도 양동마을이 있어서 안동시 동부권의 소중한 관광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필암서원은 집성관의 리모델링이 완성되어 감에 따라 강학(교육) 기능을 보강하고, 청소년을 비롯한 성인들의 인성 교육 등을 강화해 나갈 방침이다. 필암서원은 성역화 사업을 통해 유물전시관과 집성관 등을 건립하였고 최근에는 주변 경관 사업도 추진 중에 있다.

백화정 앞 회화나무
백화정 앞 회화나무

필암서원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김인후의 탄생지인 맥동마을(김인후 유허비), 백화정과 난산정 그리고 김인후 신도비를 잇는 순례길을 만들어 필암서원만 들렸다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또한 백화정 입구에 건축물을 철거하고, 어사리와 회화나무를 포함한 정원을 복원해야 한다. 서원 체험을 위한 한옥마을을 조성한다면 필암서원이 아닌 맥동 마을 백화정 주변이 입지가 되어야 하며 맥동마을과 주민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맥동은 마을 뒷길을 따라가면 아치실 마을(홍길동 테마파크)과 가깝다. 아치실은 노사 기정진, 송사 기우만 등과 깊은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아치실에서 200여 미터 거리에 아곡 박수량 백비로 연결되어 필암서원에서 맥동마을과 아치실 그리고 박수량 백비를 탐방하는 선비체험길 또는 청렴의 길 등을 조성하면 청소년들의 하루 체험코스로 충분하다.

서원이 지속가능하고, 지역의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기 위해 가장 절실한 사업은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다. 서원의 강학기능을 현대에 맞게 해석하고 청소년들에게 전달할 수 있으려면 이를 담당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필암서원 집성관에서 젊은 인재들이 하서의 천명도를 논하고, 이를 서양철학과 비교분석하며 현대에 맞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필암서원의 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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