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 108년 대각개교절을 맞이하여
원기 108년 대각개교절을 맞이하여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23.04.24 10:59
  • 호수 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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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장성교당 교무 이성일
원불교 장성교당
원불교 장성교당

428일은 원불교가 열린 날입니다. 원불교에서는 대각개교절(大覺開敎節)이라고 하는데, 원불교의 교조(敎祖)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님이 오랜 구도 끝에 큰 깨달음을 얻은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석가탄신일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을 경축하고, 기독교의 성탄절이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것과는 다르게 원불교에서는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님의 탄생을 기념일로 하지 않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날을 기념일로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원기 108년이 되는 해입니다. 원불교 열린 날이 108번째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428일에 원기 108년 원불교 열린 날을 맞이하며 깨달음의 소식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가고, 은혜의 빛이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기원드립니다.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

원불교의 십상(十相)

원불교는 우리 고장 장성과 바로 인접하고 있는 영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님의 호칭에서 소태산(少太山)은 법호(法號)입니다.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님의 일생의 행적과 활동을 후대에서 열가지 단계로 나누어서 기록하고 설명을 한 것이 십상(十相)입니다. 원불교 십상(十相)의 소개를 통해서 428일의 원불교 열린 날의 전후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늘을 보고 의문을 일으키다 - 관천기의상(觀天起疑相)

소태산은 189155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촌의 평범한 농촌 가정에서 아버지 박회경 선생과 어머니 유정천 여사 사이의 42녀 중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비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7세 때는 마을에 있는 옥녀봉(玉女峰)에 올라가서 푸른 하늘을 보다가 "저 하늘은 얼마나 높고 큰 것이며, 어찌하여 저렇게 파란가", "저렇게 깨끗한 하늘에서 우연히 바람이 일고 구름이 일어나니, 그 바람과 구름은 또한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등 우주의 자연현상에 대해 의문을 가졌습니다. 또한 "나는 어떻게 태어났으며, 부모님은 어찌하여 저렇듯 다정히 사랑하시며 살아가시는가" 하는 등 인간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까지 의구심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소년 소태산은 그렇게 늘 사색에 전념하였는데 이것이 후일에 진리를 깨닫는 바탕이자, 구도의 첫발이 되었습니다.

(2) 산신을 만나려고 삼밭재에서 기도하다 - 삼령기원상(蔘嶺祈願相)

소태산은 11세 때, 아버지를 따라 이웃 면()에서 있었던 묘제(墓祭)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기에 앞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의문이 생겼습니다. 친족이 그 이유를 말하는데 "산신(山神)은 신령하여 모르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소태산은 산신을 만나 그가 품고 있던 의문거리를 해결하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로부터 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험한 삼밭재 마당바위에 오르내리며 정성스러운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아들의 기도 정성에 감동한 부모님도 힘껏 후원했습니다. 결국 산신을 만나지 못하였으나 그의 의문거리를 풀려는 지극한 원력(願力)은 더욱 뭉쳐졌습니다.

(3) 스승을 찾아 고행하다 - 구사고행상(求師苦行相)

산신을 만나 뜻을 이루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소태산은 부모의 명에 따라 15세에 결혼했습니다. 16세 되던 해 정월, 처가에 갔던 그는 마을 사람들이 들려주는 고대소설 조웅전(趙雄傳)에서 주인공이 도사를 만나 크게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후부터는 그 동안의 모든 의문을 풀어 주고 인생의 바른 길을 가르쳐 줄 참 스승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사람이 보통 사람과 다른 행실이나 모습을 보이면 그가 가지고 있던 의문을 집요하게 물어서 풀어 보려 하거나 혹은 그 사람이 혹 도사가 아닐까 싶어 집에 모셔다가 대접을 하며 공을 들이기도 했습니다. 대종사는 이렇게 우주와 인생에 대한 의문을 일시에 풀어 줄 스승을 찾아 6년 동안 갖은 고행을 다하였으나 그 의심을 풀어 줄 도사는 없었습니다.

 

(4) 강변에서 입정하다 - 강변입정상(江邊入定相)

참 스승을 만나서 원()을 이루어 보려고 고행하던 소태산이 20세 되던 해, 그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부친이 돌아가셨습니다. 마침내 가사를 돌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 소태산은 도사 만날 일을 차차 단념하였습니다. 구도와 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괴로움 속에서 2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내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 하는 큰 걱정만 날로 계속되었습니다.

아침에 밭일을 나가면서 밥상을 차려 놓고 나갔던 부인이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집에 들어와보면 소태산은 아침 밥상 그대로 두고 묵연히 앉아 있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몸에는 종기가 생기고 독감 등으로 괴로움을 겪기도 했지만 진리를 구하는 소태산에게 그것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과정에 이따금 떠오르는 주송(呪頌)도 외우고 우두커니 명상에 잠기기도 하다가 24세부터는 그 걱정까지도 다 잊고 대정(大定)에 자주 들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법성장에 가기 위하여 길룡리 선진포에서 나룻배를 기다리다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입정(入定)하여 한나절을 지낸 일도 있었습니다.

 

(5) 노루목에서 진리를 크게 깨닫다 - 장항대각상(獐項大覺相)

긴긴 세월동안 마음에 품고 닦아 왔던 큰 서원과 적공으로 대정(大定)에 들었다가 26세가 되던 해인 1916( 丙辰) 428일 새벽, 소태산은 당시 거처하고 있던 노루목에서 동쪽 하늘의 서광(瑞光)을 보고 문득 마음이 밝아지며 그 동안의 모든 의심이 다 풀리고 마침내 우주의 진리와 인생의 이치를 밝게 깨쳤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진리를 깨달은 한 소식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이로부터 희미해졌던 불법(佛法)의 참뜻이 거듭 밝혀지고 불법이 널리 대중의 생활 속에 전해질 전환점이 되었으니 바로 원불교가 열린 것입니다. 이 날을 기념하는 경축일이 곧 428일 대각개교절입니다.

(6) 영산에서 바다를 막아 간척답을 만들다 - 영산방언상(靈山防堰相)

대원정각을 한 후 최초로 구인제자를 얻어 저축조합을 설치하고 미신타파ㆍ허례폐지ㆍ근검저축ㆍ절약절식ㆍ공동출역 등으로 새 생활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1918(원기3) 4월부터 1년간 구인제자들과 함께 영산 앞의 갯벌을 막아서 간석지 개간사업을 전개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때 약 26천여 평의 농토를 새로 만들게 되었고, 이를 통해 훗날 새 회상 창립의 경제적 기초로 삼았습니다.

 

(7) 혈인기도로 법계의 인증을 받다 - 혈인법인상(血印法認相)

기미년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퍼지자 방언공사를 서둘러 끝마치고 이어서 구인제자로 하여금 마음을 통일시키고 공도정신을 살리기 위해 진리 앞에 사무여한의 기도 서원을 올리게 했습니다. 1919(원기4) 821일에 마침내 백지혈인의 이적이 나타나 새 회상창립의 법계 인증을 얻게 되었습니다.

 

(8) 봉래정사에서 만대의 교법을 만들다 - 봉래제법상(蓬萊制法相)

혈인기도를 끝낸 다음, 그해 10월경에 전북 부안 봉래정사로 들어가 몇몇 제자들과 함께 수양과 보림에 주력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창립인연들을 만나고 일원상ㆍ사은사요ㆍ삼학팔조를 중심으로 한 교리의 강령을 제정하고, 조선불교혁신론수양연구요론등의 초기교서를 초안했으며, 원불교 총부 건설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9) 익산총부 신룡리에서 교법을 널리 펴다 - 신룡전법상(新龍轉法相)

마침내 시기가 무르익자 1924(원기9) 61일에 익산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원불교 교문(敎門)을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전북 익산시 신룡동 344-2에 총부기지를 정해 12월경에 1차 건설을 끝내고 이로부터 20여년간 제생의세의 교화사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10) 계미년에 열반하다 - 계미열반상(癸未涅槃相)

일제의 압정 속에서 교단을 창립 발전시켜 오다가 1943(원기28) 계미년 6153세로 열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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