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8)
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8)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04.17 22:41
  • 호수 9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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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유산에서 미래의 가치를 발견하다
옥산서원 구인당
옥산서원 구인당

8. 옥산서원과 양동마을

 

<옥산서원>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옥산서원은 1572년 이언적의 제자들과 지역 유림이 세우고, 2년 뒤인 1574(선조7)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2010년 세계유산에 등재된 하회마을,병산서원과 함께 옥산서원은 양동마을의 일부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으며 2019년 세계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 중에 하나다.

옥산서원은 자계천(紫溪川)을 따라 독락당(獨樂堂)까지 800여 미터에 이르는 아름다운 계곡이 서원 앞을 흐르고, 수백 년 된 아름드리 가로수가 줄 지어 있어서 문화 관광지로도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정례사지 13층탑
정례사지 13층탑

독락당 계정(대한민국 보물)에서 잠시 세속의 먼지를 털고 100여 미터를 걸으면 신라 때 조성한 정혜사지 13층탑(대한민국 국보)이 주변 산세와 어울려 있다.

옥산서원의 외삼문은 역락문(亦樂門)으로 논어의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不亦樂乎)’의 구절에서 따왔다. 역락문을 들어서면 유생들의 휴식 공간인 무변루(無邊樓)가 자리하고 있다. 본래 이름은 납청루였으나 영의정을 역임한 노수신이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며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따와 무변루로 고쳤다.

한석봉이 쓴 무변루 현판
한석봉이 쓴 무변루 현판

무변루의 편액은 한석봉이 썼으며 가변()이 황주 변씨가 쓰고 있는 성 변자와 같다. 따라서 당시에도 두 글자가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무변루로 올라가는 계단은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특이한 형태다.

서원의 강당은 구인당(求仁堂)으로 마루 양쪽의 해립재(偕立齋)와 양진재(兩進齋)는 학인들을 가르치던 선생이 거처하던 방이다. 구인당은 이언적이 유배되었을 때 지은 구인록(求仁錄)에서 인용한 것이다. 구인당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기 전인 54세에 쓴 것이며, 구인당 앞 좌우에는 동재인 민구재(敏求齋)와 서재인 암수재(闇修齋)가 있다.

사당인 체인묘(體仁廟)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묘()는 임금이나 공자와 같은 성현을 모신 곳에 사용하는 것으로 이언적을 높게 숭앙하는 뜻이다. 체인묘 왼쪽에 신도비는 서원 앞 계곡에 있던 것인데 홍수 등으로 훼손될 수 있어 서원 안으로 옮겼다.

옥산정사
옥산정사

<독락당과 계정>

독락당 계정
독락당 계정

옥산서원에서 800여 미터 자계천을 따라 올라가면 이언적이 1532년 김안로를 탄핵하다 파직되어 자옥산 아래에 지은 사랑채 독락당과 자계천을 내려다보는 계정이 있다. 이곳은 이언적의 아버지가 지은 초가 정자가 있던 곳이며 둘째 부인이 시집올 때 지은 안채와 행랑채가 있던 곳이다. 이언적은 첫 부인에게 자식을 얻지 못하여 둘째 부인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계정은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정자는 자계천 바위 위에 기둥을 세우고, 마루와 방으로 구성되었다.

양진암
양진암

1620년경 불에 타서 1650년 다시 지었다. 계정은 독락당의 한 공간으로 계곡과 집안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계정(溪亭)의 현판은 한석봉이 썼으며 계정에서 ㄱ자로 꺾어 지은 2칸 방의 양진암 현판은 퇴계 이황의 글씨다.

양진암(養眞庵)은 사찰의 작은 암자를 뜻하는 이름으로 정혜사(淨惠寺)의 한 스님과 교류했던 이언적이 그 스님이 와서 머물도록 배려한 공간이었다고 한다.

독락당은 이언적이 옥산서원 앞에 세심대와 독락당 계정 앞의 관어대, 자옥산, 화개산 등과 함께 사산오대(四山五臺)의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심신을 수련하기에 마땅한 곳으로 여겼던 곳이다. 독락당은 옥산정사로 불렀으며 바로 옆에 있는 귀후재(歸厚齋)1662년 이상규가 여강이씨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서당으로 1950년 이후까지도 운영되었다고 한다.

 

<회재 이언적>

이언적과 손중돈이 태어난 서백당
이언적과 손중돈이 태어난 서백당
회재 이언적이 청백리에 가자되면서 후손들이 지은 경청재
회재 이언적이 청백리에 가자되면서 후손들이 지은 경청재

동방 5(五賢)으로 추앙받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본관은 여주이고, 자는 복고(復古) 원래 이름은 적()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으로 고쳤다. 1491년 외가인 경주 양동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墩)에게 글을 배웠고, 15142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다. 손중돈은 이조판서와 4번이나 대사간을 역임한 인물로 서예가로도 이름이 났으며 점필재 김종직에게 학문을 익혔다. 이언적은 1530년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어 권신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여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 안강 자옥산 아래 독락당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이 무렵 중종에게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렸는데 김안로 등의 훈신(勳臣)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비판하며 정치의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가짐(一綱)이며 이를 실천하기 위한 열가지 조목(十目)을 열거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고 1542년에는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544년 윤원형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의금부 판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 사건이 일어나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다. 유배기간인 7년 동안 [구인록(求仁錄)], [봉선잡의(奉先雜儀)],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155363세에 유배지인 강경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가장 큰 논쟁이 되는 이()와 기() 중에 이를 중시하는 주리론을 주창하였으며 그의 학문이 퇴계 이황에게 이어졌다.

1568(선조1) 신원(伸冤)되고, 그 유문(遺文)을 수집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며 이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1569년에 종묘(宗廟)에 배향되었다. 1610년에는 문묘(文廟)에 종사되었으며 영남 남인의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되었다.

 

양동마을
양동마을

<이언적과 양동마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은 옥산서원과 8km 떨어진 곳에 있다. 보물로 지정된 송첨고택은 이언적의 외조부인 손소(1433~1483)가 지은 집으로 손중돈과 이언적이 태어났으며 조선의 국반(國班)으로 불리는 양동마을의 시초가 되는 곳이다.

서백당
서백당

월성손씨 종택 또는 서백당(西百堂)이라고 부르며 손소가 처가인 양동마을로 이주하여 살다가 분가하며 지었다고 한다. 손소는 원래 청송에서 태어나 양동마을 풍덕 류씨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로 들어왔다. 그리고 손소의 장녀와 여강 이씨 이번이 혼인하여 이언적을 낳았는데 그 후로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양동마을에 세거하며 현재의 양동마을이 만들어졌다.

이언적의 모친이 살던 향단
이언적의 모친이 살던 향단

보물인 향단(香壇)은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노모를 모시라며 임금이 하사하여 지었다고 전한다. 보물인 관가정(觀稼亭)은 손중돈이 분가하며 지은 집으로 형산강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경관이 빼어난 위치에 있다.

양동마을은 1984년 대한민국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10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으며 국보 1, 보물 5, 국가민속문화재 12, 경상북도지정문화재 8점 등 26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이다.

양동마을은 2013년 유네스코가 선포한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이 선포된 지 40년을 맞아 세계 160여 나라 981점의 세계유산 가운데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장 잘 구현한 26개 사례 중에 하나로 뽑혔다. 이는 양동마을이 국보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500여 년 동안 대대로 조상의 대를 이어 가풍을 잇고,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양동마을의 이야기 풀기>

양동 무첨당
양동 무첨당
이언적 신도비
이언적 신도비

조선 중기까지 양반들의 처가입향(妻家入鄕)은 흔한 일이다. 이는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고르게 나누어 주던(균분상속) 풍습과 깊은 관련이 있다. 경주 손씨가 풍덕 류씨 집안에 장가들고, 여주 이씨가 경주 손씨에 장가들어 양동마을로 입향하면서 대대로 이 마을에 세거하며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균분상속의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동마을은 씨족 마을인 동시에 양반의 세거지로 양반을 보필할 노비와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다. 기와집 아래 서너 가구의 초가집은 대부분 노비가 살았던 집이었으며 해방 이후 노비들은 이곳을 떠났다.

양동마을에서는 이언적과 손중돈의 후손 중에 문과 급제자가 31명이 나왔으며 무과 등에 급제한 사람만 무려 116명에 달하고, 수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이는 월성손씨 문중 서당인 안락정과 여강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강학당에서 서로 경쟁하며 자녀들을 가르쳤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한편 손씨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통감속편(通鑑續編)1422년에 간행된 중국의 역사서로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다.

심수정 회나무
심수정 회나무

1476년 왕실의 도화서 화원에 의해 제작된 손소의 초상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이언적의 종택인 무첨당은 보물이다. 무첨당은 1510년 이언적이 외조모인 풍덕류씨가 별세하면서 받은 유산으로 지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에는 외손자에게도 유산이 상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첨당(無忝堂)은 이언적의 장손인 이의윤의 호로 훌륭한 조상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겠다는 뜻이다.

세심대, 옥산서원에서 독락당으로 가는 길
세심대, 옥산서원에서 독락당으로 가는 길

심수정은 1560년경 여강이씨 문중에서 세운 정자로 화재로 인해 타버린 뒤 1917년 다시 세웠다. 이곳에는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는데 회화나무와 배롱나무는 양반집이나 서원 등에 많이 심어져 있다.

옥산서원은 독락당으로 이어지는 넓은 공간과 자계천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이 더해져 사계절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다. 서원에서 8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양동마을과 함께 경주 북부권의 중요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서원 고유의 기능인 제향과 강학 중에 강학기능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독락당의 세심마을에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한복 입고 예절 배우기 외에 대부분의 체험이 놀이 중심으로 짜여 있어 강학기능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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