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7)
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7)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04.10 14:49
  • 호수 9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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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문화유산에서 미래의 가치를 찾다
돈암서원 응도당
돈암서원 응도당

7. 동방 18현 중 4현을 모신 돈암서원

 

<돈암서원의 설립>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3길에 위치한 돈암서원은 사계(沙溪) 김장생을 기리기 위해 그가 타계한 지 3년 뒤인 1634년 연산현에 임리에 창건하였다. 1658년 김장생의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을 추배하였고, 1688년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1695년에 우암(尤庵) 송시열을 추배하였다.

당초에는 현재의 위치에서 1.5km 떨어진 하임리 숲말로 연산천 저지대였는데 잦은 홍수로 서원 뜰까지 물이 차올라 1881(고종17) 2년에 걸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산앙루
산앙루

서원이 처음 자리잡은 숲말 산기슭의 큰 바위가 돼지 모양이어서 돈암(豚巖)이라 불렀는데 서원의 이름으로 사용하면서 돼지 돈()자에 받침을 붙여서 둔()자를 써서 돈암(遯巖)이라고 했다고 한다. 서원 입구에 돼지 모양의 돌이 있는데 이런 이유로 세워놓은 것이다.

하지만 둔()은 주역의 둔괘(遯卦)에 해당되며 하늘 아래에 산이 있음을 상징한다. 은둔을 뜻하는 괘로서, 군자(君子)가 그 지위에서 물러나 세상을 피해서 산다는 뜻이 있다. 주자(朱子)가 늘그막에 둔옹(遯翁)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는데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이 고향에 내려와 은둔하며 제자를 가르치던 삶이 주자와 같다는 뜻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원의 배치는 쉬는 공간인 산앙루(山仰樓)와 강학공간, 제향공간 그리고 서원을 지키고 보좌하는 사람들의 수직(守直)공간으로 구분되었다. 대부분의 서원 누각이 외삼문 역할을 담당하는 것과 달리 이곳은 휴식공간인 산앙루가 서원 외삼문 밖에 위치해 있다. 이는 산앙루가 2006년에 건립하여 서원 내부에 공간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두 개의 강당인 응도당과 양성당>

돼지모양의 조형물(서원 입구)
돼지모양의 조형물(서원 입구)

대부분의 서원은 제향공간인 사당과 강학 공간인 강당, 기숙사로 이어지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건립되었다. 그런데 돈암서원은 두 개의 강당이 있는데 가장 크고, 서원의 실질적인 강학공간으로 사용했던 응도당(凝道堂)이 서원 한쪽에 따로 건립되었다.

응도당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맞배지붕의 눈썹 처마를 가진 독특한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김장생의 사후에 그의 아들인 김집이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그런데 1881년 서원을 이전할 때 응도당의 규모가 크고 건축양식이 독특하여 옛터에 그대로 두었다가 1971년에 이곳으로 이전했다. 1881년 서원을 이전할 때는 김장생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양성당(養性堂)을 강당으로 삼았고 양성당을 좌우로 동재인 거경재와 서재인 정의재를 배치하였다. 이런 이유로 강당이 두 개가 된 것이다.

양성당 서쪽에는 경전의 판각을 보관하던 장판각(藏板閣)이 있고, 장판각 옆에 김장생의 부친인 황강(黃崗) 김계휘가 강학하던 정회당(靜會堂)이 위치해 있다.

양성당 (사계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양성당 (사계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김계휘는 1549(명종 4)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리에 임명된 후, 사관·부수찬·전직·이조좌랑을 역임했다. 1557(명종 12)에는 일시 파직당하자, 낙향하여 연산현의 벌곡 양산리에 정회당(靜會堂)을 설치하고 후학을 가르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1562(명종 17) 이조정랑으로 재등용되었고, 156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김계휘의 부인 평산 신씨는 율곡의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와 10촌 간으로 김계휘의 아들인 김장생이 율곡 이이를 스승으로 모신 것은 선대와 인연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계 김장생>

김장생의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며 시호는 문원(文元)으로 1548년 서울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그의 5대조는 좌의정을 지낸 광산부원군 김국광(1415~1480), 고조는 대사간을 역임한 김극뉴(1436~1496)이며 증조부는 진산군수를 지낸 김종윤, 조부는 지례(김천시)현감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대사헌을 역임한 김계휘로 김장생은 광산김씨 명문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기묘명현으로 호조판서를 지낸 신영(申瑛)의 딸로 신사임당과 10촌 간이다.

12세에 구봉 송익필(1534~1599)에게 사서(四書)를 배웠고, 19세에는 율곡 이이에게 수학하였으며 토정 이지함에게도 학문을 익혔다. 송익필은 서출(庶出)이라는 신분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못했으나 성리학과 예학에 밝은 인물로 서인(西人)의 숨은 실력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명재고택
명재고택

18세 때 창녕조씨와 혼인하여 33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이 그와 함께 문묘에 종사된 신독재 김집이다. 30세 때 이조판서 이후백의 천거로 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며 안성군수, 익산군수와 철원부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벼슬에 관심이 없었으며 생애 대부분을 예학(禮學)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였다.

1583년 상례비요(喪禮備要), 1599년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하였고, 1646년 엮은 의례문해(疑禮問解)는 변화하는 사회환경에서 발생하는 관혼상제에 대해 답변하였다.

1598년에 지은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1618년에 지은 경서변의(經書辨疑)는 성리학에 대한 책으로 그의 저술인 사계전집은 5424책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숭례사
숭례사

김장생은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았으나 1586년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2년 장남 김은과 며느리가 은성 박씨가 왜적에 피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613(광해군5) 65세에 서제(庶弟)인 김경손과 평손이 계축옥사에 연루되자 한양을 떠나 충남 연산(논산시 연산면)으로 낙향하였다. 이때 아들 김집과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과 예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한 계곡(谿谷) 장유, 이조판서를 역임한 월당(月塘) 강석기, 이조참의 초려(草廬) 이유태, 영의정을 지낸 지천(遲川) 최명길 등 걸출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83세에 별세하였는데 장유가 신도비명을 짓고, 송시열이 행장(行狀)을 송준길이 시장(諡狀)을 썻으며 1657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1687(숙종13) 왕명으로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17(숙종43)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숭례사에 배향된 인물들>

돈암서원 사당은 숭례사(崇禮祀)로 사계 김장생이 주향되었으며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 그리고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이 배향되었다. 돈암서원에 모신 김장생과 김집은 부자지간이며 송준길과 송시열은 13촌 숙질간이고 외가로는 6촌 간이다. 문묘에 모신 동방 18현 가운데 4현이 이곳에 모셔져 있으며 부자가 함께 문묘에 모신 사례는 김장생과 김집 뿐이다.

숭례사의 독특한 꽃무늬 담당
숭례사의 독특한 꽃무늬 담당

김집은 동부승지,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벼슬에 오래 머물지 않고 아버지 김장생의 예학을 이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이의 성리학과 송익필 그리고 아버지인 김장생의 예학을 이어받았으며 1883(고종 20)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의 제자인 명제 윤증과 송시열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된다.

우암 송시열은 서인의 우두머리로 꼽히는 인물로 16071230일 외가인 충북 옥천에서 출생하여 8세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공부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한 살 차이로 송준길이 한 살 많은 13촌 숙항(叔行)이 되지만 외가 쪽으로는 6촌 형이 되어 송준길을 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688년 송시열은 우의정을 송준길은 이조판서를 동시에 사직했으며 두 사람은 조정에서 오랫동안 함께 벼슬을 하였다.

파평윤씨 종학당
파평윤씨 종학당

인조 때부터 숙종까지 4대조를 섬긴 원로대신으로 주자(朱子)에 버금간다며 송자(宋子)라 불렀다. 그의 스승인 율곡 이이나 김장생도 들어보지 못한 칭호다. 하지만 송시열에 대한 평가는 서인과 남인에게서 극명하게 다르다. 서인들은 그를 송자라고 불렀지만 남인들은 그를 시열이라고 할 정도다. 1689719(숙종 15) 화순 능주에서 유배해 있던 송시열은 향년 83세를 일기로 정읍 태인에서 사약을 받고 타계하였고, 1744(영조 20)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었다.

동춘당 송준길은 1606(선조39) 서울 정릉동 외가에서 아버지 송이창과 어머니 광산김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율곡 이이에서 김장생, 김집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었다고 평가된다.

임진,정유양란으로 인한 민심을 추스르고, 도학적 실천과 내면의 공부에 전념하였다.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남인과도 적대적인 관계를 맺지 않은 원만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167266세로 타계하였으며 1681년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756(영조 32) 문묘에 제향되었다.

 

<사계 고택>

사계고택 영당
사계고택 영당

사계 김장생의 고택은 계룡시 두마면 사계로에 있으며 그가 55세인 1602년에 이곳에 은농재(隱農齋)를 짓고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이곳에서는 김장생의 여덟째 아들인 두계공 김규와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고 있다.

사계 고택에 영당은 김장생이 1631831일 이곳에서 84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출상하기 전까지 시신을 모셨던 곳이다. 당시 왕은 사후 150일 후에 사대부는 90일 후에 출상하는 제도가 있어서 김장생은 사후 78일만인 1019일 진잠 성북산(현재 대전 성북동)에 안장하였다가 1641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로 이장했다.

돈암서원에서 멀지 않은 논산시 노성면에는 명재 윤증의 고택이 남아있다. 명재 고택은 노성향교와 맞닿아 있으며 명재 윤증이 살던 집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양반집의 구조이며 연못과 나무가 조선시대의 정원을 잘 보여준다. 특히 이곳은 대대로 내려오는 간장과 된장 항아리가이 집의 전통을 알려준다. 작은 도서관인 노성서재와 다례, 천연염색 체험은 물론 고택체험 숙박도 운영하고 있다.

명재고택에서 4km 거리에 있는 종학당은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가 문중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백록당과 정수루, 정수암 등을 지었는데 이곳에서 수학하고 과거에 급제한 인물만 문과 42, 무과 31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돈암서원 입구에는 논산시가 조성한 논산한옥마을이 있어 숙박은 물론 여름에는 문화공연 등도 이루어지고 있다. 논산문화관광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한옥마을은 거의 숙박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고정리 종가마을
고정리 김장생 종가마을

연산면 고정리 광산김씨 종가마을은 사계 김장생의 묘소가 있으며 광산김씨 시조인 김국광의 사당과 김장생의 사당인 염수재, 광산김씨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모선재와 영사재 등이 있다.

사계종가에서는 전통차 등을 마실 수 있으며 제례주와 제례음식을 만들어보며 사라져가는 제례 문화를 일깨우는 계기를 만들고, 지역 특산품인 연산 대추를 활용한 대추고추장과 제례음식인 웃저지등을 만드는 체험 교육을 하고 있다.

한편 종가마을에서는 연간 45회에 걸쳐 초``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국민예절을 지키고자하는 만인소운동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만인소란 조선시대 상소문을 인용하여 우리의 예절을 우리가 지키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는 상소문에 직접 서약하고 수결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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