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6)
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6)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04.04 01:09
  • 호수 9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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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문화유산에서 미래를 찾다
무성서원 전경
무성서원 전경

6. 정읍 무성서원과 고운 최치원

 

<무성서원의 건립>

무성서원은 1615년 태인현 선비들이 태인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고운 최치원을 기리기 위해 태산서원으로 처음 건립하였고, 1630년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을 추배하였다. 1696년 숙종 22년에 무성(武城)이라는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되었다.

무성은 신라 때 이 지역의 고을 이름이지만 공자가 정치의 본령을 밝힌 일화로 널리 알려진 현가지성(弦歌之聲)과 우도할계(牛刀割鷄)의 연원이 되는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다스렸다는 고을 이름 무성에서 따왔다고 한다.

최치원은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가 신라로 돌아왔지만 6두품 출신이라는 한계로 외직을 자청했다고 하는데 태산군 외에도 부성군(충남 서산), 천령군(경남 함양)의 태수를 역임했다고 하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천령군에서 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축조한 상림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림으로 아직도 숲을 이루고 있다.

태산군 태수를 역임한 최치원이 태산을 떠나자 고을 사람들이 그의 선정에 보답하는 뜻으로 태산사라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살아있는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태산사가 훗날 무성서원의 근원이 되었다.

한편 무성서원에 봉안되어 왔던 최치원의 영정은 본래 지리산 쌍계사에 있던 것으로 영호남의 유생들이 문묘(文廟)에 있어야할 최치원의 초상화가 사찰에 있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1783(정조7)에 서원의 사우를 단청하고 중수하여 쌍계사에서 초상화를 이운했다고 한다.

최치원의 영정은 쌍계사에서 조성하여 불가 고승들의 영정과 같은 형식으로 등받이가 있는 높은 법좌 위에 가부좌한 자세와 신발을 올려놓은 답대가 있는 등 관복을 입었지만 승려의 자세가 특이한 형식이다.

무성서원의 최치원 영정은 한때 분실되었다가 국립박물관에서 발견되어 무성서원과 정읍시의 반환 노력으로 정읍시립박물관에 영구 임대되어 전시되고 있다.

 

<무성서원의 전각>

무성서원 강당
무성서원 강당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무성서원은 작은 하천을 건너 민가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입지여건이 옹색하고 규모가 작은 편이다. 서원의 외삼문 역할을 하는 현가루(絃歌樓)2층 누각으로 1891년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다. 현가(絃歌)는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것으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학문을 계속한다는 의미다.

현가루를 들어서면 강당이 있고 강당의 뒤에는 사당인 태산사가 있다. 1828(순조28)에 세워진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3칸은 청마루가 앞뒤로 트여 있고 좌우로는 한 칸씩의 방이 있으며 방은 학생들을 가르치던 스승이 사용하였다. 강당에 걸린 현판으로 1696년에 사액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강당에는 여러 시문(詩文)이 편액으로 걸려있어 무성서원의 연륜과 선조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사당인 태산사는 1484(성종 15)에 창건하고 1844년에 중수하였다. 사당을 세우고 131년 후에 서원을 건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수재
강수재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형태인 전학후묘(前學後廟)와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로 나뉘어 학생들의 기숙사가 배치되는 형식을 벗어나 있다. 또한 사당의 위치는 강당보다 높은 곳에 배치하는 것이 보통인데 사당과 강당이 평지에 배치되어 있다. 무성서원의 기숙사는 동재인 강수재(講修齋)만 있으며 강당 앞이 아닌 담장 밖 동쪽에 있어 작은 문을 통해 드나들 수가 있다. 이러한 무성서원의 전각 배치는 서원의 위치가 마을 안에 있어 서원의 터가 넓지 않아 부득이하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서원 서쪽 담장 너머에는 강당 재건에 힘쓴 현감 서호순의 불망비와 신용희의 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무성서원 입구인 현가루 옆에도 10여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대부분 역대 현감들과 서원을 지켜낸 인물들의 공적비다.

서원 동쪽에 강수재 앞에는 갑오창의기적비(甲午倡義紀蹟碑)가 세워져 있는데 1905년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6월 면암 최익현, 둔헌 임병찬의 주도로 무성서원에서 호남 최초로 의병이 일어난 역사적 현장을 기념하기 위해 1992년 건립했다.

 

<무성서원 주변에는 가볼 곳이 많다>

무성서원이 있는 칠보면 무성리에는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효시로 알려진 상춘곡(賞春曲)을 쓴 불우헌 정극인의 사당인 영모재(永慕齋)와 그의 묘소가 있다.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의 자는 가택(可宅)이고, 호는 불우헌(不憂軒)이다. 본관은 영광으로, 진사 곤()의 아들이다. 1451년 벼슬을 시작하여 1455년까지 종학박사와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고, 처가인 태인(泰仁)으로 내려와 초가집을 짓고, 불우헌이라 명명하고 자호로 삼았다. 1472년 영달을 구하지 않고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쳤으며 불우헌가(不憂軒歌)와 불우헌곡(不憂軒曲)을 지었다. 무성서원에 배향되었다.

감운정
감운정

무성서원 앞을 흐르는 동진강 상류천 건너에는 감운정(感雲亭)과 노소재(老少齋)가 있다. 감운정은 유상대(流觴臺)가 있던 곳으로 유상대는 최치원이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를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유상곡수는 흐르는 시냇물의 상류에서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이르는 동안 운()을 맞추어 시를 짓는 선비들의 풍류였다. 노소재는 선현들이 휴식을 취하던 곳이었는데 나중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으로 사용하였다가 현재는 경로당으로 이용하고 있다.

노소재
노소재

무성서원에서 동편길을 따라가면 남전마을이 나오고 마을 입구에 고현동각(古縣洞閣)이 있다. 고현이란 옛 현이라는 말로 1409년 태산군과 인의현이 합병되어 태인현이 되었는데 옛 현이 있던 곳이라는 뜻으로 지금은 칠보면이 되었다. 고현동각은 불우헌 정극인이 이 마을에 살면서 향약을 실시하고 그 자료를 보관하던 곳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보물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낡고 허름하였고, 주변 정비도 되지 않았다. 동각은 1893년에 중수하였으며 입구에 세워진 비문에서 이곳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이 마을은 여산 송씨의 집성촌으로 비운의 임금 단종의 왕비였던 정순왕후(1440~1521)여흥 민씨가 태어난 곳이다. 마을에 정순왕후 탄생비가 남아있다.

 

<비운의 천재 고운 최치원>

현가루
현가루

무성서원에 주벽으로 모신 최치원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이며 857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6두품 출신으로 12(868)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하여 당에서 벼슬을 시작하였다. 22세 때인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가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29세 신라에 들어와 벼슬을 하였으며 894년 진성여왕에게 기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려 문란한 정치를 바로 잡고자 하였으나 골품제에 의한 왕실정치에 좌절하여 40여 세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동방유학의 비조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유학은 물론 불교와, 노장사상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동문선에 그의 시문 140여 편이 수록되어 있으나 그가 남긴 작품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것으로 짐작된다. 헌강왕에게 올린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전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개인 시문집으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그의 시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추야우중(秋夜雨中)에는 가을바람에는 괴로운 시 뿐이던가, 세상에는 알아주는 벗 드물구나, 창밖에는 한밤중 비 내리는데 등불 앞에 내 마음 아득하여라며 고독한 자신의 처지를 읊었다.

친형이 해인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그도 전국의 사찰을 찾아 유랑하였는데, 지리산 쌍계사. 청량산 청량사 등에 오래 머물렀고, 의성 고운사(孤雲寺)에서는 가운루(駕運樓)를 지었다고 전하며 그의 호를 따서 절 이름을 고운사로 정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형이 출가한 해인사로 들어가 생을 마감하였다.

이승휴가 쓴 고려후기 역사서인 제왕운기에 신라의 인물 5명을 기술하였는데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김유신과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 그리고 최치원을 거론하였다.

김명광 고택
김명광 고택

<피향정과 김명관 고택>

피향정
피향정

무성서원에서 동진강을 따라 산외면사무소로 가는 길(3km)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김명관 고택이 있다. 아흔아홉 칸 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전형적인 조선의 상류층 가옥이다. 김명관이 10년에 걸쳐 1784년 완공했다고 하며 안채, 중문간채, 문간채, 별당, 사당, 안사랑채와 담장으로 구분된 별도의 사랑채가 있다. 김명관은 광산김씨 흥광의 30대손으로 명당을 찾아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하며 대문채 정면에 12칸의 하인들의 방이 있고, 안채와 사랑채에도 하인들의 방이 있어 그 규모와 함께 식솔들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김명관 고택 가까운 곳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고택이 있다.

김명관 고택에서 10km 거리 태인면 소재지에는 호남 제일의 정자로 알려졌으며 보물로 지정된 피향정(披香亭)이 있다. 피향정은 최치원이 태산군 태수로 재임할 때 지었다고 전하며 정자 앞에는 상련지와 하련지의 연꽃 못이 있어 연꽃의 향기가 정자에 가득 퍼진다고 하여 피향정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제 때 상련지는 매몰되어 현재는 하련지만 남아있다. 1617년 현감 이지굉에 의해 중수되고, 1661년 현감 박숭고가 중건하였으며 1716년 현감 유근이 현재의 규모로 중건하고 1882년에 다시 고쳤다고 한다.

 

<호남 선비문화의 정체성을 찾아>

고현향각 동각
고현향각 동각

정읍시는 무성서원 입구에 호남 선비문화의 정체성을 이어가기 위한 무성서원 문화 수련원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한다. 무성서원 입구에는 태산선비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2013년 농촌체험휴양마을, 2014년 농촌인성학교로 지정된 선비마을은 코로나19 학산 이후 행사가 거의 중단된 상태다. 전통예절, 다례(茶禮), 고사성어 탁본, 무성서원 답사와 천연염색, 목공, 한지 공예 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구성되었다. ‘무성서원 문화 수련원과 어떤 차별성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칠보에는 고운 최치원, 불우헌 정극인 등 우리나라 문학에 기라성같은 인물들의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정읍시가 칠보에 무성서원 문화 수련원을 건립하여 인성 수련의 메카로 자리 잡게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영주의 한국선비문화수련원과 안동의 유교랜드를 사례로 들었다. 하지만 두 곳은 수련원이 수백 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였으나 당초의 목적에 매우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태산 선비마을의 운영사례로 보았을 때 가장 시급한 일은 문화수련원을 운영할 수 있는 젊은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일이다. ‘한국선비문화수련원2008년 성균관에 운영을 위탁한 뒤 2014년 주)선비애선비촌으로 운영을 위탁하였고, 2017년에는 주)예문관 선비촌으로 위탁운영을 변경하였다. 수련원을 운영할 수 있는 인재도 없이 건물만 짓고 보자는 식의 사업추진은 재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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