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을 소환하며
우장춘을 소환하며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03.20 10:31
  • 호수 9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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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1857년에 태어나 조선훈련대 2대장을 맡고 있었으나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에 가담하여 일본으로 도망쳤다. 당시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명성황후와 정치적인 대적관계에 있던 대원군은 이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명성황후는 미군이 지휘하는 시위대를 설치하여 궁궐의 수비를 맡게 하였고, 대원군과 일본 장교의 지도를 받고 있던 훈련대는 명성황후의 압력으로 훈련대가 해산될 운명에 처해지게 되었다. 훈련대 2대장이던 우범선은 이에 반발하여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하게 되었다. 1985108일 일본군 수비대와 훈련대는 시위대를 격파하고, 경복궁에 난입하였고, 일본의 닌자들이 고종을 협박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개한 조선의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고, 러시아와 미국 등이 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자 일본은 미우라 고로 공사와 닌자, 경관, 군인 등 48명을 일본으로 소환한 뒤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였다. 하지만 18961월 일본 정부는 이들 모두에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하였고, 일본의 여론은 이들을 애국인사라고 칭송하였다.

의병이 봉기하자 두려움을 느낀 우범선은 일본으로 도망쳐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 열다섯 살 적은 사카이 나카와 결혼하였다. 우범선과 사카이 나카 사이에 태어난 첫째 아들이 바로 우장춘이다. 하지만 우범선은 일본으로 도망쳐 신분을 속이고 살면서도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매국노로 낙인 찍혀 주살의 표적이 되었고, 19031124일 고영근의 칼에 목이 찔리고, 노윤명의 망치에 머리를 맞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고영근은 일본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09년 귀국하여 명성황후의 무덤을 지키는 참봉으로 생을 마쳤다.

우범선이 죽었을 때 우장춘의 나이는 고작 여섯 살이었다. 그는 조센진(조선인)이라는 멸시와 따돌림을 받으며 한때 희운사라는 절에 맡겨져 자랐다. 그 절에서 날마다 감자로 끼니를 때운 우장춘은 그의 딸에게 내가 음식을 가리지 않지만 감자만큼은 절대 싫어하는 이유는 그때 평생 먹을 감자를 먹고도 남았기 때문이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우장춘의 생모는 다시 그를 데리고 가 히로시마 현립중학교와 동경제국대학 농학과를 졸업하게 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우장춘은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들어가 연구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36년 우장춘은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얻었고, 그의 이론을 실용화하여 수많은 종자를 개량하였고, 그가 몸담고 있던 다카이 종묘회사는 세계적인 종묘회사가 되었다.

그런데 우장춘의 아버지는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으로 도망쳤지만 그의 성씨를 버리지 않게 하였고, 우장춘은 국제학회에 제출하는 논문에 항상 ‘NAGAHARU U(長春 禹)’라는 이름을 썼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다카이 종묘사를 퇴직한 그는 연구와 실험에 전념하였다.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은 피폐한 농촌을 부흥시켜 식량부족을 해결해야 했고, 비싼 일본의 종자를 제3국이나 밀수를 통해 비싸게 수입했다.

대한민국은 우장춘이 절실히 필요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그에게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우장춘은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들어오기로 결심하였고, 195038일 부산항을 통해 입국하였다. 우장춘은 귀국하자 농업과학연구소장에 취임하였고, 한국농업과학협회를 창립하였다. 그는 유채를 비롯해 한국의 기후에 맞는 배추, , 신품종 벼의 종자 등을 생산하였다. 하지만 1959810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운명하기 4일 전 도착한 [대한민국문화포상]을 안은 그의 마지막 말은 고맙습니다. 조국은 마침내 알아주었다고 였다. 조국을 배신하였다고 비난받던 아버지와 조센진이라는 멸시를 받고 자랐던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종자 연구가가 되어 조국에 식량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그의 거룩한 생애에 마지막 말은 조국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우장춘이 가족을 두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죄에 대한 참회였고, 그의 피나는 연구와 노력은 아버지의 죗값에 대한 보상이었는지 모른다. 참회는 이렇듯 절실해야 하고, 그 절실함은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다. 절심함은커녕 형식적인 참회도 없는 일본 앞에 한국인의 자존심과 국익도 다 버리는 윤석열 대통령은 과연 어느 나라 대통령인가? 우장춘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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