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5)
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5)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03.06 16:27
  • 호수 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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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문화유산에서 미래를 찾다
남계서원 명성당
남계서원 명성당

5. 함양 남계서원

남계(濫溪)서원은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으며 1552(명종 7)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고, 창건 14년 뒤인 1566(명종 21)에 남계라는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남계는 서원 앞에 흐르는 시내 이름으로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에 탄 뒤 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로 터를 옮겼다가 1612년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다시 중건되었다. 남계서원은 세계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 가운데 영주시 소수서원(1543)에 이어 두 번째(1552)로 건립된 서원이다.

남계서원 사당
남계서원 사당

남계서원은 구릉을 등진 지형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원 앞으로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천이 흐르고 남계천 건너 넓은 들판 너머에는 안산(案山)인 백암산을 마주 보고 있다.

남계서원이 있는 함양군은 예로부터 좌안동’ ‘우함양이라 할 정도로 낙동강 왼쪽인 안동과 오른쪽인 함양에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였으니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안동의 퇴계 이황과 함양의 일두 정여창이다.

풍영루
풍영루

남계서원은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건물배치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과 달리 경사지에 건립하여 제향 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뒤쪽에 자리 잡고, 강학 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앞쪽에 자리 잡은 조선의 서원 건축의 초기 배치형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서원이다.

정문인 풍영루(風詠樓)를 지나면 좌우에 다른 서원에서 볼 수 없는 연지(蓮池)가 조성되어 있으며 유생들의 유식(遊息)공간인 애련헌(愛蓮軒)과 영매헌(咏梅軒)이 누마루로 조성되어 있다.

정여창은 중국의 성리학자인 주돈이(周敦頤)[애련설(愛蓮說)]에 영향을 받아 연꽃과 매화를 사랑했다고 하는데 서원에서 보기 드문 연지(蓮池)와 연지 주변에 매화를 심은 것은 이런 연유로 보인다.

양정재와 애련헌
양정재와 애련헌

강학 공간인 명성당(明誠堂)1559년에 완성되었으며 4칸 건물의 중앙 2칸은 마루로 양쪽 1칸은 방으로 구성되었다. 명성(明誠)은 중용의 밝으면 성실하다(明則誠)’에서 취한 것으로 성리학에서 수기(修己)를 강조하는 이념 세계를 건축에 반영한 것이다.

강당 앞 좌우에는 동재인 양정재(養正齋)와 서재인 보인재(輔仁齋)가 있다. 양정재와 보인재는 유생들이 기숙과 개인학습을 하던 곳으로 우리나라 서원 최초로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배치되었으며 동재에 애련헌(愛蓮軒)과 서재에 영매헌(咏梅軒)이 연결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건물로 사당에 이름을 명명하지 않았다. 정여창을 주벽으로 왼쪽에는 정온(鄭蘊, 1569~1641)과 강익(姜翼, 1523~1567)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동계(桐溪) 정온은 거창군에서 출생하였으며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고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개암(介庵) 강익은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66년 영남유생 33인의 소두(疏頭)가 되어 정여창(鄭汝昌)의 신원(伸冤)을 청하였다,

일두 정여창 고택

<일두 정여창>

정여창(1450~1504)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이며 선비의 표본으로 동방 5현 중에 한 분이다.

자는 백욱(伯勗), 자욱(自勗)이고, 호는 일두(一蠹)이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본관은 하동으로, 아버지 정육을(鄭六乙)과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인 어머니 경주(慶州) 최씨 사이에 태어났다. 위로 형 정여유(鄭汝裕)가 있었고, 아래로 동생 정여관(鄭汝寬)이 있다. 이시애의 난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 판관에 임명되었으나 고사하고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과 함께 학문을 수학하였다. 1480(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른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 동료들이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한 뒤 가족과 함께 하동의 악양동에 들어가 섬진강 나루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학문에 힘썼다. 1490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 설서가 되어 정도(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가르쳤으나 동궁이 강직한 성품의 정여창을 좋아하지 않았다.

1494(성종 25)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고통이 부역과 납세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현감의 업무를 돌보는 틈틈이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내외청(內外廳)을 두어 돈이 없어 혼인하지 못하는 이들을 진휼하여 때를 놓치지 않도록 배려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있으면서 김일손(金馹孫, 1464~1498)과의 편지왕래와 관련하여 종성(鍾城, 함경북도)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 죽었다. 유배지에서도 청년들과 학동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며 변방 지역에도 학문과 문물을 전파하였다.

오담고택
오담고택

정여창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추앙하던 유생들과 제자들이 함경도 종성에서 경상남도 함양으로 2개월에 걸쳐 시신을 운구하여 함양군 수동면 승안동(昇安洞)에 묻었다. 갑자사화(1504) 때 부관참시되었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 즉위 후 명예가 회복되어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과 같이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으로 숭상되었다.

1517(중종12) 증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고, 1568(선조1) 문헌공(文獻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1610(광해2) 정몽주,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와 더불어 동방 5현으로 문묘에 승무(陞廡)되었다.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정여창의 고택>

함양 지곡면 개평마을은 일두 정여창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현재의 일두고택은 정여창이 살았던 곳에 후손들이 다시 지은 집으로 조선시대 양반집을 대표하는 구조이다. 넓은 부지에 사랑채, 안사랑채, 안채, 아래채, 광채, 사당 등을 고루 갖추고 있으며 안채는 약 300년 전에 다시 지었으며, 사랑채는 구한말에 지은 건물이다. ’자형으로 폐쇄적이며 좁은 경북지역의 한옥과는 달리 ‘-’자형으로 넓은 마당을 쓰고 있는 남부지방 대저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공으로 꾸며놓은 정원이 인상적인 넓은 마당과 높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자형으로 누마루를 갖추고 있는 사랑채는 대저택의 위엄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다. 개평마을은 안동과 함께 많은 선비들을 배출한 함양의 대표적인 양반들이 살던 곳이다. 개평마을은 하동정씨, 풍천노씨와 초계정씨가 터를 잡고 살아오고 있다. 함양에는 일두 정여창을 비롯하여 덕곡 조승숙(趙承肅), 일로당 양관(梁灌), 뇌계 유호인(俞好仁), 옥계 노진(盧禛)을 비롯해 연암 박지원(朴趾源) 등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다.

개평(介坪)이란 말은 두 개의 하천 사이에 있다는 뜻으로 이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일두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오담고택을 비롯하여 많은 전통 한옥들이 남아 있다. 마을 특산물로 정여창 종가에서 손님을 접대했던 지리산 솔송주(송순주, 松筍酒)가 있다.

특히 개평마을은 2018tvn에서 방연된 미스터션샤인을 촬영한 곳으로 이 드라마는 1900년대 대한제국 시대 의병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이병헌과 김태리가 주인공으로 나와 큰 인기를 얻었다.

 

<하동 악양정과 청계서원>

하동 악양정
하동 악양정

악양정(岳陽亭)은 하동군 화계면 덕은리에 위치해 있다. 정여창의 본관은 하동으로 1486년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한 뒤 가족을 이끌고, 이곳 하동의 악양동에 들어가 섬진강 나루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학문에 힘썼다.

일두(一蠹)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자신을 한 마리 좀 벌레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낮추고, 학문과 실천에 힘쓰면 벼슬을 탐하지 않았다. 일두라는 호는 성리학의 태두인 정이천(程伊川, 1033~1107)천지간에 한 마리 좀에 불과하다는 시에서 인용한 것이다.

악양정은 정여창이 18년 동안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벗들과 교유하며 지내던 곳으로 그가 함경북도 종성에서 유배되어 죽고, 400여 년 동안 폐허가 되었다. 19013칸 건물로 정각을 지었고, 1920년 다시 4칸으로 중수하였다. 1994년에 정면 4칸의 정각 등이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청계서원
청계서원

사당인 덕은사(德隱祠)에는 주벽에 일두 정여창과 주희(朱熹),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탁영 김일손(金馹孫), 돈재 정여해(鄭汝諧) 5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남계서원 왼쪽에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청계(淸溪)서원이 있다. 두 개의 서원이 나란히 건립된 것은 몹시 보기 드문 사례다. 청계서원은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김일손은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청계서원이 있던 곳은 김일손이 1495년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1905년 유림이 그 터에 유허비를 새우고 1915년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한 뒤 청계서원이라고 하였다.

김일손은 148623세 때 문과 2등으로 급제하여 [성종실록]을 쓴 사관(史官)으로 무오사화 때 35세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김일손이 처형을 당할 때 냇물이 별안간 붉은 빛으로 변해 3일간 흘렀다고 해서 자계(紫溪- 붉은 시냇물)’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그를 배향한 사당도 자계사(紫溪祠)가 되었다. 경북 청도군 이서면에 위치한 자계사는 사림정치가 본격적으로 구현된 선조 대에 자계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661(현종 2) ‘자계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남계서원 풍영루 미디어센터

<남계서원의 현대화 사업>

지난해 930일부터 1030일까지 한 달 동안 남계서원에서 세계유산 미디어아트가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문화재청과 경상남도, 함양군이 주최한 미디어아트는 빛의 노래, 서원을 밝히다.’를 주제로 함양 남계서원 일원에서 한 달간 매일 진행됐다.

남계서원 풍영루에선 매일 2차례 메인 미디어아트 공연이 펼쳐졌다. 보조 콘텐츠로 서원 내부를 활용한 미디어 연출, 서원 교육 가치 전달을 위한 인터랙티브 안내 책자 등 실감형 컨텐츠와 더불어 남계서원 명품둘레 길에는 다양한 조명과 음악, 영상을 관람객들이 체험했다.

박완주 경남지사는 수동면 원평리 일대에 180억 원의 사업비로 오는 2025년까지 남계서원 한옥호텔을 건립하여 남계서원의 관광활성화와 세계유산 미디어아트의 정례화 등을 정례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남계서원을 현대에 기술을 더해 빛으로 꾸미고, 젊은이가 찾게 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경상남도와 함양군의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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