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4) 과거의 유산에서 미래의 가치를 발견하다
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4) 과거의 유산에서 미래의 가치를 발견하다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02.28 00:20
  • 호수 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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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달성 도동서원과 한훤당 김굉필
도동서원 강당

<유림의 고장 달성>

달성군은 대구광역시에 속한 기초자치단체로 6개 읍과 3개 면에 인구가 26만여 명에 달하는 도농 복합도시다. 달성군의 대표적인 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을 주향으로 모신 도동서원으로 1568년 비슬산 동쪽에 쌍계(雙溪)서원이라고 하였고, 1573에 사액(賜額)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김굉필의 외손자이지 예학자인 한강 정구와 퇴계 이황이 주도하여 1605년 다시 건립하여 보로동(甫勞洞)서원이라고 하였으며 1607년 선조가 친필로 도동(道東)서원이라는 편액을 써서 사액하였다. ‘도동이란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이다.

도동서원 현판
도동서원 현판

도동서원은 1541년에 설립한 소수서원에 이어 1568년에 설립하였으며 1572년에 설립한 옥산서원, 1574년에 설립한 도산서원, 1613년에 설립한 병산서원보다 앞섰다. 도동서원은 소수서원과 도산서원, 병산서원 그리고 옥산서원과 함께 영남 5대 서원으로 꼽힌다. 한편 장성 필암서원은 1590년에 설립되었다.

달성군은 도동서원 외에도 이강(伊江)서원과 인흥(仁興)서원, 용호(龍湖)서원, 녹동(鹿洞)서원, 송담(松潭)서원, 화산(花山)서원, 낙빈(洛濱)서원 등 모두 8개의 서원이 있는 곳으로 그야말로 유림의 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특히 인흥서원은 추황(秋篁, 1198~1259)과 추적(秋適, 1246~?) 등을 배향한 곳으로 추황은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호는 회암(悔庵),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추적은 고려 충렬왕 때의 인물로 자는 관중(慣中), 호는 노당(露堂)으로 추황의 아들이다. 우리나라에 보급된 명심보감은 대부분 추적이 편찬한 추적본이다.

추적은 안향(安珦)에 의해 발탁되어 7품 이하의 관리 또는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명심보감]을 편찬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인흥서원기에 따르면 인흥서원이 위치한 인흥동은 추적의 장지(무덤)였으나 실전되어 오다가 552년이 지난 1853년 후손들이 비로소 묘소를 발견하고 묘역을 보수하였으며 1886년 유림이 모여 묘 아래에 사당을 건립하고 추황 등을 배향했다.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따라 사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훼철되었고, 1938년에 다시 세워졌다.

녹동서원은 모하당(慕夏堂) 김충선(1571~1642)을 추모하기 위해 1794년에 건립되었다. 김충선 본래 일본인으로 성은 사()이고 이름은 야가(也可)이다. 임진왜란 때 귀화하여 공을 세워 선조임금이 김해김씨로 성을 내리고 충선(忠善)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1871년 훼철되었다가 1914년 다시 중건하였다. 녹동서원 왼쪽에는 충절관이 있고, 오른쪽에는 한일 우호관이 있는 특이한 서원이다.

 

<도동서원>

한강 정구가 심은 것으로 전하는 은행나무
한강 정구가 심은 것으로 전하는 은행나무

도동서원은 북쪽으로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가파른 경사지에 자리하고 있다. 도동서원은 대니산 서북쪽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데 대니산은 공자가 살던 곳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9개 서원 가운데 가장 급경사를 이룬 곳에 서원이 들어서 있고, 입구에는 김굉필의 외손자이지 예학자인 한강 정구가 심었다고 전하는 400여년 된 은행나무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도동서원의 강당과 사당 그리고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었으며 정문 역할을 하는 수월루(水月樓)찬 강물을 비추는 밝은 달(寒水照月)”이라는 주자의 시구에서 따왔다. 서원의 첫 관문인 환주문(喚主門)은 갓을 쓴 선비가 양팔 소매를 드리운듯한 모습이며 환주문은 마음의 주인을 부르는 문이란 뜻이다.

도동서원의 편액은 두 개로 강당 앞 처마 밑은 퇴계 이황의 글씨를 집자하였고, 중정당 위의 것은 배대유(1563~1632)의 글씨로 알려졌다. 도동서원 오른쪽 산비탈을 오르면 관수정(觀水亭)이 있는데 낙동강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와 함께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사우당(四友堂) 김대진(金大振)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경상 감사 이민구와 지역 사림이 1624(인조 2)에 건립하였고, 1721(경종 1)에 화재로 불에 탄 것을 1866(고종 3)에 김대진의 후손인 김규한이 다시 건립하였다.

한편 소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을 따라 영주 소수서원과 안동 도산서원 그리고 병산서원 앞을 지나 달성 도동서원까지 영남의 5대 서원 가운데 4개 서원이 낙동강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관수정
관수정

<한훤당 김굉필>

김굉필의 본관은 서흥(瑞興)이고, 1454년 아버지 김뉴(金紐)와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 서울 정릉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황해도 북부 서흥에 살았는데 그의 조부인 김소형이 개국공신 조반(趙胖)의 사위가 되면서 한성에도 연고를 갖게 되었다. 19세에 박예손의 딸과 혼인하여 아내의 친정인 경상도 합천에서 기거하며 영남의 사림(士林)과 교류하며 학문을 닦았다.

이때 영남학파의 종조라 불리며 조선초 성리학을 이룬 대학자로 평가되는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小學)]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불렀고, 평생 동안 소학을 돈독히 여겨 모든 행실의 기본을 소학의 가르침에 의지했다.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굉필을 비롯해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등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김굉필은 27세 되던 1480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494년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을 시작하여 사헌부 감찰과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 80대와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희천에 유배해 있을 때 정암(靜庵) 조광조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의 계보를 잇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봉 기대승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정맥은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 조광조의 계보를 이루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였다.

굉김필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유배지에서 참형을 받았다. 유배지인 순천으로 사형 명령이 내려지자 김굉필은 목욕하고 관대(冠帶)를 갖춘 후 형장에 나갔는데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어 입에 물고 칼날을 받았다. ‘몸과 터럭과 피부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할 수 없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는 효경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김굉필은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 연산군 때에 화를 입은 인물들의 신원(伸冤)이 이루어지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들은 관직에 등용되었다.

 

<동방(東方) 사현(四賢)이라 부르다>

김굉필은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과 함께 동방사현이라 불린다. 그는 김종직의 제자였지만 김종직이 현실 타협적인 면을 보인다고 비판하여 사이가 나빠졌으며 김종직이 죽었을 때도 조문조차 하지 않았다. 불의를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했던 그의 대쪽같이 곧고 강직한 성격은 스승 김종직이라고 사정을 봐주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스승 김종직과 맺은 사제의 인연은 김굉필이 끊고 싶다고 해서 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무오사화 때 희천으로 유배되었고, 두 번 째 유배지 순천에서 참형을 당했지만 결국 김종직의 학통을 잇는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학생들이 거처하던 거인재
학생들이 거처하던 거인재

김굉필은 한때 자신의 호를 사옹(蓑翁)’이라고 하였는데 ()’는 짚이나 띠로 엮어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비옷인 도롱이를 뜻한다. 따라서 사옹(蓑翁)’이란 도롱이를 걸쳐 두른 늙은이를 말한다. 그런데 도롱이는 아무리 단단하고 완벽하게 몸을 감싼다고 할지라도 애초 짚이나 띠 풀을 엮어 만든 비옷이기 때문에 비가 많이 내리면 몸이 젖을 수밖에 없다. 김굉필은 이러한 도롱이에 빗대어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을 비록 큰비를 만나서 겉은 젖을망정 속은 젖지 않겠다(雖逢大雨 外濕而內不濡).”고 하였다.

사옹(蓑翁)’에 담긴 뜻처럼 김굉필은 겉(육신)은 연산군과 훈구파에 빼앗겼지만 속(정신)만은 온전히 보존했다. 죽음을 맞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나 절의를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굉필은 사옹(蓑翁)’이라는 호 보다 한훤당(寒暄堂)이라는 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추울 한()’따뜻할 훤()’한훤(寒暄)’은 계절의 순환과 같은 자연의 변화와 조화를 상징하는 성리학적 우주관을 담고 있다. 김굉필은 처갓집인 합천의 한적한 곳 작은 바위 아래에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한훤당(寒暄堂)’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의 문하에서 조광조, 김안국(金安國) 등이 배출되었다. 김안국의 제자는 하서 김인후이고 김인후의 문인이 정철로 이어져 성혼, 이이와 함께 서인 학파를 형성하였다. 김굉필은 1610(광해군 2)에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 5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는 도동서원 외에도 아산의 인산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회천의 상현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그가 마지막 유배를 했던 순천의 옥천서원에도 배향되어 있다.

서원스테이 등으로 활용할 역사문화 공간
서원스테이 등으로 활용할 역사문화 공간

<도동서원 서원 스테이>

도동서원 오른쪽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대구시가 지원한 낙동강 수변 역사누림길 조성공사가 진행 중이다. 총 공사비 70(문체부 70%, 대구시 30%)원의 예산이 소요되는 이 사업은 오는 4월 말 준공하게 되며 10동의 목조 건물은 서원스테이, 전시관, 카페 등 편의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달성군은 이 사업을 위해 10여 가구의 민가를 철거하고, 철거비와 주거 이주비 등을 부담하였다. 사업 주체인 대구시는 도동서원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역사문화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 성인은 물론 청소년들의 접근성을 높이는 다양한 콘텐츠를 입힐 계획이라고 밝혔다.

달성군 문화관광과 담당자는 도동서원은 대니산 자락에 자리하였고, 낙동강의 물줄기를 따라 산책도 겸할 수 있는 곳으로 힐링과 휴식 공간으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눈으로 보기만 하는 문화자원이 아니라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어떤 성과를 거둘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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