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3)
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3)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02.21 22:40
  • 호수 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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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유산에서 미래의 가치를 발견하다
병산서원
병산서원

3. 병산서원과 서애 류성룡

<병산서원의 설립>

병산서원은 1613년 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성리학 교육 시설이다. 류성룡은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현재의 병산서원 위치로 옮기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풍악서당(豊岳書堂) 고려말부터 풍산현 풍산류씨의 사학(私學)으로 200여년 동안 유지되었으며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피난하는 길에 서당을 지나며 유생들이 난리 중에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격려했다고 전한다.

병산서원 만대루
병산서원 만대루

류성룡이 부친상을 당해 하회 마을에 머물며 삼년상을 할 때 유생들이 찾아와 서당 주변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겨 서당을 어디로 옮길 것인지 묻자 류성룡이 현재의 병산서원을 권하여 유생들이 그의 뜻을 따라 서당을 옮겼다고 한다.

류성룡의 사후에 문인(門人)들과 지역 유림이 풍악서당 안에 그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尊德祠)를 세우면서 서원이 되었다. 존덕사를 세운 4년 뒤 서원 정면에 병풍 모양의 산 이름을 따서 병산(屛山)서원으로 바꾸었고, 1863(철종14)에 왕이 병산서원이라는 이름을 새긴 현판을 내려 주어 사액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은 제향 공간인 존덕사(尊德祠), 신문, 전사청이 있고, 강학 공간에는 입교당(立敎堂), 동재, 서재가 있으며 부속 건물로 장판각(藏板閣), 만대루(晩對樓), 복례문(復禮門), 주사(廚舍, 부엌) 등이 있다. 만대루는 당나라 두보의 시 가운데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은 해 질 녘에 마주 대할만하고(翠屛宜晩對)’에서 따 온 것이다.

1662년 류성룡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1582~1635)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류진은 1623년 봉화현감으로 있으면서 세금의 질서를 바로 잡았고, 1634년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수암은 류성룡의 아들이며 제자로 많은 유생들의 모범을 보인 선비였다.

 

<류성룡의 생애>

류성룡의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1542(중종37) 의성현 사촌리 외가에서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의성 만취당
의성 만취당

1564(명종19)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26세가 되던 1566(명종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9(선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157938세에 직제학이 되었고, 158847세에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 양관 대제학이 되었다. 159049세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에 봉해졌고 이듬해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1591년 류성룡은 종6품에 불과했던 정읍 현감 이순신(李舜臣)을 진도군수로 임명하였다가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정 3품에 해당하는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임명하였다.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한 이순신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류성룡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나 나라를 그르쳤다는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왕이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체찰사가 되었다.

1598년 명나라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무고하였는데 이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려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1600년에 복권되었으나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으며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605(선조38) 낙동강 대홍수로 하회에 있던 살림집이 무너지자 부용대에 있던 옥연정사에 머물며 임진난을 회고하며 징비록(懲毖錄,국보 132)을 저술하였다. 징비(懲毖)지난날을 경계하고() 뒷날의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는 뜻이다.

 

하회마을 충효당
하회마을 충효당

<옥연정사와 징비록>

옥연정사(玉淵精舍)는 하회마을에서 배를 타고 가야하는 부용대 쪽 절벽에 있다. 1576년 서애(西厓)35세 때 짓기 시작하여 10년만인 1586년에 완공되었는데 집을 완공한 뒤 6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서애가 청렴하고, 가난하여 집 지을 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탄홍(誕弘)스님이 그 뜻을 알고 건축과 재력을 부담하겠다고 자원하여 옥연정사가 완공되었다.

옥연정사는 서애(西厓, 서쪽 벼랑)의 호를 상징하는 곳으로 세속의 번잡함을 벗어나 스스로 외로운 고라니의 삶을 살아가길 원했던 그의 바람에 맞는 외딴곳 절벽에 있다. 서당으로 사용하던 세심재(洗心齋)와 원락재(遠樂齋)가 있는데 원락이란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원락재 마루는 애오헌(愛吾軒)이라 편액하였는데 도연명의 시 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吾亦愛吾廬)’는 시구에서 떠온 것이다. 원락재는 서애가 징비록을 서술한 곳으로 임진왜란과 당쟁으로 인한 탄핵 등을 겪으며 마음의 수양과 제자들을 가르쳤던 의미있는 곳이다.

옥연서당기에 중년에 망령되게 벼슬길에 나아가 명예와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를 20년이 되었다. 발을 들고 손을 노릴 때마다 부딪칠 뿐이었으니(중략) 고라니의 성품은 산야에 알맞지 성시(城市)에 맞는 동물이 아니다며 스스로를 고라니라고 부르고, 권력싸움에서 시달림을 당한 선비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화천서원과 겸암정사>

옥연정사에서 도보로 5분여 거리에 화천서원이 있다. 화천서원은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의 학덕을 기리고자 세운 서원이다. 류운룡은 류성룡보다 3년 먼저인 1539년에 태어나 1601년 향년 63에 세상을 떠났으며 1786(정조10)에 서원이 건립되었다.

겸암정사
겸암정사

류운룡은 퇴계 이황의 7대 제자 중 한 명으로 15세에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으며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첫째 아들이다.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도둑 떼를 소탕하였고 관직은 원주 목사에 이르렀다. 원주목사 재직 당시가 임진왜란 기간 중이었는데 선조 임금에게 군국편의소(軍國便宜疏)라는 상소문을 올린 적도 있었다. 사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화천서원은 1871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강당과 주사(廚舍,밥 짓는 곳)만 남기고 훼철되었다. 1966년부터 후손들과 안동 유림에서 기금을 모아 1996년 다시 세웠다. 사당인 경덕사(景德祠)와 강당인 숭교당(崇敎堂) 그리고 기숙사인 동재는 존현재(尊賢齋), 서재는 흥학재(興學齋)라고 이름 붙였으며 문루인 지산루(地山樓)와 유도문(由道門) 등이 있다.

겸암정사는 부용대 서편에 있으며 류운룡의 호를 따서 지은 집으로 그가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스승인 퇴계가 주역의 겸괘(謙卦)를 상징하여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는 스스로 자기 몸을 낮춘다는 뜻이 담긴 겸암정(謙菴亭)이라는 현판을 써주며 그대가 새집을 지었다는데 가서 같이 앉고 싶지만 그러하지 못해 아쉽네라는 편지를 보내 주기도 했다. 류운룡은 그 이름을 귀하게 여겨 자신의 호로 삼았다.

 

입암고택 양진당
입암고택 양진당

<풍산류씨 종택, 충효당과 양진당>

하회마을은 북촌과 남촌으로 나눈다. 양진당(養眞堂)은 북촌을 대표하는 집으로 풍산류씨 대종택이며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가 연속되어 있으며 사당만이 따로 독립되었다. 서애 류성룡과 겸암 류운룡의 부친인 입암 류중영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고도 한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우뚝 솟은 솟을대문과 장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풍산류씨의 대종가이다.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 류종혜(柳從惠)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 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 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였고,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正南向)의 집이며 현재 53칸이 남아 있다.

화천사원 지산루
화천사원 지산루

충효당은 양진당에서 건너다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류성룡은 풍산 서미동 농환재(弄丸齋)라고 불리는 초가삼간에서 별세했다. 류성룡의 종택이며 그의 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1598~1674)가 류성룡의 학덕과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하회마을에 사랑채와 안채를 건립하였고, 증손자인 류의하(1616~1698)가 확장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보물 414호로 지정되었다.

안동하회마을에서 의성 고운사와 고운 최치원 문학관으로 가는 길인 의성군 점촌면 사촌리 사촌마을은 안동김씨와 풍산류씨 등이 오래 동안 세거한 반촌(班村)이다. 사촌마을은 서애 류성룡이 태어난 마을로 그의 어머니 안동 김씨가 친정인 사촌마을에서 그를 출산하였다고 한다.

길이 1040M, 40M의 가로 숲은 방풍림으로 조성하였는데 수령이 300~600년 된 상수리, 느티나무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405호로 지정되었다.

겸암정사 툇마루
겸암정사 툇마루

이 마을에는 퇴계의 제자 만취당 김사원(金士元)이 지은 만취당(晩翠堂)과 송은 김광수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영귀정(詠歸亭) 등이 남아있으며 사촌마을 자료 전시관에는 이 마을의 역사와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병산서원은 옥연정사와 화천서원 그리고 겸암정사를 잇는 유교문화 길을 도보로 순례하고 하회마을에서 양진당과 충효당을 탐방한 뒤 사촌마을을 방문하는 여정을 끝으로 서애 류성룡의 자취를 따라 그의 학문과 생애를 음미해 보는 것으로 훌륭한 인문학 여행이 될 수 있다.

특히 류성룡이 머물렀던 옥연정사와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은 고택 체험이 가능하다. 충효당은 숙박하고 다음 날 종택의 손맛이 깃든 아침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하회 마을은 충효당 외에도 여러 곳에서 고택 체험과 한옥 체험을 할 수 있어 가족과 함께 여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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