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2)
한국의 서원을 찾아서 (2)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02.12 17:14
  • 호수 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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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유산에서 미래의 가치를 발견하다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 전경

2. 영남 유학의 총본산 도산서원

 

) 도산서원의 건립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이 1561년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도산서당으로 시작하여 그의 사후인 1574년 제자들과 유림(儒林)이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서당 뒤편에 사당(祠堂)을 추가로 세우고 1575년 한석봉의 글씨로 된 현판을 사액받으며 완성되었다.

1576년 도산서원이 완공되었으며 위패를 봉안하고 문순공(文純公)의 시호를 받았다. 1610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고, 1792년 정조임금이 치제(致祭)를 내리고, 3월에 이조판서 이만수에게 명하여 이황(李滉)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를 신설하여 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다. 도산별과는 급제(及第) 2, 진사 2, 초시(初試) 7, 상격(賞格) 14인을 선발하는 특별시험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전무후무한 일로 도산서원이 영남 유학의 총본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사후에 제자들이 설립한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대부분의 서원과 달리 도산서원은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이 각각 다르다. 도산서당 영역에는 서당과 제자들의 숙소인 농운정사와 역락서재가 있고 서원영역에는 강당인 전교당(典敎堂, 보물210)과 퇴계의 위패를 봉안한 상덕사(尙德祠, 보물 211) 그리고 학생들의 숙소인 박약재와 홍의재 등이 있다.

퇴계는 1557년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용수사의 승려 법련(法蓮)에게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건립하게 하였고, 1561년 용수사 승려 정일(淨一)이 도산서당을 완공하였다고 전한다. 1775년 퇴계의 7세손인 이세택이 지은 용산지(龍山誌)에는 퇴계의 후손들이 세거했던 온혜리 근처의 용두산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용수사 관련 내용을 수록하고 있어 용수사와 진성이씨가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원의 건축물은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검소하게 꾸며져 있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서원 시사단
도산서원 시사단

) 도산서원 전각

상덕사는 퇴계의 위패와 제자인 월천 조목(趙穆)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퇴칸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제자인 월천은 평생 퇴계를 곁에서 모시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퇴계의 사후에는 스승을 대신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도산서당은 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부엌과 온돌방 그리고 마루로 되어있다. 여기에 부엌 한 칸과 마루 한 칸을 더 달아냈다. 방은 완락재(玩樂齋),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고 이름붙였다. 완락이란 즐겨 구경하니 평생토록 지내도 즐겁다는 뜻이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쉬었던 마루의 암서헌은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 가지지 못해 바위에 깃들어 효험을 본다는 뜻으로 퇴계의 겸손함이 드러난다.

전교당은 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원장실과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장의 거실은 한존재(閑存齋)이다.1574년 처음 지어 1969년 보수하였고, 전교당 정면의 도산서원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다.

장판각은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는 곳으로 퇴계의 문집과 언행록 등 목판 2790장이 보관되었다가 안전한 관리를 위해 2003년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되었다.

농운정사(隴雲精舍)는 도산서당과 함께 지은 건물로 제자들의 기숙사로 사용하였으며 퇴계가 설계하고, 용수사 승려 법련과 정일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농운은 양나라 은사 도홍경의 산중에 무엇이 있는가/언덕 위엔 흰 구름이 많지/ 다만 내 스스로 기뻐할 뿐/가져다 그대에게 줄 수는 없네라는 시에서 인용한 것으로, 현실의 이욕(利慾)을 멀리하고 자연을 벗하며 학문에 침잠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도산서원 서당
도산서당

역락서재(亦樂書齋)는 도산서당과 같은 시기에 건립되었으며 서당의 제자들을 위한 기숙사로 제자인 정사성 등이 힘을 합쳐 세웠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의 친필이며 역락은 논어의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온 것이다.

박약재(博約齋)는 도산서원생들이 기숙하던 곳으로 동쪽에 위치해 있어 동재라고도 한다. 학문을 넓게 배워 예로서 행하라는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에서 따왔다.

홍의재(弘毅齋)는 서재(西齋)라고도 하며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되니, 그 책임은 무겁고 도학의 길은 멀기 때문이다(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에서 빌려왔다.

시사단(試士壇)은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 건너편에 있으며 1792년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어명으로 특별과거인 도산별과를 치르던 장소다. 총 응시자가 무려 7228명이었으며 급제(及第) 2, 진사 2, 초시(初試) 7명 등 11명을 선발하였다.

이 외에도 퇴계의 유품과 책 등을 전시하고 있는 옥진각과 2001년 퇴계 탄신 50주년을 맞아 건립한 도산서원선비문화 수련원 등이 있다.

온혜파 종택 퇴계 탄생지
온혜파 종택 퇴계 탄생지

<퇴계이황은 어떤 인물인가>

이황의 본관은 진보(眞寶)이고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이며 좌찬성 이식(李植)7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 상()을 당했으며 12세에 작은 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다.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좋아하였으며 20세를 전후해서 주역(周易) 공부에 몰두하여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고 한다.

당초에 과거에 뜻이 없었으나 어머니의 간곡한 바람으로 27세에 향시에서 진사시와 초시에 합격하고 33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었으며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복상(服喪)하였다.

계상서당과 한수암
계상서당과 한서암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고, 43세에 성균관 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해 을사사화(1545)가 일어난 후에는 병을 핑계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낙동강 상류 토계(兔溪)의 동암에 양진암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구도(求道)에 들어갔으며 토계를 퇴계로 바꾸어 부르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조정에서 관직을 내려 여러 차례 불렀으나 사양하였고, 48(1550)에 중앙 관직을 피해 풍기군수로 부임하였다. 군수에 재임할 때 주세붕이 안향을 기리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에 편액과 학전(學田), 서적을 하사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여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받았으니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1년 후 풍기군수를 그만 두고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다시 구도의 길에 들어섰다. 한서암에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세웠는데 이때 학봉 김성일, 월천 조목, 경암 류운용(서애 류성용의 형) 등 퇴계의 7대 제자들이 입문하였다. 그 후로 몇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나 낙향하여 도산서당을 짓고, 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68세 되던 해 선조가 대제학에 임명하자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는데 군왕이 갖춰야 할 덕목과 몸가짐을 정리한 것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잘 드러내었다. 육조소의 내용은 지난 임금들의 뜻을 이어받아 인과 효를 온전히 할 것 아첨하는 말로 이간하는 자들을 막아 양궁(兩宮)이 친하게 지낼 것 성학(聖學, 성리학)으로 다스림의 근본을 세울 것 도덕과 학술을 밝혀 인심을 바로 잡을 것 충성되고 어진 신하를 찾아 눈과 귀를 통하게 할 것 모든 다스림에 있어 하늘의 사랑을 이어받을 것이다.

퇴계는 한서암에 머물며 71세가 되던 해 병환이 악화되어 침상을 정돈시킨 뒤 몸을 일으켜 달라고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운명하였다.

 

<퇴계의 유적과 후손의 고택>

퇴계의 자취를 찾아 처음 발을 디딘 곳은 도산서원이었고, 그 다음엔 한서암이었다. 한서암은 퇴계가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다시 구도의 길에 들어선 곳이며 퇴계의 7대 제자가 입문한 곳이기도 하고, 퇴계가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퇴계종택 - 추월한수정
퇴계종택 - 추월한수정

한서암을 지나 승용차로 3분 거리에 퇴계의 종택이 있다. 퇴계종택은 퇴계의 영손(令孫, 손자) 동암(東巖)공이 지은 것으로 총 34칸의 기와집이다. 1907년 불에 타 1926~1929년 퇴계의 13대손 이충호가 다시 건립하였다.

퇴계가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한서암(寒棲庵) ()은 선비의 곧고 맑은 심성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고봉 기대승은 선생의 마음은 가을 달빛에 비친 차가운 물과 같다.先生之心 如秋月寒水라고 퇴계를 빗대었는데 퇴계의 종택 추월한수정의 이름은 고봉의 글에서 빌린 것으로 보인다.

온계종택 삼백당
온계종택 삼백당

퇴계종택에서 승용차로 5분 거리인 도산면 소재지에 퇴계의 둘째 형인 온계 이해의 온계(溫溪)종택이 있다. 이곳은 이해가 성균관에 입학하자 퇴계가 어머니와 함께 5년 동안 기거했던 곳으로 온계 이해의 손자 이유도의 당호를 써서 삼백당(三柏堂)이라고 부른다. 온계 이해는 1528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나 김안로 등의 권세가에게 합류를 거부하여 유배 중 세상을 떠났다. 온계종택에서 200여 미터 거리에 도산온천이 있는데 예로부터 물이 좋기로 이름난 곳으로 알려졌다.

온계종택에서 100미터 거리에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이 있는데 퇴계의 조부인 이계양이 지었다고 하며 이곳에서 1501년 퇴계가 태어났다. 본채의 측면에 온천정사(溫泉精舍)라는 현판이 있어 도산온천이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산온천은 건물이 오래되어 낡고 허름하나 물이 좋다고 하여 멀리서도 찾아온다고 한다.

수졸당
수졸당

도산면 하계리에 수졸당(守拙堂)은 진성이씨 하계파의 종택이다. 퇴계의 손자인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가 분가할 때 지어진 집으로 '하계종택' 또는 '동암종택' 이라고도 하며 동암의 장자 수졸당(守拙堂) 이기(李技)의 호를 당호로 사용하여 수졸당으로 명명되었다. 온계종택과 수졸당은 고택체험이 가능한 곳이다.

번남고택은 퇴계의 9세손인 번엄 이동순의 가옥으로 삼호당(三乎堂)이라고 불렀다. 99칸으로 지었으나 6.25때 일부가 불에 타고 50여칸 만이 남았다. 창덕궁을 모방하여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대가 집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퇴계의 학문과 덕행 그리고 퇴계의 발자취를 따라 도산서원, 퇴계종택, 한서암과 계상서당, 온계종택과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 수졸당과 번남고택을 탐방하는 길은 인문학과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여행 코스로도 충분하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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