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원(세계유산을)을 찾아서
한국의 서원(세계유산을)을 찾아서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3.02.06 13:55
  • 호수 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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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유산에서 미래의 가치를 발견한다
소수서원의 첫문
소수서원의 첫문

1.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

 

) 한국 서원의 유래

서원은 유교의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립 교육기관으로 지금의 사립대학과 유사하다 하겠다. 각 고을에는 관립(官立)향교가 있어서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배향하여 제사 지내고, 지방의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서원은 사학이라는 특성과 함께 대부분 문중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서원은 크게 제사와 교육기관의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교육을 위해 필요한 서적을 보관하는 도서관의 역할도 맡았다. 서원의 교육목표는 성현을 본받아 훌륭한 인품을 갖추어 이를 실천하는데 있다. 서원에서 가르친 교재는 소학(소학)에서부터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와 오경(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이 중심이었으며 특히 효와 충, 예를 중시한 소학이 강조되었다.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문묘에는 공자를 비롯해 사성(四聖)인 안회, 증자, 자사, 맹자를 배향하고 있는데 이는 사서인 대학의 저자가 증자이고, 논어는 공자의 말을 엮은 것이며 맹자는 맹자의 대화록이며 중용은 자사가 지은 것이라는 점에서 사서가 유학의 가장 기본 서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소수서원 강학당 -최초이름이었던 백운동 편액이 걸려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주세붕이 1542년 우리나라 성리학의 비조인 안향의 고향인 풍기에 건립한 백운동서원이다. 그로부터 명종 대인 1545~1567년까지 17개의 서원이 건립되었으나 선조 대인 1567~1608년까지는 무려 100여 개가 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 이는 연산군 대에 일어난 두 차례의 사화(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와 중종14년 기묘사화, 명종 원년인 1545년 을사사화 등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많은 관료와 학자들이 지방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서원에서 공부한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정계로 진출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고, 서원의 노비는 국역(國役)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에 18세기에는 전국에 무려 700개소가 넘는 서원이 있었다. 이로 인해 국가의 재정에 어려움이 발생하였으며 서원에서 진출한 인물이 중앙정치에서 권력이 강해지면 서원의 힘도 커져 지방의 관료체계를 무너뜨리게 하였다.

이런 폐단에 의해 대원군이 섭정하면서 1871년 당시 전국에 1천여 곳에 달했던 서원 가운데 47(남한 36, 북한 11) 사액서원만을 남기고 모두 강제 철폐하였다.

 

) 안향의 삶과 철학

소수서원에 배향한 안향(安珦)1243년 순흥(현재 영주시 순흥면) 지역의 아전(지방관료)인 안부(安孚)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부는 잡과에 해당하는 의업(醫業)에 급제하여 중앙에 진출하였다. 안향은 현재의 소수서원 자리에 있던 숙수사(宿水寺)에서 수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도 숙수사에서 수학하였다고 전한다. 128911월 안향은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을 수행하여 원나라 수도인 연경을 방문하여 다음 해 봄에 귀국하였는데 이때 주자의 저서를 필사하고, 공자의 초상을 모사하였다. 만년(晩年)에 안향이 회암(晦菴) 주자의 진영(초상화)을 걸어놓았고,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으로 한 것을 보면 안향이 얼마나 주자를 경모하였는지 알 수 있다.

경렴정
경렴정

특히 안향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진흥과 인재양성에 열정을 기울였다. 그는 1304재상의 임무 가운데 인재를 양성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양현고(養賢庫)가 비어 인재를 기를 길이 없다“6품 이상은 은() 한 근식을 내고, 7품 이하는 등급에 따라 포()를 내게 하자. 늘어나는 이식(利息, 이자)으로 교육기금인 섬학전(贍學錢)을 조성하자고 했다. 이에 충렬왕은 왕실 재산과 곡식을 내었고, 관리들도 이에 따랐다. 양현고는 1119년 예종 14년에 관학(官學)진흥을 위해 설립한 장학재단이다.

안향은 주자를 경모하고 성리학을 유교의 정통으로 깊이 받아들였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것을 중히 여겼는데 이는 주자가 소학(小學)에서 강조한 것이다. 그는 자식이 효도하고, 신하가 충성하며 예로 집안을 다스리고 신의로 벗을 사귀며 경()으로 자기 자신을 닦으며 모든 일을 반드시 정성으로 할 따름이다고 하였는데 조선의 선비들은 대부분 성()과 경()으로 공부의 핵심으로 삼았다.

안향의 성리학은 1298년부터 10년 동안 연경에 머물며 성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백이정과 권보, 이제현 등으로 이어졌으며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던 해에는 성리학의 핵심 교재인 사서(四書)가 과거시험으로 채택되었다. 안향이 지방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급제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듯이 초기 성리학을 수용한 관리들은 대부분 신분으로 정계에 진출한 세도가문의 자제가 아닌 과거급제자들이었다.

이들의 출생지도 수도권이 아닌 대부분 삼남 지방인 충청과 전라 그리고 경상도였으며 후에 성리학의 계보를 잇는 서원의 설립도 삼남 지방에 집중되었다. 성리학의 수용은 고려 세도가문의 권력남용과 부정부패, 양민수탈, 조세문란 등에 따른 개혁을 주도하는 신진세력을 형성하게 하였고, 조선왕조 개창의 주도세력인 신진사대부를 이루게 하였다.

 

영정각
영정각

) 소수서원의 건립

1541(중종 36)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주세붕(周世鵬)은 이듬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고, 유생들의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白雲洞)서원을 건립하였다. 백운동서원은 안향이 가장 공경하였던 중국의 주자가 세운 백록동(白鹿洞)서원을 모방하였다. 1546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고, 서원의 향사(享祀)에서 학전(學田)과 서적의 운용 및 관리, 노비와 원속(園屬)의 관리 등 서원의 운영`유지에 필요한 모든 방책을 마련하였다.

1548년 풍기군수에 부임한 퇴계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지원을 요청하였다. 명종은 1550년 대제학 신광한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고, 친히 소수서원이라는 어필을 써서 사액하였고 국가의 지원이 시작되었으며 [사서오경][성리대전]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 소수서원은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이다.

숙수사지 당간
숙수사지 당간

1544년에 이 지역 순흥에서 배출한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1633년에는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다. 안축과 안보는 형제 사이로 안축은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을 지었으며 안보는 밀직제학을 지낸 청백리다.

소수서원의 배치는 우리나라 서원의 특징인 전면에 강당을 건립하고 후면에 사당을 세우는 전학후묘(前學後廟)와 달리 강학의 중심인 명륜당(明倫堂)을 동쪽, 배향의 중심 공간인 사당을 남쪽에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전각은 자유롭게 배치된 특징을 갖고 있다.

이는 서원 앞을 흐르는 죽계천(竹溪川)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죽계천은 소백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으로 죽계구곡(竹溪九曲)으로 부를만큼 경관이 빼어난 곳이며 서원 앞에 취한대(翠寒臺)는 퇴계 이황이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뜻을 빌려 지은 정자로 죽계구곡 가운데 일곡이다. 취한대 앞 바위에는 백운동 서원의 백운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있고, 안향이 공부의 방법으로 중히 여겼던 경()자도 함께 새겨져 있다.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문성공묘(안향의 사당)와 강당인 명륜당(보물), 유생들의 거처인 학구재와 직방재가 있으며 주희(주자)와 안향 그리고 주세붕 등의 초상화를 봉안한 영정각이 있다.

죽계천 옆에는 취한대와 경렴정 두 개의 정자가 있는데 경렴정(景濂亭)은 북송의 성리학자인 염계(濂溪) 주돈이를 추모하여 염()자를 써서 주세붕이 지었다고 한다. 소수서원은 통일신라 때 사찰인 숙수사(宿水寺)의 절터에 지은 것으로 서원 입구에 보물로 지정된 숙수사지 당간지주가 있다.

 

)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 선비촌

영주시는 소수서원의 관광자원화는 물론 한국정신문화의 요람으로 삼기 위해 죽계천 너머에 소수박물관과 선비촌 그리고 한국선비문화수련원을 건립하였다. 지난해에는 선비처럼 보고, 입고, 먹고, 즐기며 21세기 문화를 대표하는 선비세상이 문을 열었다. 선비세상은 한옥, 한복, 한식, 한지, 한글, 한음악 등 6개 테마를 기본으로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인터랙티브 콘텐츠와 첨단매체를 통해 한국문화 속의 선비 정신을 폭넓게 체험할 수 있는 K-문화 테마파크다.

소수박물관
소수박물관

소수박물관은 성리학을 주제로 선비문화를 조명한 한국 최초의 [유교 종합박물관]으로 성리학과 관련된 전통문화 유산을 체계화하고, 소수서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유물을 보관하고 전시하며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공간으로 꾸몄다. 국보 111호인 안향의 초상화(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초상화)와 보물 717호인 주세붕 초상화와 보물 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공자 앞에 길게 늘어서 앉아 있는 그림, 1513년 제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인 성학십도(聖學十圖) 판목, 해동명적(海東名蹟), 소수서원 소장판목(902) 등이 소장 전시되고 있다.

영주 선비촌
영주 선비촌

선비촌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터인 고택을 재현한 곳으로 고택숙박체험, 전통혼례시연, 천연염색, 다도체험 등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선비촌은 크게 4가지로 구성되었는데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은 김세기가 등 6개의 고택으로 구성되었으며 도가 부족한 것을 근심하되 가난한 것을 근심하지 않았던 선비들의 삶의 모습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거무구안(居無求安)살면서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로 현실의 잘잘못을 비판한 영주의 굳은 선비정신과 기개를 엿볼 수 있으며 김문기가와 만죽재로 구성되었다. 수신제가(修身齊家)는 선비들이 인의예지를 공부하고 바르게 실천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을 보여주며 해우당 고택, 강학당 등으로 구성되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은 사회에 진출하여 이름을 드높인다는 뜻으로 중앙관직에 진출한 영주의 양반집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암고택과 인동장씨 종가 등으로 구성되었다.

한국선비문화 수련원은 한국의 정신문화를 계승하고, 민족문화를 창달하고자 2008년 개원하여 초``고생의 인성교육과 대학생과 일반일 대상으로는 인격함양을 위한 교육과 사군자, 다례 등 다채로운 선비문화 프로그램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선비세상
선비세상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서원에 배향한 인물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비조라는 점 그리고 국보 등 문화재급 유물은 물론 죽계천의 아름다운 경관 등 볼거리와 즐길 것이 많다. 전통문화의 계승과 죽계천의 아름다운 경관과 어울린 소나무 숲과 박물관, 선비촌 그리고 지난해 개관한 선비세상 등은 전통과 현대의 어울림으로 영주시의 소중한 관광자원을 이루어가고 있다. 특히 세계유산에 등록된 부석사와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강줄기에 감싸여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도리(무섬)전통마을은 영주시의 소중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관광자원으로 풍기인삼, 영주 사과, 영주 한우는 물론 풍기인견의 높은 매출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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