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와 미암일기(眉巖日記)
성호와 미암일기(眉巖日記)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22.10.16 21:03
  • 호수 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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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학 전공 부교수)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미암일기(眉巖日記)』(1567-1577)는 조선중기 지식 및 생활문화사 연구의 보고로 꼽히는 문헌이다.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齋日記)』, 오희문(吳希文)의 『쇄미록(瑣尾錄)』과 함께 16세기 일기의 3대 진장(珍藏)으로 일컬어지는데다 저자의 우뚝했던 학자·관료적 신뢰와 명성이 더해져 고전 명저(名著)로서의 지위를 획득한지 오래이다. 십 수 편의 석박사학위논문과 수 십 편의 연구논문을 양성(釀成)하고도 여전히 조선시대 생활사의 필독서로서의 위상을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지만 『미암일기(眉巖日記)』라는 이 명저의 학술문화적 가치를 가장 먼저 인지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호였다. 그것도 들어서 안 것이 아니라 실견에 바탕한 것이라는 점에서 구시(求是)의 정신에도 부합한다.

문인 유경종(柳慶種)의 전언에 따르면, 어느 시기에 성호는 호남 걸음을 한 적이 있었다. 처가의 상례에 따른 조문행이었다. 여기서의 처가는 재취 사천목씨가 아닐까 싶은데, 당시 처가는 순창에 터전을 두고 있었고, 장지(葬地)는 인근의 곡성(谷城)이었다. 여기서 성호는 유아무개라는 초면의 문상객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미암의 후손이었다. 사실 성호가는 재종 이명(李洺)이 해남의 청련(靑蓮家;李後白) 집안으로 장가들면서 고산가(孤山家;尹善道), 미암가(眉巖家;柳希春)와 직간접적 척연을 형성하는 등 호남인맥도 자못 탄탄했다.

성호가 만난 미암 자손은 유희춘의 5세손 유징한(柳徵漢)으로 짐작된다. 그는 명재 윤증(尹拯)으로부터 ‘호남학인(湖南學人)’으로 인정받은 유진석(柳震錫)의 아들이었다. 

내가 남쪽 지방 선비 중에 인물이라고 들은 사람은 김만영(金萬英)이고 직접 본 사람은 유진석(柳震錫)이니, 자네가 돌아가 그들을 찾는다면 그들을 통해 절차탁마하는 이익이 어찌 크다고 하지 않겠는가.(尹拯, 『明齋遺稿』 卷32 <送林士駕序>)

즉, 공부하는 집안의 자제로서 성호와의 수작(酬酌)이 가능한 지식과 범절을 갖춘 선비였던 것이다. 유징한은 흉포만권(胸抱萬卷)의 서울선비 성호에게 몹시 끌렸던 것 같다. 그런 정서는 갈 길이 바쁜 성호를 한사코 자신의 집으로 청하는 호의로 이어졌다. 자가(自家)에 볼만한 책이 많다는 말에 성호 또한 지적(知的) 유혹을 떨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주객의 교감 속에 성호의 발길은 어느새 미암가의 사랑에 다달았고, 거기서 그는 일가의 세전 문헌과 마주하게 된다. 

‘미암 선생의 후손과 이야기를 나누다 그의 집에 볼만한 옛 글이 많다고 하길래 10리를 걸어 찾아가니 과연 말 그대로였다. 미암 선생의 편지와 부인의 필적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언문이 아니라 진서(眞書)였다. 또 미암일기 십여 권을 몹시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이것들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단 한 부만이라도 베껴 둘 이가 없어 귀중한 문헌이 사라지지 않을까 안타까웠다’고 하셨다.(윤재환역, 『국역성호선생언행록』 183쪽, <148조>)

여러 문헌 중에서도 성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미암일기』 원고본이었다. 몹시 자세하게 열람한 것은 관심의 반영이었고, 인멸을 우려했던 것은 그 가치를 한 눈에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우려의 절반은 기우가 되었지만 그래도 곱씹어 볼 대목은 있다. ‘십여 권’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성호는 『미암일기』 완질 14책을 열람했음이 분명했지만 현전하는 일기는 11책 뿐이다. 3책의 유실은 300년 전 성호의 원려가 공연한 걱정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이 작은 일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성호는 책이라면 가던 길도 멈출 수 있었던 호학의 선비였고, 지식과 문헌의 등위를 한 눈에 가려내는 혜안의 소유자였으며, 미래의 학술자산까지를 염려할 수 있었던 참된 인문학자였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성호의 박약(博約)함과 성호학의 호한(浩汗)함이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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