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지정 ‘삼남대로 갈재’
명승지정 ‘삼남대로 갈재’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2.08.17 00:18
  • 호수 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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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 복원과 함께 갈재 문화사도 엮어야
고려 현종, 최초의 서양인 하멜도 넘었던 갈재
갈애바위
갈애바위

<갈재(노령)의 어원은>

문화재청은 지난해 128삼남대로 갈재를 명승으로 지정 고시하였다. 옛길을 명승으로 지정한 것은 계립령 하늘재, 문경새재 조령옛길, 죽령옛길, 대관령옛길 등에 이어 여덟 번째다.

갈재는 문경새재와 대관령 옛길과 함께 이곳을 주제로 가장 많은 시문과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전남과 전북의 경계이며 호남과 제주로 부임하기 위해 수많은 관리가 넘었던 길이며 귀양길을 가는 선비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유생 그리고 봇짐장수와 남하한 동학농민군도 넘었던 길이다.

백암산 백학봉에 이어 두 번째로 장성군의 명승으로 지정된 갈재는 해발 276m의 고개로 문헌에 노령(蘆嶺), 위령(葦嶺), 적령(荻嶺), 갈령(葛嶺) 그리고 갈점(葛岾)으로 표기되어 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와 위() 그리고 적()이 모두 갈대를 뜻하는 한자어로 갈대가 많아서 노령이라고 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근거가 부족하다. 갈대는 바닷가에 서식하는 식물로 억새와 비슷하여 노령에 억새가 많아서 노령으로 불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노령에 억새가 많다는 선현의 기록이나 시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또한 근거가 미약하다.

고려사에 정해일 왕이 노령을 넘어 나주로 들어갔다고 기록되었는데 현종1(1010) 때의 일이다. 현종은 태인을 지나 정읍으로 들어선 뒤 노령을 넘어 나주로 몽진하였다고 했다.

노령(갈재) 옛길은 이미 1천여년 전에 임금의 어가(御駕)가 통행할 만큼 중요한 교통로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이하곤(1677~1724)노령은 관동의 여러 봉우리에 비하면 평지라고 할만하다. 옛말에 장서에 (갈대)’인 기생이 대단히 아름다웠는데 한림학사 이생이 수령의 임무를 띠고 왔다가 그 미색에 유혹되어 돌아가지 않고 죽어서 노와 함께 고개 아래 장사지냈다. 노령의 이름은 대개 여기서 이른 것이다고 기록했다. 이하곤은 장인 송상기가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강진에 유배(1722)되어 있었는데 그의 안부를 살피러 가는 길에 호남지방을 유람하며 [남유록(南遊錄)]을 썼는데 남유록에 이 내용이 들어있다.

 

갈재옛길
갈재옛길

<기생 추향과 갈재>

고창출신의 학자 이재 황윤석(1729~1791)노령행(蘆嶺行)’이라는 가사에서 고개에 갈대가 없음에도 노령이라고 부른 것은 노령 남쪽 공북사(拱北寺)에 추랑(秋娘)이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손한림(孫翰林)이 여종에게 유혹되어 함께 살다 죽었다. 추랑이 바로 노랑(蘆娘)’이라고 했다.

그런데 황윤석이 말한 추랑은 본명이 추향(秋香)이고 자()는 계영(桂英)인 조선 중기의 기생으로 짐작된다. 임천상(1754~?)1795년 노령을 넘으며 고개(노령) 아래는 노희(蘆姬)의 옛 유허가 있다. 노는 세속의 이름으로 갈이, 세상에 이름난 미녀를 말하면 송경(개성)의 황진이와 장성의 노를 거론한다. 손한림이 노가 어여쁜 미색으로 사람을 홀린다고 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 미모에 반해 관직을 버리고 노와 함께 평생을 살았으며 노의 집 옆에 손한림의 무덤이 남아있다고 했다.

신위(申緯1769~1845)청암(靑巖)은 장성부에 있고, 부에 갈령(葛嶺)이 있는데 세속에서 노령이라고 일컫는다. 옛 명기였던 이 생장한 마을이 바로 이곳이다고 했다.

한편 추향(秋香)의 가을이 이 되었고, 갈이 갈애바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으며 갈재에 있는 갈애바위미인바위로도 불리며 기생 갈애와 관련한 전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에 노령산맥으로 붙인 이름은 기생 추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 갈재>

갈재는 한양에서 해남까지 이어지는 삼남대로의 중심에 있으며 호남을 통과하는 관문이다. 갈재에는 갈재 옛길과 일제강점기에 길을 넓혀 만든 지방도, 국도와 옛 고속도로, 새 고속도로, 옛 기찻길, 새 기찻길 그리고 고속철도 등 8개의 길이 있다.

갈재는 한양에서 올 때는 정읍의 천원역에서 출발하여 장성 북이면 원덕리 미륵원에 도착하여 머물거나 단암역(청암역, 현재 장성호 아래)에서 유숙하였으며 한양으로 올라갈 때는 그 거꾸로 단암역이나 미륵원에서 출발하여 천원역에서 머물렀다.

갈재에는 한 때 도적이 많아 중종 때인 1520년에는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으며 미륵원이나 천원역에서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 넘었다고 한다. 이때 관리가 아닌 봇짐장수들이 무리를 지어 산을 넘기 위해 머물기 위한 주막이 생겨 정읍 쪽에 군령마을과 장성 목란 마을에도 군사시설과 주막이 많았던 것으로 전한다.

갈재 옛 목란 마을에 근처에는 조선 숙종 대 숙빈 최씨(동이)의 이야기가 담긴 샘터가 있는데 태인 땅에 살던 동이가 전염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되었는데 한 스님이 네가 살려면 장성 갈재에 있는 갈재 샘터로 가라고 했다. 동이가 갈재 샘터에 도착했을 때 나주 부사로 있던 민돈중이 동이를 보고 한양으로 데리고 가 궁녀로 보냈는데 숙종의 총애를 받아 영조임금을 낳았다는 이야기다.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우암 송시열도 넘었던 갈재>

구름까지 치솟은 갈재 등성이(荻嶺侵雲上) 저 아래 지는 석양 굽어보지만(峨峨俯夕暉)

내 고향 장안만은 보이지 않아(長安不在目) 아득히 바랄 따름 돌아갈 수야(遠望未當歸)”

농암 김창협(1651~1708)이 지은 시다. 1689년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자, 우암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이의를 제기하여 이에 분노한 숙종이 송시열과 김창협의 아버지인 김수항을 유배 후 사사하였다. 청풍부사로 있던 김창협은 진도에 유배된 아버지 김수항을 따라 갈재를 넘으며 이 시를 지었다.

그 때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한양으로 압송되어 갈재를 넘어 정읍에 도착하자 사약을 받은 것으로 전한다. 송시열이 마지막으로 넘었던 인생 고개가 갈재이다. 한편 사단칠정론으로 퇴계 이황과 논쟁을 했던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은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갈재를 넘지 못하고 고부(정읍)에서 객사하였다.

밀암(密庵) 이재(1657~1730)는 노령에서 보이는 여덟가지 경관을 시제로 삼아 노현팔영(蘆峴八詠)’을 지었고, 석문(石門) 오이익(1618~1666)천추에 우뚝 서서 큰 키를 오롯이 드러내니 괴로운 절개 높은 뜻 무엇에 견주리까(千秋特立聳長身 苦節高標孰比倫)’라는 시를 썼는데데 이 시는 갈재를 넘어 원덕리 미륵석불을 보고 지은 것이다.

고창이 고향인 이재(頤齋) 황윤석(1729~1791)노령을 지나는 길에 시냇가에 매화가 외롭게 핀 것을 보고 외롭게 핀 모습이 아름답다는 시를 남겼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1435~1493)은 천원역루라는 제목의 시에 땅 기름져 밭에서는 차조를 거두고, 산이 낮아 차()를 공물 한다오. 갈재에는 구름이 암담한데 능악(愣岳) 묏부리가 뽀족하구나라는 시를 남겨 갈재 너머 천원역 쪽에서 차를 재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김시습은 노령을 노현(蘆峴)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노령산이 높지 않아 고개라는 뜻의 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부터 호남이라 명승을 탐상하려 하니 울타리에 누렇게 익은 귤을 실컷 보리라고 하여 노령을 기준으로 기후가 크게 달라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미륵석불
미륵석불

<갈재에서 화적패에 옷을 빼앗겨 알몸이 된 벗>

매천(梅泉) 황현(1855~1910)은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자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고 일컫는 인물이다. 매천의 벗인 이기(李沂)가 갈재를 넘는 길에 화적을 만나 옷과 소지품을 모두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 노략질 당해 의관까지 뺏겼다고 하니, 가을 산에 옥처럼 서 있는 몸 생각해보았지...”라며 알몸이 되었을 벗에 대한 안타까움을 재치있게 그렸다.

남계(南溪) 박세채(1631~1695)는 좌의정을 지낸 조선의 문신으로 그가 죽은 뒤 200여 명의 문인이 그의 묘소 곁을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남계는 고창현감으로 부임하는 조억(趙億)을 전송하는 시에 서쪽으로 금강 지나면 얼음길 미끄럽고, 남쪽으로 노령 돌아가면 계절 변해 있겠지라고 했는데 호남 지방을 향하는 이들에게 넘어야 할 산은 갈재요, 건너야 할 물은 당연히 금강이었음을 공식화하고 있다.

삼연(三淵) 김창흡(1653~1722)은 앞서 언급한 김창흡과 더불어 중국의 정이(程頤), 정호(程顥) 형제에 비할정도로 성리학의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그는 영암에 사는 약호(若昊) 현흠보가 고향으로 돌아가 전별하며 노령(蘆嶺)으로 간다고 하였고, 면암(勉菴) 최익현(1834~1907)은 담양창평에 사는 김의현(金懿鉉, 노사 기정진의 제자)을 노령의 남쪽에 은거한다고 기록했다.

계곡(谿谷) 장유(1587~1638)는 천문·지리·의술·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했고, 서화와 문장에 뛰어난 인물인데 그는 1629년 나만갑(羅萬甲)의 억울함을 주장하다가 나주 목사로 좌천되어 갈재를 넘으면서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향한 마음을 노래했다.

옥오재(玉吾齋) 송상기(1657~1723)는 신임사화(辛壬士禍)1722년 강진으로 유배되어 이듬해 죽었는데 “112일 비를 맞으며 노령을 넘었다. 짙은 안개가 산을 가려서 바로 앞도 구분할 수가 없다.길마저 험하고 질퍽거려서 사람이나 말이나 할 것 없이 길을 갈 수 없으니 그 괴로움을 다 표현할 수 없다. 초저녁에 장성에 도착하여 숙박하였는데 고창현감 양진번과 청암찰방 김성구가 찾아왔다고 기록했다.

서하(西河) 이민서(1633~1688)1667년 나주목사로 부임하며 비 지나자 풀과 나무 홀연 그늘 이루고, 돌 틈에서 흐르는 냇물은 북소리와 같네라고 하여 한적한 경치에 빠져 들어 여유로운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노령(갈재)는 수많은 시인 묵객의 시문이 전하고, 기생 추향의 이야기를 비롯한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며 지리적으로 남북을 왕래하는 관문이었으며 호남의 중간에 위치해 남북을 구분하는 상징으로 여겨진 곳이다.

따라서 갈재의 옛길 복원은 단순한 도로의 복원만이 아닌 우리의 문화와 문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노력이 민선8기 장성군이 추진하고자 하는 품격있는 문화를 이루는 것이며 갈재의 스토리텔링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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