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쌍계루 현판 시서에 담긴 역사적 의의와 화합정신
백양사 쌍계루 현판 시서에 담긴 역사적 의의와 화합정신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22.06.27 16:01
  • 호수 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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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조 (방송인, 조선대학교 특임교수)

백양사는 처음에 백암사로 불렀다가 고려 때는 정토사로 조선 때는 백양사로 개칭되었다. 도량 입구에 세워진 누각은 운문암에서 내려오는 계곡의 물과 천진암에서 흘러오는 물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쌍계루라 붙여졌다.

1350년 각진국사가 세웠으나 1370년 큰비로 무너져 1377년 청수스님이 다시 세우면서 목은 이색이 기문(記文)을 쓰고 포은 정몽주가 시를 지었다. 포은의 시에 송순, 김인후, 박순, 기정진, 기우만 등이 차운하여 200여 편의 시가 남게 되었다. 19506.25 전쟁으로 불에 타버렸고, 1985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2009년 해체하여 다시 세웠다.

방송인이며 조선대학교 특임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대학교 학생들에게 오랫동안 명심보감을 교양과목으로 강의하고 있는 김병조씨가 귀거래사를 쓰며 고향 장성 곳곳을 탐방하다가 사계절 아름다운 쌍계루의 경관과 쌍계루에 걸린 시를 음미하며 [쌍계루 현판 시서에 담긴 의의와 화합정신]이라는 작은 논문을 쓰고, 백양사 대중에게 강의하였다. 대선과 지방선거 과정을 지나며 무엇보다 국민과 군민의 화합이 강조되는 시기에 맞아 강의 내용을 축약하고, 나누어 연재한다. <편집자주>

 
 

풍광이 빼어나 조선팔경의 하나로 선정된바 있는 명승지 백양사 쌍계루는 지금으로부터 672년 전인 1350년 백양사 중흥조이며 시호가 각엄존자이고, 고려 충정왕과 공민왕 양대에 걸쳐 왕사를 역임한 각진(覺眞)국사가 건립하였다. 각진국사는 승보종찰인 송광사 16국사 중 제 13국사로 동진출가(어려서 출가)하여 말년에 이곳 백양사(당시 정토사)에 주석하며 쌍계루를 세웠고 700여년 가까운 시간 동안 시공을 초월하여 수많은 시인 묵객이 쌍계루에 시문을 남겼으니 쌍계루는 문화사적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큰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재다.

처음 세웠을 때 이름이 다리 위의 누각이라는 뜻의 교루(橋樓)’인 것으로 보아 지금의 위치보다 남쪽 지점인 연못에 임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370년 이곳에 대홍수가 나서 둑이 무너지고 소용돌이가 쳐서 교루가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정토사(백양사)를 이끌던 청수(靑叟)대선사가 1377년 예전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누각에 담긴 각진국사의 뜻을 기리고, 이를 후대에 전하고자 누각의 기문(記文)을 얻고자 노력하였는데 이 대 고려 조정의 친원(親元)정책을 비판하다가 탄핵을 받아 나주로 귀양 온 삼봉(三峯) 정도전 선생이 귀양 마지막해인 13772월 무열(無說)선사의 안내로 정토사에 청수 대선사를 뵙고자 찾아와 대사께서 기문을 청하게 되었다.

무열선사는 목은(牧隱) 이색이 스님 중의 한림학사라고 칭송할 만큼 학문이 고매하신 분으로

그 명성이 원나라에까지 알려진 분이다.

특히 정도전이 나주 인근의 아름다운 미담과 일화를 기록하던 중 어느 절에 왜구(倭寇)가 침입하여 인명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지르던 때 상좌스님이 병상의 노스승을 업고 피신하여 무사히 스승을 구했다는 조명(照明)스님을 소개하는 글이 삼봉집에 보이는데 이때의 노스승이 바로 무열선사이다.

이런 인연이 있어 삼봉 정도전이 당시 용진사(나주 용진산)에 주석하던 무열선사의 안내로 백양사에 청수대선사를 뵈러 온 것이다. 교루(쌍계루)를 중건한 청수대선사는 고려말 최고의 명문가로 문희공(文僖公) 이존비(李尊庇), 문헌공(文憲公) 이우(李瑀), 문정공(文貞公) 이암(李嵒) ,문경공(文敬公) 이강(李岡) 이렇게 4대에 걸쳐 문자시호(文字諡號)를 받은 고성이씨 철성부원군 이암의 아우로 조부인 문희공 이존비 선생의 아드님인 각진국사와는 속가(俗家)로 숙질(叔姪)사이가 된다. 청수대선사는 원래 과거에 급제한 뒤 관료생활을 하다가 삼촌인 각진국사의 권유로 출가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분으로 정일품삼중대광복리군(正一品三重大匡福利君)이라는 봉호(封號)를 받게 된 당시 불교계의 큰스님이었고 삼봉이 바로 청수대선사를 뵙기 위해 정토사(백양사)를 찾은 것이다.

그리하여 정토사 입구 일주문에서 삼봉을 마중 나온 무열선사와 함께 교루(쌍계루)에 오르게 되었는데 무열선사께서 일찍이 천하를 주유한 적이 있으나 이곳 정토사 교루 부근만큼 아름다운 경승(景勝)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청수대선사의 뜻으로 삼봉에게 정중히 기문(記文)을 청하자 몸소 살펴본 감흥과 무열선사의 말씀을 참고하여 글을 쓰니 그 글이 바로 삼봉 전도전백암산 정토사 교루기문이니 그때가 13772월이다.

 

김병조 교수의 친필원고 표지
김병조 교수의 친필원고 표지

<목은 이색이 쌍계루라고 이름을 짓고>

삼봉이 기문을 짓고 4년 뒤인 1381, 기문만 있고, 누각의 이름이 없어 교루로만 불리던 것을 안타까워하던 청수대선사께서 문도(門徒)인 절간(絶磵) 스님을 통해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원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그 문명(文名)이 조정에서 으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누각의 작명을 청하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 서거정(徐居正)선생은 쌍계루설(雙溪樓說)’이라는 글에서 청수대선사께서 당시 명필로 나라에서 손꼽히던 환암(幻庵)대선사에게 절간스님을 통해 정도전의 기문을 보내 그분의 글씨로 현판에 보존코자 하였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은 정서(正書)하지 않는 대쪽같은 성품의 환암대선사는 이 시대의 최고 문장가인 목은 이색의 글이 아니면 쓸 수 없다고 하였다. 환암대선사는 절간스님과 자신의 시자인 중곡(中谷)스님을 목은선생에게 보내 기문과 쌍계루라는 이름을 얻어오게 한 뒤 이글을 정사하고 누각에 걸게 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청수대선사가 목은 이색에게 누각의 작명을 부탁하게 된 데는 두 분 사이의 깊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수 대선사의 속가 형님인 행촌(杏村) 이암(李嵒)은 고려 말 대문장가이자 문하시중(현 국무총리)로 당시 고려 조정을 이끌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특히 그가 쓴 단군세기(檀君世紀)’는 우리의 국조가 단군임을 밝히는 상고사(上古史) 연구에 매우 소중한 책이다.

조선조 세종대왕 때 우리 역사상 최초로 평양에 단군사당이 건립되었는데 이암의 손자인 당시 우의정 이원(李原)으로부터 단군의 얘기를 전해 들은 세종대왕이 민족자주성에 입각하여 단군사당을 건립하게 하였고, 이 일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바로 행촌 선생의 단군세기이다.

그런데 청수대선사의 형님인 행촌 이암은 목은 이색의 스승이었을 뿐 아니라 목은 이색의 부친인 가정 이곡(稼亭 李穀)과는 친구 사이였다. 더구나 행촌의 아들인 문경공 이강(文敬公 李岡)과 목은 이색 또한 친구 사이여서 집안 간에 깊은 세교(世交)가 이어져 있었기에 청수대선사가 목은에게 스스럼없이 누각의 작명을 청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청수대선사의 명을 받은 절간스님의 전후사정을 듣고 그가 함께 들고 온 삼봉 정도전의 교루기문을 토대로 그 유명한 장성현 백암사 쌍계루 기문을 작성하면서 쌍계루라고 명명(命名)하게 되었다. 환암대선사는 쌍계의 어원이 당나라 시인 엄유(嚴維)송인입금화(送人入金華)’에 나오는 명월쌍계수(明月雙溪水)에서 따온 듯하다고 하였다. 그때가 13815월이었으며 이로부터 쌍계루가 많은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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