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불여장성이 낳은 문단의 별(4) 장성문학을 다시 일으켜 세운 스승 김병효
문불여장성이 낳은 문단의 별(4) 장성문학을 다시 일으켜 세운 스승 김병효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22.06.15 11:15
  • 호수 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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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동/ 시인, 장성군홍보대사
  1. 타고난 스승이었던 동암

김병효는 1922년 하서 김인후의 15대손으로 김용지와 은희상의 12남매 중 장남으로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 묘동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평생을 아이들과 지냈다. 그의 제자 사랑은 유별나서 둘째딸과 한 학생이 웅변대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딸은 놔두고 다른 애만 집중적으로 지도하여 2등을, 딸은 3등을 한 일도 있어 아내로부터 핀잔과 꾸중을 듣기도 했다. 훗날 많은 제자들이 그의 사랑과 은혜를 잊지 못해 두고두고 선생을 추모하게 되었다.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학문을 좋아했는데, 특히 문학을 즐겼다. 퇴직 후에도 학급학교를 순방하며 동시를 가르치거나 명심보감을 가르쳤다. 

김병효는 모르는 것은 즉시 확인해서 알아내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눈을 감기 3일 전까지 쓴 일기는 그의 심지가 얼마나 깊고 한결같았는가를 말해준다. 

그의 삶은 교사라는 바퀴와 문학이라는 두 개의 바퀴에 의해 굴러갔다. 그에게는 남과 다를 바 없는 가족이 있었지만, 제2 제3의 가족이 있었다. 제자들이 제2의 가족이었다면, 문학 동지들이 제3의 가족이었다. 그의 장성문학회(장성문협)에 대한 애정은 유별났다. 정년퇴임 후 그는 오직 장성문학의 발전에 전념하였다. 장성문학상도 자신의 아들의 협찬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건강하게 93세를 장수했다. 그가 소천했을 때 장성문협에서는 장성문인협회장으로 장례를 치러 그의 마을 앞산에 묻혔다.

 

2. 동암이 발견한 제2의 길 문학사랑

동암 김병효는 40년간 봉직한 초등학교 교사를 퇴직한 후 발견한 제2의 삶은 문학이었다. 그는 문불여장성의 맥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장성에는 1980년대까지도 문학회 하나 없었고, 문학행사를 개최하는 일도 없었다. 동암을 그것이 마음 아파 문학애호가나 문학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1989년 장성문학회를 만들었다. 12년간 회장을 맡은 김병효는 매월 1회씩 문학회원들을 상대로 시조와 동시를 가르치고 작품 합평회를 열었다. 매년 여름과 겨울에는 광주전남의 유명 문인들을 초청하여 1박2일, 또는 2박3일간씩 문학세미나를 열어 문학적 소양과 창작능력을 신장시켜 나갔다. 그가 1989년부터 발간하기 시작한 『노령산』(훗날 『장성문학』)은 문학동인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관내 학생들의 작품도 수록하고 지도함으로써 타지역 문학동인지와 차별화하여 후학을 길러내는 일에 착념했다.

오늘날 장성문인협회는 장성문학회가 발전 성장한 것이며, 남도에서 가장 활발한 문학활동을 하고 있다고 평가 받고 있는 장성문협은 이때 그 싹을 틔우고 꽃망울을 맺었다. 그의 노력으로 후에 전남문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낸 정춘자, 박형동, 백국호, 조선희, 임춘임 등 많은 인재를 길러낸 사람도 동암이었다. 

동암의 저서로는 『노령산 검은 바위』 (1983, 삼성인업사) 『달이 따라와요』(1987, 부광출판사) 『겨레의 탑』(1988,도서출판 샛별) 『꽃잎 손가락』(2003 한림출판사) 『하서 김인후』(2007, 대동문화재단) 등이 있고, 장성문학상(2011), 전남문학상(1998), 한국아동문학 공로상(1998), 장성군민의 상(1987, 1994 두 차례)을 받았다.

3. 동암의 문학세계

동암 자신도 동시, 동시조, 자유시, 시조에 이르기까지 유형의 넘나들며 창작에 열중하였는데, 어느 것을 읽어도 아주 자연스럽게 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동암의 시야말로 눈에 띄고 귀에 들리기만 하면 무엇이든 시화(詩化)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문(文)은 사람이란 말을 입증함을 동암의 시에서 볼 수 있다. -문학박사 이응백- 

김병효의 동시 속의 동심은 어린이에 대한 사랑, 또 그 미래에 대한 관심이 없이는 포착할 수가 없다. 동암이 어린이들과 어울린 생활은 매우 소중한 문학적 체험이 되었으며, 이것이 제대로의 문학적 동기를 낳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시세계는 어린이들과 함께한 오랜 생활체험이 빚어낸 아동문학이자 아름다운 삶의 열매다. -아동문학가 박화목-

김병효의 시는 진솔한 삶과 생각들의 표현일진대, 이보다 값진 작품이 없고, 이보다 값진 재보가 달리 없을 줄 믿는다. 천진한 꿈 그대로가 어린이 모습이라면, 일생을 허욕 없이 너무나 정직하게 걸어오신 외길이 바로 시인의 모습 그대로가 그의 시(詩)다. -시인 송수권-       

김병효의 시 속에 등장하는 무지개, 달, 별, 구름, 눈, 비 등 자연과 우주의 모습이, 개미, 벌, 청개구리, 제비, 강아지 오리 같은 살아 움직이는 동물들의 모습이, 할아버지, 할머니, 아기, 형, 아기, 누나, 딸 등 가족의 사랑이, 그리고 온갖 꽃과 자전거, 선풍기, 가로등, 철길 같은 문명의 이기나 그것을 이어주는 것들이 모여 있고, 사람의 따뜻한 정과 사랑, 흐뭇한 삶의 모습이 배어있다. -아동문학가 엄기원-

 

4. 동암의 대표작 「꽃잎 손가락」

 

우리 아기 손가락은 꽃잎 손가락

은가루 발랐나 진달래 물들었나

분홍빛 꽃잎은 윤기마저 돋는다

 

보들보들 말랑말랑 만지고 싶고

온기가 감돌아 얼굴에 부비고 싶고

폈다 오무렸다 꼬물꼬물

 

이 세상 이렇게 고운 꽃잎 또 있을까

꼭 붙잡아 입맞춤하고 싶구나

 

5. 『동암일기』

 

“70년간 나를 깨우쳐 준 그대는

정녕 나의 스승이어라

그대는 나의 등불이었소

거울이었소

소금이었소”

 

동암이 일기장을 꽂아놓은 책장에 붙여놓은 글이다. 동암을 말할 때 동암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만큼 동암의 일생에 미친 일기의 영향은 컸다. 동암 스스로 70년(실제는 79년)간 나를 깨우쳐준 그대요, 스승이라고 말했다. 일기를 쓰며 지나온 오늘을 생각하며 스스로 깨우쳐 나갔다. 동암을 가르친 스승도 많았겠지만, 진정 동암을 항상 바르고 바람직한 방향을 인도해 준 것은 자신의 일기장이었다. 그에게 일기장은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게 하는 등불이었다. 스스로를 반추해보는 거울이었고, 자신에 세속에 섞여 혼탁해지지 않도록 해주는 소금이었다. 그래서 14살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숨을 거두기 3일 전까지 79년을 빠짐없이 쓸 수 있었다.

그 일기장은 일제 강점기의 공책에다 써내려간 일기에서부터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그 이후 계곡을 쏟아져 내리는 홍수처럼 흘러간 우리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기록된 실록이었다. 우리말과 한자, 영어, 일본어 등 4개 국어로 쓰여진 일기, 그림도 그리고, 도표도 그리면서 그날의 기억을 살려놓은 일기, 어떤 일기장은 좀이 먹어 한쪽이 삭아버린 일기... 그 일기를 보며 필자는 눈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필자는 동암일기를 어떤 기록보다도 우리의 근현대사를 생생하고 진실하게 증언해주는 문화재라고 생각한다. 이 일기는 마땅한 전시 공간을 찾지 못하고 북이도서관에 임대 보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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