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불여장성이 낳은 문단의 별(3) - 호남문단을 일군 시인 박흡
문불여장성이 낳은 문단의 별(3) - 호남문단을 일군 시인 박흡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22.05.29 22:31
  • 호수 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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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동/ 시인 장성군홍보대사

1. 천재의 어두운 학창시절과 그의 행적

박흡(박증구)1912년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393번지에서 태어났다. 박흡은 장성공립심상소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 명문인 이리농림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리농림학교는 일본 학생이 더 많았으며 조선학생들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했다. 박흡은 독서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는데, 당시의 독서회는 학생들의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리농림60년사에 의하면 19301월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알고 비밀리에 유인물을 인쇄하려다 발각되어 졸업을 앞두고 사상 불온 학생으로 퇴학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이리농림학교는 조선학생들에 대한 차별철폐를 주장하는 동맹휴교를 하게 되었고, 그는 일본 경찰에 의해 3개월 정도 유치장에 갇혀 지냈다. 그가 31일을 택하여 결혼식을 올린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흡은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일문학부에서 공부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해방 직전 영광군청에서 잠시 근무하던 그는 1947년 숙명여자전문대학, 194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중등교원양성소 국어과 강사로 출강하다가 1948년경 광주로 내려와 광주서중, 전라남도 국어과 장학위원, 광주고등학교, 조선대학교 국문과 등에서 제자들을 길렀고, 1956년 광주여객의 경리과장을 한 후, 1958년 중앙여중고가 세워질 때 서무과장 겸 교사를 맡았다.

 

2. 사랑, 그리고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박흡은 숙명여전(현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문학강의를 하면서 최초의 시 젊은 강사를 경향신문에 발표(1947.4.25)하였고, 이석봉이라는 미모의 제자를 만나 뜨거운 사랑을 하게 된다. 이석봉은 맑고 당차고 영특했다. 박흡은 1948년경 광주로 내려와 광주서중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석봉은 고향 김천에 내려가 있다가 광주로 찾아와 결혼한 후 전남여중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박흡이 참여한 문예지와 동인지에는 어김없이 이석봉이 동참하였고, 두 아들을 두었다. 이석봉은 미모와 지성, 그리고 문학적 재능으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다. 이석봉은 보성여고로 전임한 뒤 두 사람을 별거했고, 박흡은 1962년 자살로 생을 마쳤다.

 

조선대 이동순 교수에 의해 발간된 박흡문학전집(2013,국학자료원)
조선대 이동순 교수에 의해 발간된 박흡문학전집(2013,국학자료원)

3. 죽음을 노래한 시인

박흡은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했는데, 그것이 그의 시였다. 그의 죽음(평화일보, 1948.8.7)을 보면 죽음은 오직 나의 하나의 재산’ ‘이 지친 육신이 갈 곳은 오직 한 개 무덤뿐, 눈 감으면 성지처럼 무리 속에서 떠오르나니’ ‘죽음은 나의 희망, 무덤은 나의 궁전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박흡이 죽음에 눈을 돌릴수록 시는 신에 대한 간절한 기도로 변했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절대자에게 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가 책상 위에 해골을 두고 살았다는 일화와 관을 짜서 책상 삼아 살겠다고 한 것(전남일보 1957.1.24.), 그리고조선순교사조선순교복사열전을 탐독했다는 것을 보면,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적인 원죄의식과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광주서중에 재직하면서 쓴 시로 보이는 그의 대표작 나무꾼과 선녀라는 오랜 이야기가 배경을 이룬 것으로 삶에의 충만과 희망을 그리고 있어서 죽음에 대한 끝없는 물음으로 이어지는 그의 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이다.

 

4. 남도의 문단에 남긴 박흡의 발자국

박흡은 1948년경 광주서중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면서 문총구국대 전남지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혼란 중에서도 國語國文學要覽을 발간하였는데, 이 책은 인명, 서명, 가곡명, 작품명, 문학사, 문법, 국문학사, 국어국문학 전반에 걸친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학소사전이다.

1952년 광주고등학교로 전근하여 1955년까지 근무하면서 문예부 학생들을 지도하였는데, 이때 박흡은 훗날 광주문단의 전성기를 이룩한 윤삼하와 박성룡, 김정옥, 정현웅, 주명영, 박봉우, 강태열 등을 길러냈다.

장성문화예술공원의 박흡 「못」 시비
장성문화예술공원의 박흡 「못」 시비

그는 1950년 김남중 등과 함께 전남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전남지부를 조직하였고, 1951갈매기신문학, 1952시정신, 1953시와 산문의 창립동인으로 중심역할을 했으며, 1955년 월간 다도해의 편집국장을 맡았다. 호남신문과 전남일보 등에 시와 평론, 서평 등을 연재하는 한편, 광주전남 시문단의 형성과정을 정리하였다. 또한 학생문예와 해군목포경비부에서 발행한 월간잡지 갈매기의 편집인을 역임하였다.

특히 한국전쟁 기간에 전국에서 발행된 유일한 동인지인 신문학은 임정희(박용철의 부인)와 김남중(전남일보사장)의 지원을 받아 발간되었는데, 박흡과 이석봉, 이동주, 장용건, 손철, 승지행, 백완기 등이 참여하였고, 천경자, 손재형 등의 예술가들도 표지화, 삽화, 제호 등을 담당하면서 참여하였다. 전후 발표 공간이 없던 시절이라 한국 문단의 쟁쟁한 문인들이 신문학에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중에 한국 단편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인 황순원의 소나기, 조연현의 평론 풀잎단장을 읽고등이 있다. 이런 신문학에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문인이 박흡과 김현승이었다.

박흡은 김현승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시 광주문단은 반 김현승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김현승의 작고 후 시비건립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이수복, 허연 등 광주의 주요 시인들 상당수가 참여를 거부하였다.

반면 박흡은 순박하고 거만하지 않았으며 책임감이 강했으나 말수가 적었다. 선인장 등 화초를 무척 좋아해서 그 집에는 항상 여러 가지 꽃이 만발하였고, 잉꼬, 십자매 등 새들을 키웠으며, 사람들은 그런 박흡을 좋아했다.

 

박흡의 생가가 보이는 황룡면 장산리 외장산 마을
박흡의 생가가 보이는 황룡면 장산리 외장산 마을

5. 잊어서는 안 될, 그러나 잊혀져버린 시인 박흡

그러나 역사는 사건이나 인간성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그 영향력을 기억한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반 김현승 정서는 사라지고 많은 추모사업이 전개되고 있는데, 박흡은 잊혀지고 그의 업적은 묻히고 말았다. 엄밀히 말한다면 박흡이 광주전남 문단에 미친 영향과 공헌도는 결코 김현승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가 태어난 지도 100년을 훌쩍 넘었고, 그가 간 지도 반세기가 지났건만, 그가 활동한 광주전남문단은 물론, 태어난 장성에서마저 잊힌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생존시 시집 하나 남기지 못했고, 2013년에 이르러서야 이동순 교수에 의해서 박흡문학전집이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우리는 항일운동가요, 교육자였으며, 광주전남문단을 일구었던 시인 박흡의 이름을 높이 부르면서 그의 시적 성과와 광주전남 문단에 남긴 공로를 깊게 새겨야 할 시점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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