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불여장성이 낳은 문단의 별(1) - 한국의 희곡과 연극의 아버지 김우진
문불여장성이 낳은 문단의 별(1) - 한국의 희곡과 연극의 아버지 김우진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22.05.17 01:02
  • 호수 9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형동/ 시인

장성군홍보대사영국의 여성 미술 교육자인 미셀(Michel,H.)은 ‘예술에 관심을 두지 않은 문명은 정신적인 질식과 도덕적 환멸에 빠질 것’이라고 했다. 장성은 흥선대원군이 ‘문장에는 장성만 한 곳이 없다’고 평할 만큼 언어 예술인 문학이 발달한 곳이며, 북이면 백양사역 옆에는 김우진(희곡)/김일로(아동문학)/박흡(시)/김병효(아동문학)/오영재(시)/이상보(수필) 등 장성출신 현대 문학 대가들을 전시한 ‘비오리 문학관’이 우뚝 서 있다. 본지는 박형동 작가의 도움을 받아 제920호를 시작으로 ‘문불여장성이 낳은 문단의 별’ 7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이 장성의 문학인을 기억하고 장성 문학의 미래를 비추는 의미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편집자 주

 

1. 29살의 큰 별, 현해탄으로 떨어지다

192683, 우리 현대 문학사의 뒤안길에서 가장 가슴 아프고 뜻밖의 사건이 터져 뭇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문학과 연극계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각광을 받고 있던 김우진(金祐鎭, 1897~1926)이 성악가요 연극배우인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 것이다. 두 사람의 비극은 우리 문화계에 커다란 충격이요, 손실이었다.

김우진은 1897919일 장성군수이며 부호였던 김성규의 장남으로 장성읍 수산리에서 태어났다. 김우진은 아버지가 설립한 선의의숙에서 공부하다가 11세에 목포로 이주하여 목포심상소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구마모토농업학교와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1924). 학생 김우진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입하여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구마모토농업학교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대학시절(1920)에는 조명희 등과 함께 연극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1921년에는 동우회순회연극단을 조직하여 부산, 김해, 마산, 경주, 대구, 목포, 진남포, 원산, 서울을 돌며 공연을 하는 동안 조명희의 김영일의 사(), 홍난파의 소설을 각색한 최후의 악수, 그리고 아일랜드 작가 던세이니 경의 희곡을 김우진이 번역한 찬란한 문()등을 무대에 올려 가는 곳마다 열띤 호응을 받았다. 김우진은 이 순회공연 때 연출을 맡는 한편, 일체의 경비를 부담했다. 김우진은 이때 홍난파와 함께 성악가 윤심덕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1921년에 가진 고국 순회 공연 단원들 가운데 보이는 여자가 윤심덕, 그 오른쪽이 홍난파
1921년에 가진 고국 순회 공연 단원들 가운데 보이는 여자가 윤심덕, 그 오른쪽이 홍난파

2. 김우진 문학의 성격

김우진은 아버지의 회사인 상성합명회사의 사장에 취임하였지만, , 희곡창작, 평론에 몰두하였다. 그는 아흔아홉 칸짜리 집에서 보수적인 유교적 교육을 받았으나, 어머니가 일찍 죽고 계모와 형제들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으며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항상 마음속의 그늘을 지워내지 못한 그는 서구 근대사상에 철저하게 탐닉하였다. 그의 사상적 바탕이 된 니체, 마르크스 같은 철학자는 물론, 러시아혁명 이후의 사회주의에도 깊이 심취해 들어갔다. 그의 현대시 죽엄」「사와 생의 이론」「죽엄의 이론등에서 잘 나타나는 것처럼 그의 시 세계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저항과 개혁 정신을 보여주었다. 희곡 세계 또한 시대적, 가정적 고통을 담은 자전적 세계를 보여주었다. 두덕이 시인의 환멸(1)은 제목에서도 풍기는 것처럼 전통윤리와 새로운 서구적 윤리의 첨예한 갈등을 그린 것이고, 이영녀는 그가 살던 목포 유달산 밑의 사창가를 무대로 빈민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자연주의 수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리고 대표작으로 꼽히는 난파산돼지는 우리나라 문예사상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으로서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신파극만 존재했던 1920년대로서는 대단히 전위적인 실험극이었다. 난파는 그가 자살한 해인 1926년 봄에 쓴 작품으로서, 복잡하게 얽힌 유교적 가족구조 속에서 현대적인 서구윤리를 지닌 한 젊은 시인이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매우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이 작품은 그대로 그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산돼지는 친구 조명희의 시 봄 잔디밭 위에에서 암시를 얻어 쓴 작품으로, 좌절당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을 음울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그의 사회개혁 사상을 잘 보여주며, 지극히 몽환적으로 끌고 간 것이 특징이다. 그가 이 작품을 가리켜 자신의 생의 행진곡이라고 고백했듯이, 개화한 지식인의 임상보고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김우진
김우진

3. 김우진 문학의 보폭과 깊이

그는 또한 뛰어난 평론들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에서 소위 근대극에 대하여」「자유극장 이야기」「사옹의 생활」「구미 극작가론은 탁월한 논문이다. 그리고 쓰키지소극장에서 인조인간을 보고라는 글은 연극평의 한 모범을 보여 준다.

그는조선말 없는 조선문단에 일언(一言)이라는 평론에서는 서양의 경우를 예로 들어 순수한 조선어의 부흥과 개량을 역설했고, 새 문전(文典)의 제정과 사전의 출현, 구비전설과 민요와 동요의 수집을 촉구했다. 또 우리의 독특한 시가율(詩歌律)을 가질 것과 외국문학의 우리말 번역, 신문과 잡지의 대중화 등을 주장했다.

그는 자기가 겪은 시대적 고통을 적절히 희곡 속에 투영함으로써 당시 계몽적 민족주의나 인도주의 내지 감상주의에 머물렀던 기성문단을 훌쩍 뛰어넘은 선구적 극작가였으며, 특히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점에서 유일한 극작가이다. 또한, 해박한 식견과 선구적 비평안을 가지고 당대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며, 최초로 신극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 평가된다. 그는 한국문학에 있어서 본격적인 희곡과 그에 의한 연극의 장을 본격적으로 펼친 선구자였으며, 동시에 희곡과 연극은 물론 시, 소설, 번역, 평론에 이르기까지 다 방면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으며, 우리 말과 민요, 동요를 지키고 되찾으려는 애국자였다.

 

만인의 연인이었던 가수 윤심덕
만인의 연인이었던 가수 윤심덕

4. 용서하소서! 저의 길은 아버지의 길과 다릅니다.

김우진은 빈곤에 허덕이는 다른 예술인들에 비해 부유함을 누렸지만, 이에 못지않은 고통 을 안고 살았다. 자수성가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그의 아버지는 여러 자식 중에서 김우진을 유독 아꼈고, 그도 연민과 사랑 때문에 되도록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뒤 군말 없이 아버지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서 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의 사장직을 맡은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도 아버지의 완고한 가치관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아 그는 압박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결정으로 애정 없는 결혼을 함으로써 그는 더욱 심한 번민과 강박 관념에 시달렸고, 이상 세계와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그는 어릴 적부터 세파에 시달리고 애정 결핍에 허덕이던 윤심덕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이 무렵부터 그의 창작 욕구가 왕성하게 끓어올라 정오」「이영녀」「두덕이 시인의 환멸」「난파」「산돼지등 모두 다섯 편의 희곡을 썼다.

김우진은 희곡 외에 1925창작을 권합내다라는 창작론도 썼다. 이 글에서 표현주의를 체계적으로 소개했으며, 전통적 인습타파를 작품 주제로 삼은 한국작가들에게는 표현주의가 가장 알맞은 창작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진실한 문학관을 가지고 있어서 개벽에 실린 계급 문학 찬반론을 읽은 뒤, 아관(我觀) 계급 문학과 비평가를 발표해 어설픈 계급주의 의식과 관념으로 문학을 호도하는 프로 문학 진영과, 아집에 빠져 계급 문학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드는 민족주의 문학 진영 양측 모두를 비판했다. 1926조선지광5월호에는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라는 논문을 실어 구태의연하고 상식적인 이광수 문학의 허실을 지적하고 생명력반발력을 내포한 진지한 문학인의 자세를 제시하는 등 예리한 비평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김우진이 투신에 대한 기사
김우진이 투신에 대한 기사

김우진은 시 48편과 5편의 희곡, 3편의 소설과 번역물, 그리고 연극과 문학에 관한 논문 또는 비평 20여 편을 썼지만, 발표는 거의 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내성적이고 완벽을 기하는 성격 때문으로 보인다. 이 역시 우리 현대시 역사에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5. , 성이여, 문불여장성이여!

김우진은 장성이 낳은 위대한 희곡작가요, 시인이요, 연극인이며, 선지자적 평론가였다. 그러나 11살에 아버지를 따라 목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흔히 목포 출신으로 알고 있고, 목포시에서는 김우진을 박화성, 김현, 차범석과 함께 목포문학관에 전시하여 시민들의 문학적 자긍심을 높이는 한편, 많은 문화상품을 창출해냄으로써 관광산업의 발전과 소득 증대를 위해 지혜롭게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문불여장성이라는 우리 장성이 배출한 훌륭한 문학인을 타지역에 빼앗기고 있는데, 이는 김우진뿐만이 아니다. 다음에 다루게 될 김일로는 해남과 목포에, 오영재는 강진에 빼앗기고 있다. 필자는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속이 뒤집어진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면서 김우진이 가사를 붙이고 윤심덕이 불러 민족의 사랑을 받았던 사의 찬미를 되뇌어 본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전라남도 장성군 영천로 168 3층
  • 대표전화 : 061-392-2041~2042
  • 팩스 : 061-392-2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변동빈
  • 법인명 : (주)주간장성군민신문사
  • 제호 : 장성군민신문
  • 등록번호 : 전남 다 00184
  • 등록일 : 2003-07-04
  • 발행일 : 2003-08-15
  • 발행인 : 류이경
  • 편집인 : 변동빈
  • 장성군민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성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snews1@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