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와 언론인의 길
드레퓌스와 언론인의 길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2.01.17 10:58
  • 호수 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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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924일 프랑스 육군참모본부 정보부 위베르 앙리 소령은 파리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정보원이 빼낸 익명의 손편지에 프랑스의 군사 기밀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이 문서를 명세서라고 했다.

명세서의 정보가 참모본부의 요원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내용이어서 근무자 전원의 필체를 대조하였고, 유대인인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용의자로 특정하여 체포했다. ‘반역죄를 저지른 장교에 대한 첫 신문기사가 나간 뒤 프랑스의 신문들은 프랑스군 장교가 아닌 유대인 대위라고 썼고, 재판을 하기도 전에 반역자로 규정했다. 군사법원은 비공개 재판을 열어 그해 1222일 드레퓌스를 프랑스 군적에서 박탈하고 종신형을 선고했는데 1848년 정치범 사형금지조항에 따라 사형을 면한 것이다.

드레퓌스는 남아메리카 기아나의 악마섬에 갇혔는데 이곳은 예전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였던 곳으로 무더위와 함께 밤에는 발에 족쇄를 채우는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여느 스파이 사건과 달리 드레퓌스는 용의자일 때도 피고인일 때도 유죄를 선고 받은 뒤에도 혐의를 시인하지 않았으며 감옥에서 아내 뤼시에게 보낸 편지에도 무죄를 밝히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지만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드레퓌스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1895년 참모본부 정보부장에 취임한 피카르 중령은 1896년 봄 다른 스파이 사건 관련 문서를 조사하다가 드레퓌스 사건의 명세서와 필체가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 참모본부장과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했으나 이를 은폐하라고 했다.

피카르 중령은 드레퓌스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도 군수뇌부의 압력에 의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데 189693일 한 지방신문의 가짜뉴스가 악마섬에 갇힌 드레퓌스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끌고 왔다. 신문은 반역자 드레퓌스가 헌터 대령의 도움을 받아 함선을 타고 악마섬을 탈출했다는 내용이었고, 드레퓌스의 유죄를 의심할 여지가 없는 비밀자료를 배심원들이 보았다며 그 자료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이 신문이 드레퓌스를 공격하기 위해 낸 기사였지만 도리어 군사법원이 소송절차를 위반한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유대주의를 극렬하게 선동한 신문 르 마텡’ 1면 머릿기사에 허위필적 감정서를 작성한 필적 전문가에게 돈을 주고 입수한 명세서 복사본이 보도되면서 드레퓌스의 반역죄에 대한 오직 하나뿐인 증거로 채택된 명세서의 필체에 대한 지식인들의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참모본부 장군들은 드레퓌스의 무고함을 보고한 피카르 중령을 튀니지로 내쫓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피카르는 변호사 친구와 상원 부의장에게 사건의 전모를 알렸다. 이때 르 피가로신문은 에스테라지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재심을 요구하는 기사를 내보냈지만 18981월 군사법원은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피카르 중령을 기소하겠다고 했다.

프랑스는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작가 에밀졸라는 1898113일자 로로르신문에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한 군사재판을 호되게 꾸짖으며 진실이 전진하고 있으며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로로르 신문의 발행인은 조르주 클레망소로 후에 총리가 되어 피카르를 국방부장관으로 발탁하였다. 에스테라지는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영국으로 달아났는데 출판사에서 거금을 받고 낸 책에 드레퓌스 명세서의 범인이 자신이라고 고백해 버리고 말았다.

1899년 드레퓌스는 악마의 섬에서 나와 99일 재심에서 다시 유죄를 선고받았고, 열흘 뒤 대통령은 국방부장관에게 드레퓌스의 형량을 면제하고 군적을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드레퓌스 사건은 수천 개의 프랑스 신문 가운데 르 피가르’ ‘로로르같은 몇 개의 신문사로 인해 지식인과 언론인이 프랑스 사회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언론이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못지 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4가 되었다.

대선과 지방선거를 앞두고 언론과 방송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당시 로로르와 같은 신문이 없었다면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은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언론의 규모와 힘은 과거보다 커졌지만 언론의 정의는 더 멀어진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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