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의날 기념 특집 (1) - 간추려 보는 장성 의병사
의병의날 기념 특집 (1) - 간추려 보는 장성 의병사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1.05.31 22:00
  • 호수 87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병의날 장성기념식

'의병의 날'은 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일깨워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제정한 법정기념일로, 매년 61일이다. 2010525'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22168)' 개정안을 통해 매년 61일을 '의병의 날'로 제정·공포하였다. 2011년 제1회 의병의 날 기념식이 경남 의령에서 개최되었고, 2015년 제5회 의병의날 기념식은 장성군과 장성문화원이 주관하여 장성문예회관에서 열렸다.

의병의날이 61일로 제정된 것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호국보훈의달의 첫째 날로 선정하였다. 장성군은 호남 의병의 중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에 많은 의병이 창의한 곳이다. 하지만 2016년 장성문화원과 무등역사연구회가 공동으로 장성의병사발간을 위한 7권의 사료조사를 마치고도 의병사 발간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오는 61일 의병의날을 맞아 장성 의병사를 간추려 본다.

 

<우리나라 의병의 역사>

의병이란 정의를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민병을 뜻하는 말이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개인이 지배하는 사병이 있었고 사병이 나라의 명을 받아 활동하기도 하는 등 관군과 비관군의 구분이 모호했다. 따라서 의병이란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부터라고 정의하고 있다.

의병은 농민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전직 관료와 사림 그리고 승려들도 지도층으로 함께 하였으며 다수의 노비들도 의병에 참여하였다. 특히 우리나라는 향촌 공동체가 향토방위를 맡아온 전통이 있어 의병 부대의 조직이 수월했다고 역사학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의병이 참여한 유명한 전투로는 행주대첩과 진주대첩 등이 있는데 두 대첩은 장성과도 인연이 깊다. 행주대첩은 망암 변이중 선생이 제작한 화차가 승리의 큰 원인이 되었고, 진주대첩은 오천 김경수 선생이 주도한 남문창의 의병이 다수 참여한 전투였기 때문이다.

의병은 향토지리에 익숙하고 향토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면충돌보다 매복, 기습, 위장 등으로 적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임란 때 대표적인 의병장은 경기도 김천일, 경상도 곽재우, 충청도 조헌 그리고 전라도 고경명, 황해도 이정암, 강원도 사명당 등이다.

이정암은 의병 지원자의 성명을 [의병약서책]에 기록하고 8가지 군율을 정하여 적진에 임하여 물러나는 자는 참수한다. 민간에 폐를 끼친 자는 참수한다. 군기를 누설한 자는 참수한다. 적의 재물을 획득한 자는 그 재물을 모두 상으로 준다는 등의 항목을 지키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경상도와 경기도를 공격했던 왜군은 15972월 재침(정유재란) 때는 조선의 군수병참 기지인 전라도를 집중공격하였다. 왜군은 해로를 따라 순천에 상륙해 북으로 공격하거나, 경상도 서부연안에 상륙한 뒤 섬진강을 거슬러 구례 남원을 거쳐 전주로 향하였다. 또한 진주와 함양을 경유해 운봉 남원을 거쳐 전주로 가는 길과 거창 안의를 거쳐 육십령을 넘어 진안 전주로 통하는 길을 택했다.

왜군이 남원과 구례 그리고 장성을 거쳐 전주로 가는 과정에서 구례와 장성은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는데 장성은 정유재란 이후 오산현과 진원현을 합해 장성현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할 정도로 인명 피해가 컸다.

임진왜란 때 김경수, 김천일, 고경명 등 의병장들이 수백 명에서 수천 명까지 조직을 꾸려 때론 연합작전을 벌이는 등 큰 규모로 왜군과 싸웠다. 하지만 정유재란 때는 수십 명 내외의 소규모로 고을이나 마을을 지키는 의병활동이었다. 이는 선조가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김덕령 등 의병장을 역모 혐의로 처형하거나 제거해 의병활동이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성에서는 정유재란 때 3차 남문창의를 하여 1천여 명의 의병이 모집되었으니 매우 드문 일이다.

1627년 후금의 침입(정묘호란)1636년 청의 침입(병자호란) 때도 의병이 일어났으나 두 전쟁 모두 후금과 청에 굴복하여 의병활동이 지속되지는 않았다. 장성에서는 김득원, 김지보, 나통서, 박윤감, 변덕윤, 신필, 이이남 등이 정묘, 병자호란 때에 의병활동을 주도하였다.

구한말 의병활동은 주로 농민들이 중심이 된 동학농민혁명과 사림과 강제 해산된 군인이 중심이 된 의병활동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 의병활동은 독립운동으로 발전 변화하였다.

오산창의비
오산창의비

<임진왜란과 장성의 의병활동>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장성의 의병활동에 대한 내용은 [남문창의록][남문창의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문창의비의 공식명칭은 [호남오산남문창의비(湖南鰲山南門倡義碑)]로 북이면 사거리 북이면사무소 인근에 위치해 있다. 사거리에 남문창의비를 세운 까닭은 15921124일에 출정한 1,651명의 장성의병이 서울로 가기 위해 하룻밤 머물던 뜻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창의비문에 적힌 남문 의병 창의 인물은 72명으로 장성현감 이귀, 맹주 김경수, 의병장 김제민과 기효간, 정운룡 등이며 백양사 승려 9명과 김경수의 종 애금이 포함되어 신분과 종교를 초월한 애국충절의 표본이 되었다.

남문창의는 3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창의는 15927월 김경수가 장성남문에서 창의하여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 1,651명과 양곡 496석을 마련하고, 김경수가 맹주로 김제민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들은 1219일 직산과 이듬해 110일 용인에서 왜군을 대파한 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협상이 시작되어 일시 귀향하였다.

2차 창의는 강화협상이 결렬되고, 1593529일 김경수가 다시 남문에 의병청을 열어 의병과 양곡을 모집하였다. 이때 장성현감 이귀가 의병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처럼 현감의 지원속에 의병 836, 양곡 629석을 확보하여 진주성의 결전이 임박하자 6월 김경수의 두 아들 김극후와 김극순으로 하여금 의병대를 이끌고 진주성에 보내어 전투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들은 진주성에서 일본군의 총공세에 밀려 모두 순절하였고 진주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3차 창의는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김경수가 8월에 다시 남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백양사 소속 승병 77명 등 1천여 명의 의병이 모이자 김경수의 사촌 동생인 전직 판관 김신남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신남은 의병을 이끌고 825일 안성으로 진군하여 소사안성 등지에서 적을 무찌르고 9월에 해산하였다.

이렇게 장성의병은 3차에 거쳐 창의를 하였으며 임진왜란에 이은 정유재란까지 7년 동안 의병 활동을 한 것은 다른 의병활동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장성은 남문창의 외에도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어 의병활동을 했으니 이순신장군의 휘하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임진, 정유재란 때 장성의 의병활동에 참여한 인물에 대한 자료는 1799년에 간행된 [호남절의록], 1927년 간행된 [장성읍지], 1798년 간행된 [오산명인록], 1799년 간행된 [남문창의록] 등에 수록되어 있다.

오산창의사
오산창의사

<정묘`병자호란과 장성의 의병>

임진왜란 이후 북방의 여진족이 크게 세력을 키워 후금을 세웠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폈으나 광해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세웠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후금은 조선을 압박하였으며 1627(인조5) 침략하였고, 우리는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부른다.

이 싸움에서 조선은 후금에게 패해 굴욕적인 협상을 맺었다. 후금은 세력을 더욱 키워 국호를 청()이라 하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였다. 1636(인조 14) 청의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한 달 만에 인조가 항복하고, 군신관계를 맺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잡아갔다.

이때 장성에서는 나통서, 박윤감, 변덕윤, 신필 등이 의병과 곡식을 모아 호남의병과 함께 청주까지 진군하였으나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해산하고 장성으로 돌아왔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전라남도 장성군 영천로 168 3층
  • 대표전화 : 061-392-2041~2042
  • 팩스 : 061-392-2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변동빈
  • 법인명 : (주)주간장성군민신문사
  • 제호 : 장성군민신문
  • 등록번호 : 전남 다 00184
  • 등록일 : 2003-07-04
  • 발행일 : 2003-08-15
  • 발행인 : 류이경
  • 편집인 : 변동빈
  • 장성군민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성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snews1@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