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1.05.23 22:42
  • 호수 8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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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12 군사쿠데타에서 비롯된 비극, 진실규명 미흡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1년 째를 맞이했지만 아직도 진실은 규명되지 않았고, 책임자의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백 명의 시민이 빨갱이와 폭도로 몰려 잔혹하게 살해되었고, 임산부와 어린아이까지 무참히 학살당한 이 비극의 해원(解冤)은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밖에 없다.

5.18은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주항쟁, 광주학살, 광주사태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5.18단체에서는 상당 기간 동안 광주민중항쟁으로 불렀는데 여기서는 광주항쟁으로 표현한다.

지난 21일 미얀마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시민들이 이에 항거하며 520일 현재 8백여 명이 넘는 미얀마 시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마치 41년 전 광주항쟁을 보는듯하여 광주항쟁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여론도 다시 조명되고 있다. 광주항쟁은 왜 일어났으며 최종 책임자는 누구인가?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을 근거로 이를 추적해 본다.

 

<12.12 군사쿠데타>

19791026일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박정희가 죽자 박정희 1인을 위한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19791212일 군사반란을 일으킨 신군부는 군부를 장악한 뒤 권력을 잡기 위한 수순에 들어갔다.

하지만 19803월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시작되면서 각 대학에서는 민주주의 쟁취전두화 물러가라는 집회와 시위가 점차 확산되었고, 이를 빌미로 전두환 등은 19805180시를 기준으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확대하였다. 계엄군은 휴교령이 내린 전남대학교를 비롯해 각 대학을 봉쇄하였고, 거리로 나온 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하였으며 이에 항거하는 시민들은 점차 늘어났다. 19805180시를 기해 계엄령 확대가 발표되었을 때 대부분의 도시는 침묵하였지만 전남대생들을 비롯한 광주시민들은 계엄확대를 반대하며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은 공수부대원들로 이미 진압 작전인 충정훈련을 받으며 시민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 잔혹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89년 국회청문회에서 조비오신부는 나에게 총이 있었다면 나도 계엄군에게 총을 쐈을 것이다고 말했다. 계엄군의 만행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신부가 그런 말을 했을 것인가 짐작할 수 있다. 1980520일 전남매일신문기자의 집단 사직서에는 우리는 보았다. 사람들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고 했다.

임신 8개월의 임산부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었고, 네 살박이 어린아이가 계엄군의 총에 희생되었으며 총에 맞거나 칼에 찔려죽은 청소년이 50여 명에 이르렀다. 헌혈을 하러 가던 여고생이 총에 맞아 죽었고, 심지어 여고생 등 적지 않은 여성들이 계엄군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다는 증언도 남아있다.

<5.18항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19805월 수백 명의 민주시민이 계엄군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하고도 그들과 가족에게 씌워진 덫은 빨갱이라는 주홍글씨였다. 박정희에 의해 갈라진 지역감정은 마침내 5.18로 인해 전라도 사람들을 모두 빨갱이로 만들었으며 80년대까지만 해도 일부 경상도 사람들은 전라도 놈들은 모두 빨갱이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19805월의 광주는 전두환 군사쿠데타 세력들에 의해 폭도불순세력으로 매도되었고, 진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독일의 일본주재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가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광주에 잠입해 현장을 취재했고, 필름을 과자 상자에 담아 독일로 보냈다.

그의 사진이 다큐로 제작되어 독일에서 방송되었고,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의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일부 성당과 대학에서 재방영되었고, 광주의 진상을 알게된 대학가에서 5월이면 광주의 진상을 밝히라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많은 청년`학생들이 분신과 투신을 하며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슬푸른 억압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투쟁했던 청년`학생 그리고 민주진영의 내면에는 광주항쟁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민주화를 이루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절실함 때문이었다. 따라서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뿌리는 광주민중항쟁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으며 이 땅에서 완전한 정치`경제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광주항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누가 그들에게 발포를 명령했나?>

5.18 광주항쟁의 마지막 질문은 언제나 누가 무고한 시민들의 머리와 가슴에 총을 발포하라고 명령했는가이다. 계엄군으로 투입된 특전사 대원들과 31사단 부대원들은 빨갱이를 때려잡으러 간다는 쇄뇌를 당했고, 그들에게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국제인권 감시단 아시아 지역 담당지부에서는 광주항쟁을 진압했던 계엄군을 나치돌격대에 비유하기도 했다. 계엄군의 잔혹함과 무자비한 살상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진압군으로 참여한 많은 군인들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앓았고, 심지어 자살한 군인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무고한 시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상부의 명령에 의해 시민들에게 총구를 들이댔던 군인들도 후유증에 시달린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시민들을 향한 발포 명령의 최종 책임자일까? 전두환과 그 일당들은 대통령은 최규하였고, 계엄사령관은 이희성, 그리고 제2군 사령관과 전라남북도 계엄소장이 지휘체계라며 자신은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SBS2018년 미 국무부 비밀전문을 근거로 5.18 최종 진압작전을 결심한 책임자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라고 보도했다. 광주항쟁 때 시민들은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펼침막을 제작하여 행군할 때 사용하였다. 더구나 1979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군부는 이미 전두환이 장악하였고, 실질적인 권한은 전두환이 갖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최세창(1980520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제3공수특전여단에 실탄 배부와 실탄 사용을 지시, 전두환 때 국방부 장관 등 역임. 1997년 대법원에서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재판에서 반란 모의 참여 주요 임무 종사·상관 살해 미수 등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음)이 실질적인 지휘권을 행사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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