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와 정약전
자산어보와 정약전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1.04.18 22:24
  • 호수 8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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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를 근거로 만든 영화 자산어보가 적지 않은 관심과 호평을 받고 있고, 관객들도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정약전은 동생인 정약용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정재원은 첫째 부인 남씨와 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윤씨와 약전, 약종, 약용 그리고 딸 한 명을 두었는데 재원의 사위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세례자 이승훈이다.

큰아들 약현의 큰사위가 유명한 황사영백서 사건의 주인공이고, 셋째 딸과 사위 그리고 외손자도 모두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하였다. 재원의 셋째 아들인 약종과 며느리 그리고 두 아들과 딸도 모두 순교했으니 재원의 가족 중에 천주교 박해로 죽은 사람만 10명이다.

조선 후기 최고의 천재 집안으로 꼽히는 정재원의 자녀들은 서교(西敎)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풍비박산이 되었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전라도 땅으로 유배 가야만 했다.

개혁정치를 주도했던 정조는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를 총애하였으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왕위에 오른 뒤 수렴청정을 했던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약용을 비롯한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西敎)를 신봉한다는 빌미로 이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냈다. 이때 약용의 형 약종과 형수, 조카 철상, 하상, 정혜 그리고 매제인 이승훈 등이 죽었고, 정약용은 완도군 신지도로 약전은 경주 장기현(감포)으로 귀양을 갔다.

그 후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나 다시 투옥된 약전과 약용은 그 사건과 무관함이 밝혀져 약전은 전라도 땅끝이나 다름없는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180111월 두 사람은 귀양길에 올라 전라북도 익산과 정읍을 지나 장성갈재를 넘어 사거리 어디쯤에서 국밥 한 그릇을 했을지도 모른다. 개천을 따라 장성읍을 지난 약전, 약용 형제는 나주의 율정이라는 주점에서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다. “이 몸은 율정 주점을 미워하니, 문 앞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원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으나 떨어지는 꽃잎처럼 흩날리겠지요. 천지를 넓게 본다면 일찍이 한 집안 아닌 것이 없지만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내 모습만 쳐다보니, 슬픈 생각 끝이 없습니다약용은 형과의 이별을 앞두고 이렇게 시를 남겼다.

형제는 강진과 흑산도라는 각자의 유배지에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약용은 약전이 흑산도 주변의 물고기 등에 대한 저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약용은 강진에서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나 약전은 조선 최초의 표류기라고 할 [표해시말(漂海始末)][자산어보] 외에 시와 문집 등 어떤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약용은 조선의 정치개혁과 변화 그리고 다시 관직에 돌아가 자신의 포부를 펼치겠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지만 약전은 이미 정치에 대한 미련 등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전은 어상 문순득을 찾아가 태풍으로 배가 표류하여 오키나와와 필리핀 그리고 중국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온 그의 표류 동안의 이야기를 듣고 표해시말(표해록)을 썼다.

자산어보는 흑산도에서 만난 장덕순(창대)이라는 청년을 통해 알게 된 흑산도 주변의 물고기와 조개류 등에 대한 기록으로 우리나라 해양 생물에 대한 고전이나 다름없는 책이다.

약전은 유배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1816년 흑산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약용은 제자인 이청을 흑산도로 보내 약전의 원고를 보완하고, 주석을 달아 자산어보라는 책으로 엮었다. 그렇게 보면 자산어보는 약전과 장덕순 그리고 약용의 제자인 이청 이 세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약전이 쓴 자산어보는 정작 필요한 어민들에게 전해지지 않았으며 몇 사람의 필사본으로만 전해왔다. 조선이 신봉하던 성리학은 과거 시험에 출제되는 문제집으로 출세를 위한 사다리에 불과했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였으며, 백성을 위한 실사구시는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전과 약용 두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했던 것은 다르지 않았으나 유배를 떠난 뒤 두 사람의 삶은 같지 않았다. 약전의 자산어보는 이미 양반이라는 신분을 버린 미완의 혁명가가 남긴 거룩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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