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수암’, 호남창의회맹소 주요 활동 현장으로 알려져
‘석수암’, 호남창의회맹소 주요 활동 현장으로 알려져
  • 이미선 기자
  • 승인 2020.06.15 11:49
  • 호수 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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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가치 조사 중 건물지, 집수시설, 명문 등 다수 파악
뿌리깊은 의병의 고장 장성, 전라도 의병의 70% 장성 출신
조선시대 「장성부 지도」에 표시된 석수암(1872년 제작)
조선시대 「장성부 지도」에 표시된 석수암(1872년 제작)

장성군은 예산 6천만 원을 들여 황룡면 관동리 수연산 능선에 잠들어 있는 석수암을 포함한 지역 내 비지정 문화유산 3개소에 대해 지역 역사유산 가치를 재조명하고 역사 가치가 높은 유산을 등록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도록 ()호남문화재연구원을 통해 학술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석수암 일대 호남의병 총사령부 유적지

석수암지 위치와 주변유적분포현황(문화재청 GIS인트라넷시스템 제공)
석수암지 위치와 주변유적분포현황(문화재청 GIS인트라넷시스템 제공)

석수암은 고려시대 창건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아직까지 관련 문헌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872년 제작된 조선시대 장성부지도에 석수암 건물이 표시되어 있고 장성 백양사에 소속된 암자임을 알려주는 지적도 등이 전해진다. 1927장성읍지에 따르면 1908년 불에 탄 것을 1926년에 김형록이 중건하였고 이후 한국전쟁 때 다시 불에 탔다가 복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 학자인 하서 김인후 선생, 후기 학자인 노사 기정진 선생 등이 공부하였던 곳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또한 석수암은 한말 호남의병운동의 총사령부에 해당하는 호남창의회맹소(이하 회맹소)’의 주요 활동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때까지 사찰의 형태를 유지했지만 이후 인적이 끊기면서 1970년대까지 한 종교재단이 기도원으로 사용했던 것으로도 전해진다.

특히 석수암 일대는 지난 2003년 국립광주박물관이 추진한 정밀지표조사 과정에서 호남의병 총사령부 유적지로 공식 확인됐었다.

하지만 이후 실체를 정확하게 밝혀 줄 학술용역 조사 등이 추진되지 못한 채 잊혀져 있다가 지난해 12월 장성군이 수연산 8부 능선에 대한 현장 조사를 재추진하는 과정에서 유구와 유물 상당수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현장 조사에서는 바위에 수연산 입구를 알리기 위해 새긴 수연동문(隨緣洞門)이라는 글씨와 연병장으로 추정되는 하단부 석축 수십 미터를 비롯해 중간 건물터, 석축과 붕괴된 건축물 잔해, 화장실, 함석 소재 지붕, 우물터, 도자기와 항아리, 기와 파편 등이 다수 발견됐다.

석수암의 위치는 국방부 소유의 예비군 훈련장으로 편입돼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상태이다.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기삼연(奇參衍, 1851~1908)
기삼연(奇參衍, 1851~1908)

1910년 무렵 전라도 일대에서는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 같다 전해산, 잘 싸운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라는 동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동요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른은 물론 어린아이들까지도 우상으로 여긴 남도 의병장들이다.

이 중 맨 앞에 등장하는 기삼연(奇參衍, 1851~1908)1907년 장성 수연산에서 거병한 호남창의회맹소(이하 회맹소) 대장으로 한말 호남의병의 큰 물꼬를 튼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1851118일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마을에서 진사 기봉진의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이다. 기삼연은 어린 시절 당대의 호남 유림을 대표하던 성리학자인 노사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전국에서 본격적으로 의병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기삼연은 18962월 장성에서 기우만과 함께 거의했다. 기삼연은 군무(群舞)를 담당해 백마를 타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하여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고 불렸다. 3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해 의병을 일으키려고 할 즈음 왕이 보낸 선유사 신기선 등이 내려와 왕의 명령을 전하자 어쩔 수 없이 의병을 해산하게 된다.

하지만 기삼연은 우리 임금의 본뜻이 아닐 것이라며 다시 의병운동을 도모했으나, 일진회 회원의 밀고로 이 사실이 드러나 딸이 혼례를 치르는 날에 체포당해 서울 평리원옥에 이감된 후 원장 이용태의 도움으로 탈옥하였다.

1907년 일본이 우리나라 군대를 해산시킨 뒤 기삼연은 장성군 관동리 수연산 석수암에서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부대를 구성하고 대장에 추대되었다.

회맹소는 격문을 돌려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일깨운 후 일본인과 일진회원을 처단하면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장성군, 고창군, 법성포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법성포의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소각시킨 후 창고 곡식을 빼앗아 군량미로 쓰고, 남은 곡식은 모두 백성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7년 말부터 겨울철 추위로 세력이 위축되었고, 담양군으로 피신했다가 기습 공격을 받아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기삼연은 담양에서는 몸을 피했으나 곧 순창군에서 체포되어 광주로 압송된 뒤 190812일 광주 서천교 및 백사장에서 총살당해 58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회맹소의 활동은 통령 김용구를 비롯해 김준·이철형·김기순·박도경·이영화·김공삼·김율 등에 의하여 지속되었다. 이 밖에도 회맹소의 과감한 반일투쟁에 고무되어 의병을 일으키려는 세력이 크게 증가했다.

일제 측은 1906~1909년 호남지역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최익현·고광순·기삼연·김준·김율·전해산·심남일·안규홍 등을 지목했다. 이들 가운데 기삼연, 김준, 김율, 전해산, 심남일 등은 모두 회맹소에 참여한 의병장들이었다. 따라서 회맹소는 호남지역 의병봉기에 매우 큰 영향을 주면서 1908~1909년 우리 지역이 의병항쟁의 중심무대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세력으로 평가된다.

의병운동의 70~80%가 전라도에서 일어났고 전라도 의병의 60~70%가 장성 출신 의병들이었던 것을 보아 장성군은 뿌리깊은 의병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의 현지조사 결과는?

호남문화재연구원의 현재까지의 조사결과 자료에 따르면 건물지 2개소, 집수시설 2개소, 저장시설 1개소, 진입로 2개소, 그리고 축대시설이 여러지점에 자리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또한 암벽에 새겨진 명문이 5개소가 확인됐다. 석수암지의 규모는 건물지 2개소의 편평한 지점만을 대상으로 할 때 남북길이 40m, 동서길이 17m로 면적은 약 700이다. 하지만 건물지 하단에 위치한 저장시설 공간까지 포함한다면 그 면적은 더 확대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건물지1’은 주건물지로 석수암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건물지와 기단석축, 계단, 부엌, 굴뚝, 암거시설을 갖춘 것으로 확인했다.

건물지2’는 건물지1의 남쪽 진입로 위쪽의 평탄한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정리 전 신우대가자라고 있던 지점으로 진입로 방향과 나란히 길다란 석축시설을 갖추고 있다.

 

집수시설1’은 건물지의 북서쪽 뒤편에 자리하는데 위쪽 암반에는 藥泉(약천)’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자연수가 식수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현재는 암반위로 석재를 추가로 쌓고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했다.

집수시설2’는 내부 중앙쪽으로 남쪽에 치우쳐서 길다란 장대석 1매가 놓여있다. 장대석은 집수시설 안쪽 물을 이용하기 위해 놓은 것으로 파악했으며 집수시설에는 지속적으로 물이 모이는데 바닥에 시설이 따로 없어 식수보다는 생활용수로 이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집수과정은 집수시설1에서 1차로 이뤄진 후 건물지 뒤쪽 수로를 따라 흘러 집수시설2로 다시 모아지는 형태이다. 수로는 양쪽으로 일부 축대를 쌓거나 석재를 이용하여 길다랗게 만들어 1차적으로 집수된 물을 2차적으로 집수하여 다시 한 번 이용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건물쪽으로 물이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도 파악했다.

저장시설은 동쪽 하단부에서 확인됐다. 방형석조물로 저장시설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바닥은 흙으로 다져진 상태로 발견했다. 석조물의 네벽 중 일부는 기존의 암반을 이용하고 나머지는 할석을 이용하여 2~5단으로 쌓았으며 모두 안쪽으로 면을 맞추었다. 저장시설은 음식물을 보관하는 석빙고와 같은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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