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일 동안 감금 고문당한 이준규 전 목포서장
90일 동안 감금 고문당한 이준규 전 목포서장
  • 변동빈 기자
  • 승인 2019.11.26 13:58
  • 호수 7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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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신군부 5.18 유혈 진압 거부 이유로
장성, 북이면 오월리에서 태어나 북이초등학교 졸업

<어려서부터 남달랐던 이준규서장>

이준규 전 목포경찰서장은 1928년 장성군 북이면 오월리 오현마을에서 5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이준규 서장의 증조부가 봉산이씨가 자자일촌을 이루고 있는 부동마을에서 오월리로 이주하여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서장은 북이초등학교(사거리초등학교)에 입학하였을 때부터 공부는 물론 리더십이 뛰어나 두각을 나타낸 빼어난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서장에 대해 그의 동생인 이암길씨는 장형보다 둘째형인 이준규서장이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 학생들의 리더를 상징하는 나팔수를 형을 제치고 학년도 낮은 둘째형이 했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이준규서장의 장형은 북이초등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사로 재직한 고 이민규선생이다.

이서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두 살 위인 장형이 중학교에 진학하였기 때문에 시골 살림으로 한꺼번에 두 명의 학생을 광주로 진학시키지 못한 것이다.

이서장은 중학교에 진학하기 전 농촌에 남아 낮에는 농사일을 거들고 밤에는 야학을 하며 문맹퇴치에 앞장서는 등 선구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뒤에야 광주 송정리에 있는 정광중학교에 진학하였는데 동생인 이암길씨는 형님이 당시 우리집안 형편이 어려워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서장은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경찰에 투신하여 송정리 경찰서에서 순경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순경으로 근무하면서 밤에는 조선대학교 법학과에서 학업을 계속하였고, 경위 승진시험에서 전국 1등을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다.

경감 승진시험에서는 전국 2위를 하였고, 형사소송법 등 수사와 기소와 관련해서 광주`전남 경찰서에서 이박사로 통할만큼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광주경찰서 수사과장 등을 역임하고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진도경찰서장으로 부임할 만큼 실력과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 후 화순, 해남 등 전남 지역의 경찰서장을 두루 역임하였고, 5.18이 일어나던 해인 1980년 목포서장에 재임하고 있었다.

<강직한 성품과 자존감이 강했던 이서장>

이서장은 세종의 스승인 문정공 이수 선생의 후예로 경위 승진시험에서 전국 1등을 할 만큼 실력이 뛰어나고 자존감이 강했다고 한다.

1948년도에 경찰관이 된 이서장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때는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로 부모와 동생을 잃는 불행을 겪기도 하였다. 19802월 이서장은 목포경찰서장에 부임하였다.

197910·26일 박정희 정권이 붕괴된 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2·12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 서울에서 시작된 민주화 요구 시위는 광주를 거쳐 목포에까지 번졌다.

특히 517일 비상계엄 확대 조처 이후 목포역 광장에는 날마다 수만여 명이 운집해 계엄 철폐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구호를 외쳤다. 전두환 신군부는 목포 경찰에게 시위대에 대한 강경 진압을 주문했다. 하지만 이준규 서장은 신군부의 진압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대신 바로 상급자인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이 내린 평화시위 유도와 방어적 진압지시에 따라 강경진압을 하지 않았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5·18 당시 시위대와 계엄군 간의 유혈 충돌을 막은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의 목을 죄었다. 목포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김대중과 연결시켜 내란으로 몰아가려던 계획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1980521일부터 22일까지 목포시민 100여명이 각목과 총기를 들고 경찰서에 들어왔을 때 시민들을 무력으로 대응하지 말고,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말라는 내용의 구내방송을 하여 시민과 경찰의 충돌을 막았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직후 19806월 초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을 보안사로 연행하여 90여 일 동안 감금하고 고문했다. 이유는 단 하나 5·18 시위에 강경 대처하지 않았다는 이유였고, 오랜 시간의 감금과 고문으로도 그를 처벌할 죄도 명분도 찾지 못하던 신군부는 그를 파면하고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계엄보통군법회의는 그에게 징역 1년 선고유예 처분을 내렸다.

90일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문 등을 당하고 집에 돌아온 그는 고문 후유증과 억울한 분노에 시달리다 1985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신군부의 지시에 의해 이서장을 파면한 치안본부는 그를 무능한 경찰관으로 매도하였고, 누구보다 자존감이 강했던 그의 명예를 짓밟아 그의 충격과 상심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무죄 선고 받고, 명예회복 이뤄>

지난 1011일 광주지법 목포지원 형사2단독(임효미 부장판사)1980년 전투교육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선고유예 처분한 이준규 서장 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서장은 23녀의 자녀를 두었으나 1980년 당시에 자녀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린 학생 신분이어서 아버지에 대한 재판 기록이나 자료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둘째 사위인 고려대학교 윤성식 명예교수가 장인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해 자료를 모았고, 전두환씨가 20174월에 낸 회고록은 아이러니하게도 재심 재판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두환씨는 회고록에서 5·18민주화운동 폭력 진압의 책임을 경찰에 떠넘겼다. 전씨는 광주 사태 초기 경찰력이 무력화되고 계엄군이 시위 진압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전남경찰국장의 중대한 과실 때문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경찰청은 2017T.F팀을 만들어 5.18 당시 경찰의 역할과 대응에 대해 조사하였고,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보고서에는 19805월 광주 상황과 안병하 전남경찰국장 및 이준규 목포서장 등이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상세히 담겼다.

보고서는 당시 신군부가 계엄군의 폭력 진압을 덮기 위해 이 서장 등 일부 경찰을 희생양으로 삼아 파면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목포시의 기록(<목포시사>)을 보면, 521일 오후 5시쯤 목포 시위대는 광주 학살을 외면하고 폭도로 비난하는 데 분노해 목포 MBC를 공격하였고, 오후 8시 이후에는 법원, 검찰지청, 시청, 파출소, 세무서 등이 파손된다.

그리고 522일 오전 이준규 서장과 목포시장, 목포민주시민투쟁위원장과 목포대학장이 모여서 수습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서장은 광주처럼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와 무력으로 진압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으니 총기를 반납하고 평화시위를 해달라고 호소했다. 이 자리에서 합의가 이뤄져 522일부터 목포에서는 총기가 회수되었다.

이준규 서장의 현명한 대처로 대형 유혈 충돌과 함께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 할 수 있는 위험 요소가 제거된 것이다.

그런데 서장은 530일 갑작스럽게 치안본부로부터 직위해제 통보를 받고, 이어 파면되었다. 경찰 TF 보고서에 따르면 전두환씨는 530일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직무유기 경찰관 보고라는 문건에 직접 서명하였고, 직무유기란 시민들을 강제 진압하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였다.

610일 보안사에 강제 연행되어 가족들의 면회도 허락하지 않고, 90여일 동안이나 강제 구금하여 고문을 당하고 군법회의에 넘겨진 그는 징역1년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군법회의가 선고유예를 내린 것은 사실상 죄가 없는 그를 무죄로 선고할 수 없어서 내린 궁여지책으로 볼 수밖에 없다.

 

<명예회복과 보상 이루어져야>

법원에 의해 이서장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다. 다행히 지난해 7월 국가보훈처는 이준규 전 서장을 5·18 유공자로 선정했다.

5.18 때 신군부의 강제진압을 거부하고, 시민들에게 발포를 거부하여 5.18 직후 보안사에 끌려가 열흘 동안 고문을 당한 뒤 '직무유기 및 지휘포기 혐의'로 해임 당한 안병하 전전남도경국장은 1988년 심부전증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노무현정부에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열려 안병하 도경국장은 순직으로 인정되었고, 국립현충원에 묻히게 되었다.

그런데 보안사에 끌려가 90일 동안이나 고문을 당하고, 전두환 신군부에 파면을 당했던 이준규 전 목포서장은 이제야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회복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제 파면 처분으로 받지 못한 퇴직금과 고문 등 후유증에 의한 사망에 의한 순직 인정 그리고 국립현충원 안장 등 그의 완전한 명예회복이 하루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이서장의 딸인 이향진씨는 아버지는 풀려나온 뒤 가족에게 김대중씨와 내통했다는 관계를 대라고 죽도록 고문을 당했다고 털어놓으셨다라고 회고했다. 그의 사위인 윤성식 고려대 명예교수는 신군부가 이서장을 파면하고 보안사로 끌고 가 고문한 이유에 대해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선포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내란음모죄로 구속했다. 신군부 처지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목포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해야 그럴듯한 내란의 증거가 된다. 그해 527일 경찰의 목포역 앞 마지막 시위 진압작전 때까지 시위가 평화롭게 지속됐다. 아버님은 시위대와 협상을 하는 등 신군부 의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며 큰 미움을 산 것이다.”고 말했다.

이서장의 억울한 누명과 불명예스러운 파면 그리고 고문 후유증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위암 투병과 순직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 학생 신분이었던 자녀들의 충격과 고난은 아무리 많은 물질로 보상한다고 하여도 충분할 수 없다. 하지만 앞서 말한 이준규 서장의 순직인정과 국립현충원 안장 등을 통해 그의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가 지급해야할 보상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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