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암서원에 콘텐츠를 입혀라
필암서원에 콘텐츠를 입혀라
  • 변동빈 기자
  • 승인 2019.07.29 23:58
  • 호수 7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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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역사와 기능>

서원은 교육과 정치 그리고 사회·경제 등 조선시대 시대상을 그대로 투영하는 곳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최초의 서원은 1543년 주세붕이 안향(安珦)의 고향인 풍기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처음 건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550년 이황이 백운동서원을 사액서원으로 요청하면서 서원보급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초기의 서원은 제사 기능이 생략된 서당과 비슷했다.

세종실록(1436)평안도관찰사가 보고하였는데, 함종현의 강우양이라는 생원이 사사로이 서원을 만들어 학도를 가르친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기의 서원은 제사기능 없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서당과 같았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지방 사림들의 사회적 역할이 강화되면서 서원 건립이 크게 증가했다. 명종(1545-1567) 재위 때에 17개였던 것이 선조(1567-1608) 재위 때에는 사액서원만 100개가 넘을 정도였다.

서원이 가장 번성했던 18세기에는 전국에 700여 개의 서원이 건립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같은 성씨들이 한 마을을 이루며 경쟁적으로 서원을 건립하여 서원은 더욱 늘어났다.

서원 가운데는 강학기능만 있던 서당이 발전하여 서원으로 변한 것들도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필암서원을 비롯하여 도산서원(안동), 덕천서원(산청), 돈암서원(논산), 노강서원(논산) 등이 있다.

그러나 초기의 서원 건립 목적과는 달리 점차 서원의 본래 목적인 향사와 강학 중 강학기능이 축소되어 심지어는 사묘(祀廟)만 건립하고 서원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이 향사기능만 가진 서원은 문중의 권세를 과시하려는 의도로 건립된 경우도 많아 그 폐단이 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서원을 중심으로 당론이 격화되고 군역의 폐단이 나타남에 따라 1741(영조17)에는 상당수의 서원이 철폐되었다.

결국 1871(고종8) 흥선대원군은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에 대해 11(一人一院) 이외의 중복 건립된 서원을 대상으로 철폐령을 내리고, 전국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수백 개의 서원을 철폐했다

 

<서원의 교육 내용>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들은 도학정치를 주장하며 관학을 대신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새로운 교학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 따라서 서원의 교육목표는 성리학적 학문목표와 마찬가지로 인간 심성에 내재한 천명을 실현하여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교육기관의 일반적인 관리등용의 기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서원의 교육철학과 교육내용은 서원규약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황의 [이산서원규약(1558)과 이이의은병정사 학규(1578)에서는 학문연구를 근본으로 하고 관리 선발시험인 과거는 부차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서원은 당시 관학이 과거공부에 몰두하는 점을 비판하며, 학문과 인격의 완성을 추구하는 학문의 장소라는 명목으로 본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황과 이이의 원규는 조선시대의 서원이 확산되던 시기에 제정된 것으로서 조선조 서원의 원규에 모범이 되었다.

이황은 학문을 위주로 하되, 과거에 응시하는데 필요한 공부는 부수적으로 할 것을 밝혔다. 하지만 율곡 이이는 성현의 글이나 성리의 학설이 아니면 서원 안에서 읽을 수 없다(역사서는 읽어도 좋다). 만약 과거 공부를 하고 싶은 자는 반드시 다른 곳에서 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서원에서는 과거공부를 일체 해서는 안 된다고 금지하고 있다.

퇴계는소학,근사록,효경,대학,주자대전,심경을 교과목으로 삼았고, 율곡은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사기를 교과목으로 삼았다. 이처럼 서원의 교과목은 성리학 위주였다.

따라서 서원은 지역사회에서 성리학을 학습하는 공간, 지역 사림의 집결장소로서 공론을 생산하는 공간, 지방문화의 중심지, 제향 인물에 대한 정기적 의례의 장, 지역사회에 대한 지적·도덕적 통합의장 등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서원의 본래 기능인 교육보다 향사 기능이 강조됨에 따라 경제적으로 많은 특권을 남용하게 되고, 결국 국가경제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문화재청의 서원의 활성화 사업>

문화재청은 살아 숨 쉬는 향교·서원 만들기 사업을 추진하였고, 장성향교와 필암서원에서도 춘향제 1일 선비체험 등을 해오고 있다. 필암서원은 한걸음 더 나아가 청백리교육의 체험장, 선비학당 운영 등을 통해 서원의 현대적 활용에 나서고 있다.

문화재청이 살아 숨 쉬는 향교·서원 만들기 프로그램문화재 문턱은 낮게’, ‘프로그램 품격은 높게’, ‘국민 행복은 크게라는 전략으로 그 동안 잠자고 있는 문화재의 가치와 의미를 재발견하고 문화콘텐츠로 새롭게 창조하여 국민과 함께하는 살아 있는 역사교육장 및 프로그램형 문화재관광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추진되고 있다.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가 문화재를 보존중심에서 문화재 가치를 확산·활용하는 정책으로 전환

하고 있다. 아울러 여가문화의 확산과 삶의 질 향상으로 문화재를 향유하려는 수요층이 증가하는 추세에 있으며 관람중심에서 체험중심으로 국민들의 문화재 향유방식을 새롭게 전환해야할 필요성이 더욱 요구되고 있다.

이에 따라 서원이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여 재창조하고, 대표적인 역사교육·향토문화의 거점으로 확산하여 서원의 융·복합적 활용을 통한 사회·문화·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해 나가야 한다.

 

<서원의 현대적 교육>

서원은 성리학 교육을 위한 중등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서원이 유교교육의 공간을 넘어 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재조명받기 위해서는 유교와 관련된 프로그램만을 고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서원은 당대 지식인들의 교육공간이면서 동시에 고급문화를 선도했던 공론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서원 활성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초기단계에서부터 이러한 서원의 본래적 성격에 착안하여 새로운 문화적 수요를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현재 서원이 청소년들에게 교육공간으로서 활용되고 있는 측면은 대체로 ·

·예절교육한국 전통문화의 이해와 관련한 내용으로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전통과 현재를 매개하거나 교차시킬 수 있는 파격적인 기획 즉 유교의 음악과 미술, 서예와 다도 등에서 착안하여 오감으로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구상할 수 있다. 조선 선비들이 즐겨하던 시··화에 다도와 음악까지 융합한 기획도 가능할 것이다. 월봉서원이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문화의 중심은 사람이다. 따라서 지역 서원을 찾아오는 관람객의 호응도와 만족도가 매우 중요하다.

한편, 문화유산을 활용한 프로그램의 주요 성공요인 중 하나가 바로 홍보이다. 다양한 매체를 동원한 집중적인 홍보도 물론 중요하다. 그리고 지역사회와 긴밀하게 연계하여 서원문화유산을 좀 더 매력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의 서원문화유산 활용사업의 결과를 해당 지역주민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며 지역방송이나 지역신문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주민과 가까이 있는 월봉서원>

월봉서원은 1578년 기대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에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46(인조 24)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654(효종 5)월봉(月峯)’이라고 사액되었다.

월봉서원은 사계절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이 찾고 있다. 4월부터 11월까지 고봉다움 고봉다음이라는 프로그램은 고품격 인문워크숍으로 선비다움은 유생복을 입고, 탁본 투호 등의 놀이를 즐기며 철학자다움은 소리와 해설이 있는 철학자의 길을 걷는다.

공동체다움은 기업 등에서 자체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며 고봉다움은 치유의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콘서트, 차와 음악 등이며 나다움은 고봉의 자경설을 바탕으로 꾸미는 열린 라디오이다. 꼬마철학자 상상학교는 6세 이상의 자녀를 둔 가족이나 어린이 단체를 대상으로 호기심 가득한 어린이들이 던지는 물음에 함께 체험하고 의심을 풀어가는 프로그램이다.

매월 마지막 목요일 저녁에 열리는 살롱드월드는 고품격 인문 문화 교류 마당으로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며 함께 음악을 듣고, 주제가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이 밖에도 월봉로맨스, 선비의 하루 등 월봉서원에서는 현대인들이 거부감 없이 누구나 함께 할 수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필암서원의 콘텐츠 개발해야>

순창 훈몽재는 하서선생이 1548년부터 약 2년 간 처가인 점암촌에 머물며 초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1680년경 선생의 5대 손인 김시서가 인근에 자연당을 짓고 기거하며 훈몽재를 중건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나, 다시 퇴락하였다. 1820년경 선생의 후손들이 점암마을에 훈몽재를 중건하고,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 김시서, 정철, 이이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훈몽재가 중건되었으나, 1951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순창군과 하서선생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옛터에 훈몽재를 복원하였고, 한학·인성교육을 실시하는 유학전문교육반, 방학예절 교육반, 부모와 함께하는 12일 코스 단기체험교육반, 부녀자 교육반을 운영하고 있다.

필암서원은 광주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며 숙박과 교육이 가능한 현대적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젊은 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 프로그램이나 콘텐츠가 부족하다.

좋은 시설을 갖추고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청백리교육의 체험장은 장성군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고, 선비학당은 지역주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서선생이 성리학자일 뿐 아니라 도학자였다는 것에서 착안하면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힐링 프로그램도 운영할 수 있다. 명상과 마음 쉬기 등 지친 현대인들의 휴식처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선생의 자연가는 곡이 있는 가사이므로 국악을 통한 힐링 프로그램도 만들 수 있다.

필암서원과 백화정 그리고 난산정과 신도비를 순례하는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걷는 명상 프로그램도 가능하다.

필암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서선생의 거룩한 삶을 배워 실천하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다양한 콘텐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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