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군 항일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쫓아
장성군 항일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쫓아
  • 변동빈 기자
  • 승인 2019.01.29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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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1. 장성노동조합 농민조합 사건

 

<장성의 신간회>

1934년 장성군 김시중 외 9명이 대구복심법원(고등법원)에서 장성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결성하여 교양학습 및 소작료 투쟁 등을 하며 조선의 독립과 항일 감정을 조성한다고 하여 징역형 등을 선고받은 사건이 있다.

장성노동조합은 신간회 장성지회 임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집행위원장 김시중 외 나상운, 김인수, 남궁현, 김창한, 이수길, 기원흥, 기노춘, 송종근, 고형주 등이 1934년 대구 복심법원(고등법원)에서 징역 26월의 실형과 집행유예 형을 언도 받았다.

장성노동조합을 주도한 신간회 장성지회는 192712월에 결성되었다. 신간회는 19193·1운동이 실패한 후 평화적인 만세운동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민중들이 사회주의 사상과 접목하여 조직적인 급진적인 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부터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19220년대 초반 일본유학생에 의해 유입된 마르크스주의가 지식인들과 대중들로부터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고, 한반도에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조선공산당'19254월에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을 시작으로 많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 역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에 있어서의 방식, 그리고 기본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사고의 구조 등이 달랐기 때문에, 둘은 같은 목표를 향해 운동함에도 불구하고 다툼이 있었다.

그러다가 1926610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인산을 기해 일어난 학생중심의 민족 독립 만세운동을 계기로 민족주의 계열 중에서도 중도 좌파, 그리고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모여 19272월 신간회를 결성하였고, 장성지회는 그해 12월에 김시중, 송종근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것이다.

192914일 신간회 장성군지회 부회장 송종근이 출판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21일에는 김시중 등 5명이 장성지회에서 배포한 유인물로 금고 및 집행유예를 언도 받았다.

같은 해 113일 일어난 광주학생독립 시위는 시위를 주도한 성진회(1926년 결성)에 장성의 송종근, 김기주(징역1), 나승규(징역1), 김종선이 참여하였고, 광주고보, 광주농고, 사범학교 학생들이 결성하여 학생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독서회는 장성출신으로 송동식(징영2), 이영백징역1), 김병기(징역1), 김종기(징역1), 최달봉(집행유예), 박중진(집행유예)이 참여하였다.

또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위해 동맹휴업을 주도한 변진설(집행유예), 기희준(집행유예)와 시위에 참여해 퇴학을 당한 김천기, 김일중, 김관수 등이 있었다.

그런데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신간회의 주요 간부들이 대거 구속되었고, 그 해 김병로(街人)가 중앙집행위장에 선출되면서 사회주의 계열은 쇠퇴하고 민족주의 계열이 지도부를 형성하면서 지방 조직의 반발이 일어났다. 결국 19315월 신간회를 해체하기로 결정하였다.

 

<묻어버린 장성노동조합 농민조합 사건

- 장성군사에 단 한 줄의 내용도 기록 없어>

 

신간회 해체가 결정되자 신간회 장성지회장이었던 김시중은 장성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나상운은 장성농민조합 집행위원장, 김인수는 장성정미조합장이 되었다.

대구복심법원에 판결문에 의하면 김시중, 나상운, 송종근. 이영백, 김기주 등은 자본가와 지주의 착취가 없는 새로운 사회, 즉 사유재산제도를 부이노하는 공산주의 사회를 일으킬 생각으로 협동조합, 정미조합, 농민조합 등을 결성하여 노동자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고 결속을 공고히 하며 한결같이 총독정치를 저주하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게 되었다고 판시하였다.

김시중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일본제국의 자본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국채를 변혁시킬 목적으로 합법적인 장성협동조합을 만들어 장성에 사는 일본인 상인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물품을 판매하여 지방에서의 상권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인도에서 간디가 영국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레를 돌리며 자국의 물산을 소비하려는 운동을 펼쳤던 것과 같이 김시중은 정치적 독립과 함께 자본의 독립이 절실함을 깨달은 것이다.

나상운은 삼서농민조합 집행위원장과 장성농민조합집행위원장을 하며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며 지주제를 철폐하고 소작농들에게 공산주의 계급을 전파하였다. 하지만 그 역시 궁극의 목적은 조선의 독립이었다.

김인수는 장성정미조합조합장이었다. 신간회 간사를 역임한 그는 1930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처해져 형기를 마친 뒤 노동자의 의식화에 앞장섰다. 김인수 역시 그가 이루고자하는 꿈은 조선의 독립이었고, 일본은 그들에게 치안유지법 위반을 적용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일본 법원의 판결문에는 피고인들 대부분이 조선의 독립과 공산화를 목적으로 그 목적의 실행에 관여하였다고 하였고 피고인 나상운, 김인수가 소화6(1931)장성역전 조일여관에서 피고인 송종근의 권유에 의해 장성협동조합이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결성한다는 사정을 알면서도 이에 가입하였다고 판시하는 등 실형을 받은 이들의 죄는 결국 조선의 독립을 꾀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장성의 농민조합, 정미조합, 협동조합을 주도했던 10명이 옥고를 치루었음에도 불구하고 2001년도에 발간한 장성군사에는 이 사건에 대해 단 한 줄의 내용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당시 편찬위원들이 위 사건의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이 사건을 묻어버린 것이라는 의혹을 떨칠 수가 없다. 이들이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주의를 찬양했으며 특히 이 사건을 주도했던 김시중이 6.25 당시 행방불명(월북으로 추정)되었다는 이유다.

<황룡장이 굴비시장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황룡장은 언제부턴가 굴비시장으로 꽤나 알려진 시장이다. 바다를 접하지 않은 황룡장이 어떻게 전국에 굴비시장으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지금은 법성포가 굴비시장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한때 황룡장은 굴비도매의 거점이었다.

소화 8년 김창한과 남궁현은 법성포의 석수어(조기)를 기계로 건조하여 이를 전국적으로 판매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구원하는데 사용하기로 결의하였다.

남궁현은 영광출신으로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외일보 법성포 기자를 지냈다. 조선청년동맹 전남도연맹 집행위원, 신간회 영광지회 조직부위원 등을 지냈으며 1931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징역 26월을 선고받아 실형을 살았다.

형기를 마친 남궁현은 1933116일 전북 남원에 있는 김창한의 집을 찾아가 위와 같은 뜻을 논의하고 석수어 기계건조사업을 경영하여 순조롭게 발전한다면 1년에 약 1천원(현시가 15억원)의 순이익윽 얻을 수 있고, 이 것을 독립운동 희생자의 구원에 충당하자고 하였다.

따라서 남궁현과 김창한이 영광과 남원 사람인데도 장성협동조합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은 단서가 여기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들은 김시중이 주도한 장성협동조합을 통해 황룡장을 거점으로 굴비를 팔았던 것이다.

 

<월평초등학교 설립자이기도 한 김시중>

 

황룡면 월평리에 일제 시대에 지은 집이 한 채 남아 있다. 한옥과 일본식 집이 결합된 이국적인 이 집은 예사롭지 않은 당당함과 누가 봐도 부잣집이라는 느낌을 들게 한다.

지금은 장씨 집안이 소유하고 있지만 원래 주인은 월평초등학교 설립자인 김시중이 살았던 곳이다. 김시중은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성장하였고 1920년 사립월평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2311일자 동아일보에 사립월평보통학교가 226부터 28일까지 교장 김시중과 교원(교사) 김복수의 인솔로 졸업생도 17명을 인솔하여 목포항을 견학하고 무사히 귀향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대구복심법원의 판결문에 의하면 김시중은 “19243월부터 19273월까지 전라남도 민선평의원이 되어 도정에 자문하면서 조선총독정치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192712월부터 1931년까지 신간회 장성지회장과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고 판시되어 있다. 19315월 신간회가 해체되자 송종군과 함께 장성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일본에게 빼앗긴 상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위 김시중의 판결문에 전라남도 민선평의원이 되어 지방비 예산을 보고 전남도의 정치는 대개 일본인을 위한 정치로 대중인 조선인에게는 조금의 시설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결같이 총독정치를 저주하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게 되었다장성협동조합의 설립목적은 사회의 변화와 조선의 독립이었다고 하였다.

김시중은 해방 후 전남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6.25 이후에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독립운동가이며 항일학생결사대인 무등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옥중에서 순국한 기환도 선생과는 같은 마을에서 자랐다.

하지만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인 김시중 선생의 행적은 신간회 장성지회장을 역임하였다는 간단한 기술 외에는 찾아 볼 길이 없어 안타까운 일이다.

 

<장성의 사상가 송종근 그리고 나상운 등>

송종근은 서삼면 해평마을에서 구한말 성균관 박사(교수)였던 송영순의 손자이며 대구세무서장을 지낸 송규락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평마을은 원래 하평이라고 불러왔는데 그의 조부인 송영순의 사랑채에 당시 군수였던 김성규가 [해동거사]라는 액자를 써 붙인 후 해평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4세 때 만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 선생을 만나 조선독립사상을 품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7년 동안 석주 선생의 곁에 머물렀다. 석주선생은 독립투사를 양성하던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31세 때에 조선으로 돌아와 신간회 장성지회 부회장이 되면서 회장이던 김시중과 함께 장성의 장성노동조합 농민조합 사건의 핵심 주역이 되었다.

나상운은 삼서면에서 태어나 1926년 청년총동맹 장성청년연맹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이 되고, 삼서농민조합 집행위원장, 장성농민조합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신간회 장성지회 간사를 역임하고 1929년 조선총동맹 전남연맹위원장이 되었다.

1931년 광주학생 독립운동에 관련되어 대구 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언도 받아 형기를 마쳤다. 193111월 경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함께 처벌을 받은 김기주, 이영백 등과 함께 장성노동조합, 장성정미조합의 노동자들을 의식화하여 조선의 독립과 사회체계의 변혁을 주도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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