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호태왕)비를 찾다'
'광개토대왕(호태왕)비를 찾다'
  • 변동빈 기자
  • 승인 2017.07.03 13:22
  • 호수 6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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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둥에서 지안(集安)까지 네 시간이 걸렸다. 지안까지 가는 길은 험준한 산길과 구불구불한 시골 길을 지나야 하는데 교통사고의 위험이 높아 밤에는 통행을 막는다고 한다. 수년 전에도 버스가 전복되어 많은 인명사고가 난 곳이다.

지안으로 가는 길에 쑹화강(松花江)을 건넜다. 쑹화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무려 1900km를 이어가는 헤이룽강(흑룡강)의 최대 지류다. 쑹화강 주변의 넓은 농지에는 주로 옥수수가 심어져 있었는데 구릉지대에는 인삼을 재배하는 곳도 적지 않았다.

지안은 자강도 만포시와 인접한 도시로 인구 22만 명의 작은 도시다. 만포시는 만포공업대학과 만포광산기계공업대학을 비롯한 학교가 있을 정도로 광산업 등이 발달된 곳이다.

지안을 가는 길에 압록강 상류 너머로 산 중턱에 높은 굴뚝이 있어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구리를 녹이는 공장의 굴뚝이라고 했다. 지안시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어서 우리에게는 소중한 문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서기 3년 고구려는 졸본성(오녀산성, 현재의 환인시)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서기 427년 평양성으로 옮기기까지 425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던 지안은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해 광개토대왕릉, 장수왕릉, 오녀산성, 국내성곽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광개토대왕(호태왕)비는 사면석으로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높이가 6.39m로 한국 최대의 크기로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로 불규칙하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 처음엔 비석만 있었으나, 1982년 중국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비석의 훼손을 막기 위해 탁본은 물론 비각 내에서는 사진조차도 찍지 못하게 막고 있다.

고구려의 기상과 용맹함이

광개토대왕비에서 200여 미터 거리에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봉분이 있는데 봉분의 상단 부분에 돌로 만든 널받침 두개가 있다. 그런데 좁은 널받침이 나란히 있어서 물었더니 광개토대왕 첩의 널받침이라고 한다.

고구려가 순장제를 폐지한 것은 안장왕 때였으니까 광개토대왕이 타계한 412년에는 순장제가 남아있었고, 첩은 왕이 죽자 함께 묻혔던 것으로 짐작된다.

왕이나 귀족이 죽으면 첩이나 종을 함께 묻었던 순장제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한 때 유행했던 풍속으로 조선시대에 와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서 죽는 것을 열녀라고 칭송하여 강제로 열녀를 만드는 일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장수왕릉 옆에는 작은 돌무덤이 있는데 이를 두고, 장수왕 장모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한편에서는 장수왕 애첩의 무덤이라고 추정하는 설도 있다. 이 무덤 또한 장수왕이 죽고 첩을 순장한 무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개토대왕릉에서 2km 거리에 장수왕릉이 있다. 흙과 자연석으로 쌓은 광개토대왕릉에 비해 장수왕릉은 화강암 표면을 정성들여 가공한 돌을 7단의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는데, 기단의 한 변 길이가 33m, 높이는 약 13m 이다. 기단의 둘레에는 너비 4m로 돌을 깔았으며, 그 바깥둘레에 너비 30m의 작은 돌을 깔아 능의 구역을 표시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의 무덤이 흙과 자연석으로 쌓아져 있고, 규모도 장수왕릉에 비해 작은 편인데 비해 장수왕릉은 웅장하고 화강석으로 잘 다듬어져 쌓았다.

더구나 장수왕릉의 위치가 광개토대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어 아들인 장수왕릉을 아버지인 광개토대왕릉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만들었을지 의심이 갔다.

오녀산성과 주몽

오녀산성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워 처음 도읍으로 삼은 곳이라고 전한다. 오녀산성의 원래 이름은 홀승골성으로 산의 북쪽과 동쪽에 연결되어 있는 높고 낮은 여러 산봉우리 가운데서 가장 높고 험한 800m의 산마루를 중심으로 그 둘레에 축조되어 있다.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수도인 지안과 서쪽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대에 위치하였고, 약 40년 동안 고구려의 도읍이 되었다.

환인시에는 오녀산성 박물관이 건립되어있는데 오녀산성에서 출토된 유물 등과 고구려의 역사 등을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최악은 안내원의 불성실하고, 우리가 방문한 유적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일행을 관광상품 가게나 일정에 없는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커미션을 챙길 궁리만 했다.

1인당 2만원이면 무한으로 제공되는 방목 소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거의 열 번 이상 버스 안에서 얘기를 해서 찾아간 곳은 거의 최하품 소고기였다. 중국 동포 2세(조선족)인 그는 최근 한국의 사드배치 때문에 한국 관광객이 거의 찾아오지 않아서 굶어 죽을 지경이라며 우리에게 완전 덤터기를 씌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령이 150년 이상인 편백나무로 만들었다는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는데 그건 편백나무가 아닌 상수리나무과로 만든 제품이었다.

오녀산성 박물관에서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三足烏)도 모른가 하면 왜 오녀산이라고 불렀느냐고 묻는 말에 그의 대답은 “네이버에 물어보세요. 거기 들어가면 다 나와요”였다.

유적지에서 중국어 안내판을 보고 일행들에게 더듬더듬 설명을 해주었더니 다음부터는 궁금한 것을 안내원(가이드)에게 묻지 않고, 필자에게 물어서 가이드 팁을 달라고 했더니 모두들 배꼽을 잡고 웃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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