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눈 오는 날의 동화
[기고]눈 오는 날의 동화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14.12.18 13:19
  • 호수 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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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틈 시인

아침부터 눈이 온다. 함박눈이다. 오후에 들어서자 온 나라가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퐁테뉴의 다리를 하얀 천으로 감싼 설치미술가 크리스토가 해 놓은 작품처럼 지붕, 마당, 울타리, 길, 들판, 산...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이란 죄다 하얀 눈으로 된 시트로 감싸여 있다.

세상에! 이런 기적 같은 일이라니. 나는 마음이 동요하고 있음을 느낀다. 뭐랄까, 내 마음 속에 함께 살고 있는 어린 소년이 자꾸만 나를 눈에 덮여 있는 세상을 보러 가자고 조른다.

나는 옷을 단단히 입고 밖으로 나간다. 발목까지 눈에 빠진다. 걸을 때마다 눈 위에 발자국이 난다.

흡사 히말라야에 산다는 설인이 지나간 발자국처럼 눈에 깊이 구덩이를 만들면서 발자국이 이어진다. 나는 북쪽으로 발걸음을 움직인다. 문득 오래 나뉘어 있던 이 땅이 눈에 덮여 한 나라가 되었다는 실감이 든다.

눈은 광주를 덮고, 서울을 덮고, 휴전선을 덮고, 평양을 덮고, 중강진, 개마고원을 덮었다. 그러니 남북이 온통 눈으로 덮여 그 어디에도 갈라진 곳을 표시한 팻말이나 철조망이 안보인다. 펑펑 함박눈이 종일 내려서 통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눈으로 하나 된 땅에 눈길을 내며 북쪽으로 한없이 걸어간다. 어디가 휴전선인지 알지도 못하겠고, 또 내 갈 길을 막을 사람도 없다. 혹여 총을 메고 바깥에 나온 병사들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사는 소년이 나를 걸어가게 내버려둘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걷고 또 걷는다. 평양을 거쳐 백두산까지 이 눈길로 갈 참이다. 나는 눈 위로 걷고 있으므로 남쪽이나 북쪽이나 땅은 딛지 않는다. 그러니까 함부로 왜 우리 땅에 들어왔느냐고 할 일도 없을 터다. 참,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눈은 그 몹쓸 놈의 이념도 덮어버렸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소년이 살아 있다면 소년은 이념을 모르기 때문이다. 온 땅이 눈에 덮인 날 어느 누가 이념타령을 하고 있으랴. 뭣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념 같은 것은 통일된 오늘은 어울리지 않는다.

한반도 지도를 꺼내놓고 본다. 눈에 덮여서 군계도, 도계도 아무 것도 안보인다. 보이는 것이라곤 눈에 파묻혀 있는 한반도의 모습이다. 오늘 지도는 아무 쓸모가 없다.

집을 나설 때 원래 생각은 눈뭉치를 굴리면서 북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눈덩이가 점점 커지면서 가는 곳마다 마을에서 아이들이 몰려나와 함께 눈을 굴려가노라면 평양쯤 가 있을 땐 눈뭉치가 엄청나게 커져 있을 것이다. 거기서는 북쪽 아이들도 몰려 나와서 그들도 함께 남북의 아이들이 눈덩이를 굴려 백두산까지 굴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있어야 한다. 부모들이 엄청나게 눈이 온 날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춥다고, 위험하다고, 불안하다면서. 그러니 내 마음 속 소년의 손을 잡고 걸어갈 수밖에 없다.

지금 어디쯤 왔는지 모르겠다. 사람을 만나서 말씨를 들어보면 대강 어디쯤인지 알겠는데 사람들이 안보인다. 눈에 덮여서 눈 속에 굴을 뚫어놓고 거기서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대체로 땅을 딛지 않으면 큰 일 나는 줄로 안다.

나는 쉼없이 걷는다. 통일된 땅을 걷기 때문에 전혀 피곤하지도 않다. 그러기는커녕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마치 지금 막 창조된 설국을 걷는 듯한 기분이다. 그 감격으로 가슴이 벌렁댄다.

이렇게 하얀 눈으로 한반도가 덮인 날만큼은 통일의 날로 정하고 남북의 주민들이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면 안될까. 눈이여! 저기 북중 국경선도 지우고, 저기 한러 국경선도 지우라. 온 세계를 눈으로 덮으라. 오늘은 고요한 날, 거룩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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