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양 손에 받아들인 낙엽
[기고]양 손에 받아들인 낙엽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14.11.27 12:22
  • 호수 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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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틈 시인

새벽에 잠이 깨어 일어났다. 방안이 어둑신해서 커튼을 젖히고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희부연 새벽빛이 밝아오고 있다. 땅은 간밤에 비가 내린 모양이어서 물기로 번들거리고 있다.

나는 밤에 비가 내리는 줄도 모르고 쿨쿨 잤던 모양이다. 빗물로 번들거리는 땅바닥에는 낙엽들이 비에 젖은 채 흩어져 있다.

바깥 풍경은 볼수록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가을비에 젖은 새벽 풍경에는 어떤 간절함 같은 것이, 뼈저린 고독 같은 것이 스며 있다. 가을비에 젖어 있는 바깥 풍경을 때꾼해진 눈으로 한참 바라보다가 나는 커튼을 닫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잠을 청해보려 하지만 금방 본 바깥 풍경이 막 인화된 사진처럼 내 눈에 밟혀 잠은 창밖으로 달아나버리고 이런저런 상념들이 물거품처럼 떠오른다.

밤새 늦은 가을비가 내리고, 가을비에 낙엽들이 지고, 풍경은 비에 젖어 떨고 있고, 나는 그것도 모른 채 문틈으로 찬 기운이 들락거리는 방에서 발을 오그린 채 잠이 들었고, 이것은 아무래도 서러운 일이다. 무엇이 서러운지는 모르겠으나 밤중에 내린 가을비 탓이려니 싶다.

나는 어제 집 근처 공원길을 걸으면서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회양목, 플라타너스 낙엽들이 바람이 한번 불 때마다 공중에 파문을 일으키며 우수수 지는 것을 동영상을 보듯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문득 내가 그 낙엽들을 두 손으로 받아주고 싶은 소년 같은 감정에 몸을 떨었다. 세상의 모든 낙엽들을 받아주고 싶은. 아마도 어릴 적 내 뇌리에 사무쳤던 시인 릴케의 시가 새겨준 감상 같은 것이 떠올라서였는지도 모른다.

잎이 진다. 멀리에 선 듯 잎이 진다./하늘의 먼 정원이 시들어 가는 듯/거부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그리고 깊은 밤중에 무거운 지구가 고독에 잠긴다./다른 모든 별들에게서 벗어나.//우리들 모두가 떨어진다. 이 손이 떨어진다./보라. 다른 것들을. 모두가 떨어진다.//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있어, 이들 낙하를/한없이 너그러이 그의 양 손에다 받아들인다.(가을)

내가 늘 주장하듯 가을은 일 년의 마지막 계절이다. 그것은 곧 한 해의 대단원이다. 생명 있는 것들에게 가을은 이루고 맺고 마감하는 끝을 의미하기도 한다. 릴케가 노래한 것도 결국은 낙하를 받아들이는 생명의 끝, 곧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나는 동이 트기를 기다려 옷을 두껍게 입고 바깥으로 나가서 가을비가 칠해 놓은 풍경을 눈으로 거두어들이다가 뜨락 한 켠에 무리지어 피어 있는 국화들을 발견했다. 이 차갑고 비 내리는 가을밤을 젖히고 하얀 국화가 은은한 향기를 내뿜으며 피어 있다.

벌과 나비, 따스한 태양의 계절도 아득히 지나가버린 이 차갑고 쓸쓸한 가을에 국화꽃들은 어인 일로 뒤늦게 피어났을까. 고고한 자태가 무슨 암시를 하는 것만 같다.

“자연은 인간이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 신비에 그저 찬탄할 대상일 따름이다”라고 나는 말한다. 몸을 떨며 집안으로 들어오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내가 자기 옆자리에 앉아보라 한다. 그리고는 말없이 뒷 베란다 창문을 가리킨다.

단풍나무 빨갛게 물든 잎새들이 낙하하는 모습이 창문틀로 한 폭의 그림처럼 조용히 내다보였다. ‘하늘의 먼 정원’에서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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