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를 가다
DMZ를 가다
  • 변동빈 기자
  • 승인 2009.09.08 16:25
  • 호수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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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의 꿈

[고려사]에 기록된 궁예는 “폭정과 괴벽, 애꾸눈의 장애인 그리고 아내와 자식마저 죽인 포악한 중”으로 전하고 있다. 궁예의 성은 김씨다. 신라의 몰락한 진골귀족의 후예로,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891년(진성여왕 5)에 죽주(지금의 안성)의 산적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가 892년에 북원(北原)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 898년에 양길을 타도하고 송악(松岳,개성)을 근거로 자립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고, 다시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개칭하고, 905년에 도읍을 철원(鐵圓)으로 옮겼다. 911년에 국호를 다시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고려왕조의 사람이었고, 고려의 개국에 명분을 찾기 위해서는 궁예에 대한 기록이 다분히 왜곡되고, 편파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를 통치할 수 있었던 에너지는 궁예가 신라로부터 백제와 고구려를 잇는 대장정이었을 것이다.
궁예는 14년 동안 태봉을 다스렸다. 궁예가 마지막으로 도읍을 삼았던 철원의 DMZ 안에는 그가 쌓았던 도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철원군지에 의하면 직사각형의 궁예도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외성의 둘레는 4,370m, 내성의 둘레는 577m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만든 조선보물고적조사 자료에 의하면 외성의 둘레가 10,908m로 기록되어 있어 아직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궁예가 송도를 버리고, 도읍으로 삼은 철원은 한반도의 중심이며 오리산(458m)에서 분출한 현무암이 철원을 중심으로 약 650 km2의 큰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용암이 긴 현무암 계곡을 이루는 한탄강(漢灘江)을 만들고 있다. 
철원평야를 차지하기 위해 6`25 때 그 치열했던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졌고, 휴전을 앞두고 9일 동안 12차례의 고지 탈환 공방전이 일어났으며 중공군은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낸 곳이기도 하다. 김일성이 철원평야를 빼앗기고 몇 일 동안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 곳이다.

궁예가 미륵신앙을 신봉한 까닭은?

궁예가 신라의 몰락한 귀족 또는 왕족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궁예는 신라의 왕족과 귀족에 대한 반감이 컸을 것이다. 신라의 통치 철학은 불교였고, 당시 신라불교는 화엄사상으로 유명한 원효, 율종의 자장, 그리고 화엄종의 의상, 원축 등 법상종(法相宗), 열반종(涅槃宗), 율종(律宗), 법성종(法性宗), 화엄종(華嚴宗)의 5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때의 고승들은 왕실의 존경과 비호를 받으며 귀족불교가 되었고, 원효와 의상 등을 대표로 교학적으로 매우 발전하는 시기였다. 신라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676년)하고 난 다음 불교 번영을 위한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해 나갔으며 특히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다. 또한 고승, 명승이 많이 배출되었고 그들은 당나라와 인도에 유학하여 선진문물을 수입해 왔으며 지배층의 적극적인 장려에 힘입어 불교가 크게 융성함으로써 대규모 사찰 건립과 5교9산의 확립 등 그 발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궁예는 신라 불교에 대한 반감이 클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항하는 불교 신앙으로 미륵신앙을 선택하게 되었다. 당시 미륵신앙을 널리 유포시킨 인물은 금강산 발연사(鉢淵寺)에 주석했던 진표율사였다. 그런데 진표율사의 비문 등을 보면 그가 백제의 유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제만경(金堤萬頃)뜰로 불리는 옛 백제 지역 중 제일 넓은 평야지대에서 출생한 진표율사는 ‘진표전간’에서 그 아버지의 이름이 진내말(眞乃末)이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성씨가 진(眞)씨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에 망하여 그 지배 아래 들어간 백제 유민들은 깊은 절망감에 빠져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고, 비록 세속을 떠났다고 하지만 진표율사는 그들의 고통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삶의 희망과 위안을 주기 위해 진표는 미륵신앙을 널리 퍼뜨리게 되었다고 짐작한다.
말세를 구제하기 위해 미륵불이 이 세상으로 내려온다고 믿는 미륵신앙은 절망감에 빠진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이며 돌파구였다. 궁예는 마치 예수가 귀족화된 유대교에 맞서 스스로 왕을 자처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백성들을 모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궁예가 군사를 모아 왕이 되기 전에 진표율사가 머물다 입적한 금강산 발연사(鉢淵寺)에 찾아간 것은 너무나 당연했는지 모른다.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 개벽을 꿈꾸었을 것이다.

철원 사람들에게 궁예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무지렁이 백성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철원 땅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는 명성산성으로 들어가 군대를 해산하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며 홀로 북쪽으로 떠났다고 한다. 명성산성이 울음산성, 울음산이 된 것은 바로 그 이유다. 이 때 충성스런 부하들이 왕을 따라 군탄리 한탄강 변에 이르렀을 때 궁예는 “나를 따르지 마라. 나를 따르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했다. 군사들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군사들이 슬피 운 이곳을 군탄(軍灘)리라고 부르게 된 까닭이다.
왕건의 군사가 계속해서 공격해오고, 저항할 힘마저 빠져 나갈 때 궁예는 “돌에 좀이 슬기 전에는 내가 망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갑자기 돌에서 좀이 슬듯 구멍이 났다고 한다.
그는 “까마귀 머리가 하얗게 세면 내가 망할까 나는 망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머리가 하얗게 센 까마귀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철원에는 현무암 덩어리가 구멍이 많고, 머리가 하얀 까마귀는 바다에서 날아온 갈가마귀였을 것이다.
궁예는 이미 군사적으로 대항할 힘도, 하늘의 보살핌도 잃어버린 상황에서 태봉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철원의 노인들은 아직도 궁예를 궁예대왕이라고 부른다. 궁예를 따르던 백성들이 자손을 낳고, 그 자손이 또 자손을 낳아 1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에게 궁예는 포악한 군주가 아닌 새 세상을 열어줄 희망이었고, 꿈이었던 것이다.
궁예가 군사들에게 “나를 따르지 마라”고 했던 군탄리 육군 제5군단 비행장에서 1963년 육군대장 박정희가 “다시는 이 나라에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며 “후배들은 나를 따르지마라”고 했다. 그곳에 박정희의 어록을 새긴 기념비가 있었는데 1980년 어느 날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면서 이 기념비는 누군가에 의해 철거되고, “무인으로 한정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하는 문구로 바뀌었다.

철원의 노동당사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에 있는 노동당사는 1946년 초 북한 땅이었을 때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1,850㎡의 면적에 지상 3층의 무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현재 1층은 각방 구조가 남아 있으나, 2층은 3층이 내려앉는 바람에 허물어져 골조만 남아 있다.
6·25전쟁의 참화로 검게 그을린 3층 건물의 앞뒤엔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으로 1개 리(里)당 쌀 200가마씩 거두었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강제 모금과 노동력 동원을 하였다고 한다.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공산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 와서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였다고 전한다.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곳에 거대한 노동당사를 지은 것은 노동당사 바로 맞은편에 일제가 지은 신사(神祠)가 있었기 때문이다. 탱크를 몰던 미군 병사가 갑자기 노동당사를 향해 돌진하더니 거침없이 포탄을 쏘아댔고, 노동당사는 벌집처럼 총알자국이 난 곳에 다시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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