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비무장지대)에 묻힌 역사
DMZ(비무장지대)에 묻힌 역사
  • 변동빈 기자
  • 승인 2009.09.03 19:39
  • 호수 29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DMZ(비무장지대)는 생태환경의 보고, 적막과 고요만이 있는 조용한 땅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먹이사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기형의 생태계, 고구려와 후백제 등의 문화 유적지가 묻혀 있는 DMZ와 민통선 지역은 우리에게 다가올 통일 조국의 숙제를 던져 주었다.
겨울이면 수많은 철새가 날아오고, 고라니와 멧돼지 그리고 산양이 서식하고 있는 이곳엔 사람과 동물의 목숨을 노리는 백만 개 이상의 지뢰가 묻혀 있기도 한다. DMZ를 찾아서 여행하듯 떠났지만 그곳에서 느낀 감상은 한두 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비탄 그리고 희망이었다.
한국언론재단과 지역신문발전위원회가 주관한 DMZ 기획취재는 비무장지대가 아닌 한반도의 평화공원으로 탈바꿈할 날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수천 년의 역사를 안고 흐르는 한탄강>
한탄강은 이북 땅인 강원도 평강군에서 발원하여 김화군을 지나 이남의 철원, 포천, 연천(漣川)을 지나 연천군 미산면(嵋山面)·전곡읍(全谷邑)의 경계에서 임진강(臨津江)으로 흘러든다. 철원군 지역의 화산폭발로 형성된 추가령 구조곡의 좁고 긴 골짜기를 지나는데, 유역에는 절벽과 협곡이 발달하여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남대천(南大川), 영평천(永平川), 차탄천(車灘川) 등의 지류가 있으며, 하류인 전곡 부근은 6·25전쟁 때의 격전지다.
한탄강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접전지였으며 전곡리는 30만년 전 두발로 서는 석기시대의 인류가 한반도에 생존해 있었다는 걳을 증명하는 주먹도끼 등의 유물이 5천여 점이나 출토된 곳이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의 돌도끼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미군 병사 그렉 보웬으로 1978년 한탄강에 놀러왔다가 우연히 4점의 석기를 발견하여 서울대 김원룡 교수에게 알리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후 발굴 작업을 통해 주먹도끼, 사냥돌, 주먹찌르개, 긁개, 홍날, 찌르개 등 다양한 종류의 석기를 5천여 점이나 발견하여 대부분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 중에 유럽과 아프리카 지방의 아슐리안 석기 형태를 갖춘 주먹도끼와 박편도끼가 동북아시아에서 처음 발견되기도 했다.

<그 곳에선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DMZ>
1953년 7월27일 UN군사령부 윌리엄 헤리슨 중장과 북한의 남일 장군이 휴전에 서명하면서 DMZ라는 전쟁 사생아가 태어나게 되었다. 남북은 휴전을 중심으로 남북이 각 2km의 비무장지대 곧 DMZ를 두기로 했다.
하지만 비무장지대가 지뢰 밭, 중무장지대로 변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비무장지대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민정경찰]이라고 쓰인 모자와 군복을 착용하고 있다. 남북이 행정과 구제 등을 위해 군인과 경찰을 1천 명 이상 초과하지 못한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비무장지대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실제로는 군인이지만 형식상으로는 민간인을 통제하기 위한 경찰인 셈이다.
DMZ가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는 자연생태계의 보고(寶庫)라는 선입견은 잘못된 것이었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주시하기 위해 남북은 수시로 DMZ에 불을 피워 40%에 달하는 나무와 풀을 태워버렸고, 이 숲속에 사는 동물과 새들마저도 보금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1968년부터 2년 동안은 에이전트 오렌지 등 고엽제(枯葉劑)를 살포하였다.
DMZ와 민통선 안에는 1백만 개 이상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한 개수는 알 수 없다. 물론 남쪽 지역만을 계산한 것이니 남북을 합한다면 그 수는 배가 넘을 것이다. 땅 속에 매설되어 있는 지뢰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홍수에 떠밀려 강을 타고 내려와 임진강과 한탄강으로 둥지를 옮긴 뒤 민간인의 발목을 삼키기 위해 웅크리고 있다.
정부와 군 당국은 지뢰 사고에 대해 쉬쉬하고 있지만 지금가지 지뢰로 인한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자가 약 3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북을 가로 지르고 있는 철책선은 그저 남과 북의 경계를 이루고, 출입을 통제하는 역할에 불과하다. 통일이 되어 철책선을 허무는 시간은 불과 몇 주면 가능하다. 그러나 DMZ에 매설되어 있는 지뢰는 제거하는데 수 년 이상이 필요하고 그 비용도 수천 억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뢰 하나를 매설하는데 5달러(6천원)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런데 지뢰를 제거하는 비용은 5백달러(60만원)에서 1천 달러(백이십만원) 이상이 필요하다. 지뢰라는 요물은 땅에 묻히는 순간 자신의 몸값을 1백배 이상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
연천군 장남면 능의 주변은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민통선 내 구역이다. 능으로 가는 길 옆은 지뢰라고 쓰인 푯말과 함께 철조망이 쳐 있다. 이곳에 천년 사직을 통째로 고려 왕조에 바친 신라 56대 경순왕의 무덤이 있다. 신라는 망했지만 경순왕의 후손들은 고려조에서 더욱 번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순왕이 재임하고 있을 때 신라는 이미 후백제의 침탈로 국가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있었고, 경순왕은 후백제와 고려 왕건 가운데 고려를 선택한 것이다. 그가 왕건에게 신라를 바치고 30여 년의 세월을 더 살며 많은 자식을 낳았다. 경순왕이 개성에서 죽자 신라유민들은 경주로 장지를 잡았지만 고려 왕실은 경순왕의 죽음으로 신라의 부흥 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왕의 운구는 1백리를 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경순왕의 무덤은 개성에서 80리 거리에 있는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그의 무덤을 잃어버렸다가 ‘신라경순왕지능’(新羅敬順王之陵)이라는 비석을 찾아내어 다시 왕릉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은 비석 곳곳에 선명한 총알자국을 남겼고, 경순왕의 슬픈 운명처럼 비감(悲感)하게 했다.
철원군에 고석정으로 가는 초입에 승일교(昇日橋)라는 낡은 다리가 하나 있다. 다리의 상태는 낡았지만 주변 풍광과 잘 어우러지는 아치형이다. 6·25전 북한 측에서 공사를 시작했으나 6·25 이후 우리 공병대가 완공해 개통한 ‘남북합작’ 다리다. 이름을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북한의 김일성 이름에서 각각 하나씩 따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한국전 당시 장렬하게 전사한 박승일(朴昇日) 연대장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도 전한다.
이름의 유래야 어떻든 갈라진 조국, 한반도의 동강난 허리에서 남과 북이 이어서 만든 승일교는 깊은 감회를 주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전라남도 장성군 영천로 168 3층
  • 대표전화 : 061-392-2041~2042
  • 팩스 : 061-392-2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변동빈
  • 법인명 : (주)주간장성군민신문사
  • 제호 : 장성군민신문
  • 등록번호 : 전남 다 00184
  • 등록일 : 2003-07-04
  • 발행일 : 2003-08-15
  • 발행인 : 류이경
  • 편집인 : 변동빈
  • 장성군민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성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snews1@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