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 조선에 벼슬하지 않겠다.
이씨 조선에 벼슬하지 않겠다.
  • 변동빈 기자
  • 승인 2009.06.11 09:27
  • 호수 28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절의와 강직, 선비 정신의 가풍

장흥고씨

<고씨의 탄생>
고씨의 시조는 제주(탐라)에서 비롯되었다. 제주는 고(高). 양(良), 부(夫) 三姓이 토착 지배성씨로 제주의 개벽설화와 三姓神話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설화에 의하면 “태초에 사람이 없었는데 한라산 북쪽 기슭에서 세 분의 神人이 솟아나왔으며 이곳을 삼성혈(三姓穴) 또는 모흥혈(毛興穴)이라고 한다. 이들의 이름은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로 성씨는 다르지만 이름은 을나로 통일되어 있다. 하지만 이두(吏讀) 표기를 감안할 때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의 합성어로 높은이, 어진이, 밝은이라는 뜻이다.
세 분의 神人이 사냥을 할 때 바닷가에서 떠밀려온 커다란 함속에 세 분의 공주가 나타나 이들을 맞아 각자 짝을 맺어 활을 쏘아 살 곳을 정했는데 고을나는 제주(濟州), 양을나는 대정(大靜), 부을나는 정의(旌義)로 거주지를 삼았다. 제주도의 중심지가 제주라는 점으로 보아 세 성씨 가운데 고씨가 맏형이었거나 지배 성씨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세 高乙那王으로부터 45세인 자견왕(自堅王)에 이르기까지 고씨는 제주의 이름을 탐라(耽羅)로 하고, 제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들은 신라와 백제,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국가로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교역을 하기도 했다.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뒤 탐라를 강제로 예속하여 태자인 말로(末老)를 고려의 조정에 들어가게 하였고, 제주는 나라가 아닌 고려의 속국이 되었으나 자치권을 인정하며 성주를 세습하게 하였다. 

<고씨의 중시조>
1세 성주공(星主公)은 탐라국의 시조 고을나왕의 46세손으로 고자견왕의 태자로 휘는 말로(末老)이다. 정제군(定濟君)에 봉했으며 탐라국의 제1대 성주가 되어 자치국인 탐라를 다스렸다. 제주(탐라)고씨의 중시조가 된다.
2세 문하시중 휘 유(維)는 성주공(星主公)의 장자로 고려 현종(顯宗) 때 문헌공(文憲公) 최충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정종(靖宗) 11년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제주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문하시중(국무총리)가 되었다.
3세 문경공(文敬公) 휘 조기(兆基,1088~1157)는 약관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일 때 공의 성품이 강직하여 비록 윗사람이라고 할지라고 잘못이 있으면 주저 없이 간(諫)했다. 인종(仁宗) 때 시국의 폐단을 상소하여 벼슬이 좌천되기도 했으나 결코 권세에 야합하지 않았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장관)를 지냈으며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뛰어나 세권의 시집을 남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여섯 수만 전한다.
(珍島江亭)
行盡林中路(행진임중로) : 숲길을 헤쳐 지나오니
時回浦口船(시회포구선) : 마침 배도 포구로 돌아오누나
水環千里地(수환천리지) : 물은 천리 땅을 돌아 있고
山礙一涯天(산애일애천) : 산은 하늘 끝을 가렸구나
白日孤槎客(백일고사객) : 오늘은 외로운 나그네지만
靑雲上界仙(청운상계선) : 지난날 조정에선 높은 벼슬 누렸네
歸來多感物(귀래다감물) : 돌아오니 온갖 것에 느낌도 많아
醉墨灑江煙(취묵쇄강연) : 취하여 먹을 찍어 강위에 뿌리네

4세 삼성군(三城君)의 휘는 정익(挺益)으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공의 형이 일찍 세상을 떠서 문경공의 뒤를 이어 탐라의 성주가 되었다. 조정에선 탐라국을 군에서 현으로 격하시켜 성주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토산품인 공물(貢物)을 지나치게 강요하여 백성의 원성이 높아지고, 드디어 소요가 일어났다. 공이 조정에 상소하여 공물을 줄이고,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의 횡포를 막았다.
5세 병부상서(兵部尙書) 휘 적(適)의 호는 활림(豁林)이오 자는 달부(達夫) 또는 적(迪)이다. 원종(元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는데 노모의 병환이 깊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고향인 탐라로 돌아왔다. 논밭의 경계가 없어 싸움이 적지 않았는데 돌담을 쌓아 경계를 만들도록 한 것이 바로 공이었다. 지금도 제주에서는 돌담으로 밭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원종이 공을 가리켜 “옛사람은 하루의 부모 봉양을 三公(정승)으로 바꾸지 않았다, 古人一日養不以三公換者)”고 하였다.
6세 이부상서(吏部尙書) 휘 세재(世在)로 활림(豁林)공의 둘째 아들이다. 호는 용원(用源)이오, 이부상서와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냈다.
7세 병부상서 휘 돈겸(惇謙,) 일명 순겸(淳謙)은 희종(熙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어사,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병부상서문하시중 등을 두루 지냈다. 고종(高宗) 때 임금에게 직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 임금이 듣기 거슬려하고, 대신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오죽도(梧竹島)로 귀양 가서 여생을 마쳤다.
공을 안타깝게 여긴 선비들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賈誼三年謫(가의삼년적) : 가의는 삼년을 귀양살고
梁鴻萬里愁(양홍만리수) : 양홍은 만리타향에 서럽구나
鷄飛秦水上(계비진수상) : 닭 같은 속물은 진수에서 날 뛰는데
鳳去楚江頭(봉거초강두) : 봉황의 어진 인재 초강을 건너가네
주) 가의 : 직언을 주저하지 않다가 귀양가서 죽은 선비
    양홍 : 한나라 사람으로 오나라에 들어가 날마다 고향을 그리다 죽었다.
    진수 : 진나라 수도 근처 곧 벼슬아치들이 모여있는 곳
8세 정안공(靖安公)의 휘는 영중(塋中)으로 자는 여회(汝晦)다. 희종(熙宗)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조산대부예빈경(朝散大夫禮賓卿, 과거시험을 관장),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 태자의 스승)를 지냈다.
9세 이부상서 휘 정(侹)공의 호는 쌍명당(雙明堂)으로 정안공의 다섯째 아들이다. 원종(元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이부상서문하시중을 지냈다. 공은 백연, 중연, 계연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로부터 고씨의 문충공파(文忠公派), 장흥백파(長興伯派), 화전군파(花田君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장흥백파>
장흥고씨의 파시조 1세인 양헌공(良獻公)의 휘는 중연(일명 복림)이요, 자는 수일(壽一), 양헌은 시호다. 중시조 성주공(星主公) 末老의 10세손이다. 1310년 이부상서 정(侹)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열아홉 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중서시랑 등을 지냈다. 공민왕 때 홍건적이 침입해와 개경(고려의 수도)이 함락되어 왕이 복주(안동)로 피난할 때 왕을 따라 호종(扈從)하여 장흥백(長興伯)에 봉해졌다. 이로써 장흥고씨(장흥백파)의 관향이 이루어진 것이다. 1977년 삼계면 능성리에 도산사(道山祠)를 세워 공의 위패를 모셨다.
공의 부인은 회인군(懷仁君, 충선왕의 셋째아들) 규(珪)의 딸, 개성군부인(開城郡夫人) 왕씨다. (*郡夫人은 종1품(從一品) 종친(宗親)의 아내에게 주는 봉작(封爵). 
2세 상서(尙書)공의 휘는 합(合)이다. 양헌공(良獻公)의 아들로 충정왕 2년에 벼슬을 시작하여 지신사판상서(知申事判尙書,대통령 비서실장)를 지냈다. 공에 대한 기록과 묘소 등은 고려의 패망과 함께 자세히 전하지 않고 있으며 위패는 삼계면 도산사에 모셨다.
3세 지영주사(知寧州事)공의 휘는 백안(白顔)으로 상서공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인 1371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영주사(知寧州事)로 참의(參議, 차관보)를 지냈다.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여 삼계면에 터를 잡아 장성으로 입향한 장흥고씨의 최초의 선대로, 삼계면 관서당(官書堂) 낭월산에 묘소가 있다. 
4세 북부상서(北部尙書)공의 휘는 협(協)이다. 고려 왕족인 익원대군(益原大君) 소(玿)의 사위로 호는 삼계(森溪), 태종대왕이 신부(臣傅)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공은 태종과 나이가 비슷하고, 어렸을 때부터 친구로 자랐다. 신부(臣傅)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태종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공이 태종의 신하가 되지만 자신의 스승이 되어 국정에 참여해 달라는 뜻으로 지어 준 이름이다. 태종이 호조참의(戶曹參議,행정과 재경을 관장하는 차관보)를 제수했으나 거절하였다. 이는 공의 증조모가 군부인(郡夫人) 왕씨였고, 처가도 그리했으므로 고려의 의(義)를 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공이 별세했을 때 태종은 예신(禮臣)을 보내 조문하고, 삼계면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정했다.
5세 호조참판에 증직된 휘 열(悅)은 신부(臣傅)공의 아들이다. 공이 태어났을 때 공양왕이 비단요와 미역을 싸 보내면서 ‘기쁘다’고 하여 이름을 열(悅)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태종이 호조참판에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아니했다. 공은 “홍패(紅牌)는 선조께서 남기신 음덕을 이어받은 것이고, 벼슬을 사양하는 것은 외가(外家)의 수정(讐庭)임을 부그러워함”이라고 했다.
6세 상지(尙志)공은 세종대왕과 같은 한(韓)씨의 외손이었다. 외가 쪽으로 6촌계를 만들었는데 서른세 명의 계원 가운데 공의 서열이 열세 번 째였다. 계서문을 세종대왕이 지었다. 공의 관직이 창신교위 충좌위부사직에 올랐는데 조선조에 들어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마치고 다시 출사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는 세종대왕의 덕치와 외가 쪽과의 인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흥고씨의 후손이 번성한 것은 상지공이 일곱 형제를 두었기 때문인데 공의 부인 광산김씨가 태몽에 용왕이 나타나 자신의 자식들이 잡혀 있는데 이들을 살려주면 반드시 그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보약으로 쓰기 위해 일곱 마리의 자라를 솥에 삶으려 하고 있어 급히 중지하고, 능성리 개울에 풀어주었다. 광산김씨가 7형제를 낳아 그 후손이    장성은 물론 담양, 광주, 나주 등지에까지 널리 번창하게 되었다.
7세 상지공의 일곱 째 아들인 진사(進士)공 충순위(忠順衛) 휘 자신(自愼)의 자는 유후(裕後)다. 공이 상지공에 이어 또 7형제를 두었다.
교리(校理) 습(習)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진사 남강(南岡)공 익(翼)은 넷째 아들로 중종 때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포 양팽손(梁彭孫)과 함께 오직 학문과 도의를 닦는데 전념하였다.
반매정(伴梅亭) 전은 다섯째 아들로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한적한 곳에 반매정(伴梅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벗들과 함께 시를 지으며 유유자적하였다.  
9세 형조참의 휘 광호(光琥)는 반매정(伴梅亭)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위하였다. 전란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학정(弄鶴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거했다.
장흥고씨의 인물들을 모두 소개하기에는 지면의 한계가 있어 간략히 소개하면 시한(時翰, 1811-1881)은 자가 우보(羽甫) 호는 죽곡(竹谷)이다. 회재(悔齋) 일겸(一謙)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문학에 자질이 뛰어났다. 스물여섯 살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시면(時勉, 1822-1906)은 자가 사강(士綱) 호는 석정(石汀)이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망겸(望謙)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 사헌부 장령, 홍문관 교리(校理) 등을 역임하고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시협(時協, 1830-1913은 자가 여화(汝和) 호는 간암(澗岩)이다. 시면과는 형제 사이로 고종2년 과거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다. 삼사(三司)의 연합 상소에 불참한 혐의로 순안(평양)으로 귀양 갔으나 곧 풀려났다. 그 후 홍문관 부교리를 제수했으나 상소를 올려 사양했다. 임금이 사양치 말라 하므로 홍문과 교리에  취임했다. 뒤에 다시 통정대부에 명했으나 받지 않았다.
시경(時景, 1830-1898)은 자가 국빈(國彬) 호는 수산(水山)으로 봉겸(鳳謙)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장령을 지냈으나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산수를 즐기며 여생을 마쳤다.
이 밖에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고, 사헌부 지평을 제수했으나 나라에 도움 될 일을 하지 못하였다며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마친 시기(時冀, 1845-1905) 등 장성의 장흥고씨는 칠홍팔백(七紅八白, 과거에 합격하면 홍패, 진사에 합격하면 백패를 주었다)의 인물을 배출했다.  
장흥고씨는 절의와 강직이라는 선비 정신의 가풍이 대대로 이어오는 집안이다. 권세에 야합하지 않고, 임금에게 듣기 싫은 말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절의를 위해서는 완고하게 벼슬을 사양했다.
근래에 인물로는 고경주 전군수, 고재명 전환경청장, 고광흥 교수(전수자원공사 화순소장), 고재현 변호사, 고경진 인천교대 교수, 고희주 전광주우체국장, 고칠주 의회사무과장, 고중엽 전삼계면장, 고제원 전동화면장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전라남도 장성군 영천로 168 3층
  • 대표전화 : 061-392-2041~2042
  • 팩스 : 061-392-2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변동빈
  • 법인명 : (주)주간장성군민신문사
  • 제호 : 장성군민신문
  • 등록번호 : 전남 다 00184
  • 등록일 : 2003-07-04
  • 발행일 : 2003-08-15
  • 발행인 : 류이경
  • 편집인 : 변동빈
  • 장성군민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성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snews1@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