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나의 철학
나의 인생 나의 철학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08.05.1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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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호부터 장성군 북일면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인 변극(邊極)선생의 자서전을 게재한다. 변선생은 1903에 태어나 1980 별세했으며  독립운동가, 교육자로 변중선(衆船), 변장성(長城)이라 불렀다.
12세 때 한학자인 전우(田愚)에게 한문을 배웠고, 1919년 구례 천은사 하용화(河龍華)스님을 만나 입산수도하였다. 그 뒤 중국 상해로 건너가 상해 동제대학(同濟大學)에서 산부인과를 전공하였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상해 한인청년회장, 해외한인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8년 봄 일본경찰에 붙잡혀 신의주감옥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이리농과대학·전남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봉직하였다.
정년퇴직 후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초대학장, 법은재단(法恩財團) 이사장, 법은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독립운동가로서 건국포장을 교육자로서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이 자서전은 1975년 원광대학교 신문에 게재되었다.    


   
   불교단체 장학금 받고 상해유학
  유학시절에 항일독립운동 시작

  나의 어린시절은 남부럽지 않게 풍요한 생활을 유지했던 가정환경으로 비교적 유족한 편이었다. 우리 집은 전남 장성군 북일면에서도 상당한 중농(中農)이었고 집안은 대대로 한문학(漢文學)을 숭상해 왔던 근방에서도 알아주는 학자집안이었다.
  그런 영향으로 나도 12세가 되던 1914년에 전북 부안군 계화도라는 섬으로 한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당시 고향엔 소학교가 이미 세워져 있었고 거기서 신학문을 배우고 싶었지만 신학문엔 절대 뜻이 없었던 부모들의 성화로 한문학을 배우는 도리 밖에 없었다.
  내가 처음 한문학을 배우러 갔던 부안군 계화도는 당시 전국적으로 한문학에 명성이 높았던 전우(田愚) 선생이 있어 전국에서 수천 명의 선비가 모여드는 곳이었다. 거의가 자취생활을 했으나 나는 그럴 필요가 없이 하숙생활을 하며 17세사 되던 1919년까지 조용히 학문을 닦았다.
  그러는 중 내 나이 17세 되던 해에 3·1독립만세 사건이 발발하는 바람에 계화도에서 나와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갔다. 내사 고향을 떠나 상경(上京)키로 결심한 것은 부모의 반대로 묶였던 신학문에 대한 동경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울로 올라가서 나는 머리를 박박 깎고 백남규(白南奎)씨가 경영하던 한성강습원(漢城講習院)에 입학하여 2∼3개월 간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신학문을 끝까지 반대하는 부모들에 이끌려 집으로 잡혀 내려가야만 했다. 그 뒤 상심한 나머지 전남 구례에 있는 천은사(天隱寺)로 들어가 3개월가량 마음을 달랠 겸 불경(佛經)을 읽 으며 수도생활을 계속했다.
  그런데 다시 상경할 기회가 생겼다. 그토록 신학문을 반대했던 부모들이 나의 의지(意志)에 끝내 불복, 신학문을 공부하도록 허락해주었기 때문이다. 상경하여 중동고보(中東高普)에 입학했고, 몇 개월 후 다시 휘문고보 2학년 편입시험을 치른 후 합격하여 휘문학교를 다녔다.
  나의 서울에서의 학창시절은 그저 별다른 획기적인 계기도 사건도 없이 오직 학문 탐구에만 바쳐버린 생활, 어쩌면 무미건조한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무렵 나의 일생, 아니 인생을 통해서 가장 획기적인 전환기라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그것은 불교단체에서 장학금을 받고 중국 상해로 유학의 길을 떠난 것이다.
  그때 나의 나이는 20세인가 되었다. 나는 상해에 있는 동제대학 부속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당시 가장 큰 애로점은 처음 외국에 유학 온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고통이겠지만 언어의 장애였다.
  그러나 언어의 습득은 필수적인 것이었기에 1년 동안 전력을 기울이고 보니 1년 후엔 해득이 가능했다. 동제대학 부속중학을 졸업하고 1926년 9월 1일 동일계열인 동제대학 의학부(醫學部)에서 산부인과(産婦人科)를 전공케 되었다.
  산부인과를 전공케 된 것은 동제대학의 학칙 자체가 학교에서 정해준 대로 전공분야를 다룰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다른 애로점은 없었다. 뜻하지도 않은 전공이라 얼떨떨했지만 배우는 수밖에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 당시 동제대학 의학부에는 거의 전과목(全科目)을 독일인 교수가 강의를 맡았다. 그러고 보니 역시 제일 큰 고통은 뭐니뭐니 해도 독일어를 마스터하는 일이었다.
  지금 내가 중국어나 독일어를 표현하는 데 하등의 곤란을 받지 않는 것도 당시의 중국유학이라 생각하면 천만 대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제대학에서 나와 함께 공부를 했던 사람들로는 이극노(李克魯)씨가 독문보통실업과(獨文普通實業科)엘 다녔고, 같은 과의 안호상(安浩相. 전 문교부장관)씨 등 모두 11명이 있었다.
  그들과 나와의 관계는 극히 평범했다. 모두들 술은 일체 하지 않았으며 모두 열심히 공부만 했다. 그러나 나의 생활이나 그들의 생활, 아니 당시 중국에 와 있던 3백여 명의 유학생 모두에게는 독립운동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항일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중국에서 일어난 배영운동(排英運動)인 5 · 30운동에 가담하면서부터였다. 나는 영국의 식민지가 아닌 중국에서 배영운동을 일으키는 데 일제(日帝)의 손아귀에 떨어진 우리나라의 백성으로써 수수방관적 태도만 하고 있을 수 없다고 보아 재중(在中) 유학생 3백 명을 규합하여 배일(排日) 독립단체인 「해외청년동맹」을 결성하여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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