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식 고취한 ‘광성의숙’
민족의식 고취한 ‘광성의숙’
  • 박재범 기자
  • 승인 2008.02.29 21: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사와 국어 가르쳐

일제 강점기 시절 스님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민족의식 고취와 인재양성을 위해 설립된 광성의숙(廣成義塾) 졸업장 등 관련자료가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고불총림 백양사 주지 성오스님은 은사였던 봉하(峯霞,1887~1968)스님이 광성의숙에서 받았던 △광성강숙(講塾) 제1호 졸업장 △광성강숙 측량강습소 제2호 졸업증서 △광성의숙(義塾) 포증서(褒言正書) △광성의숙 포증서 등 모두 4건의 자료를 공개했다.

공개자료에는 당시 광성의숙 숙장(塾長)과 광성강숙 숙장, 광성강숙측량강습소장은 박한영(석전스님), 광성강숙 숙감(塾監)과 광성강숙측량강습소 숙감은 송종헌(만암스님) 등 쟁쟁한 인물들이 교육을 담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광성의숙은 서당의미의 학교로써 지금의 비인가시설로 장성 백양사 청류암에 세워져 스님을 비롯한 일반인에게 불교경전(교리)인 ‘내전’과 일반 사회학인 ‘외전’을 가르치는 한편 숨겨진 학과로 ‘민족사’인 국사를 가르치다 일본순사에게 발각돼 폐교가 됐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묘련암으로 자리를 옮겨 교육을 다시 시작했고 다시 숨겨진 ‘국어’를 가르치다 또다시 발각돼 폐교에 이르고 말았다.

성오스님이 공개한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면 광성의숙은 1910년 이전에 설립돼 융희4년(1910년), 명치44년(1911년), 대정2년(1913년)을 까지 운영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 광성의숙은 불교경전, 일반사회학, 민족사, 국어 외에 광성강숙측량강습소 세부측량과를 운영해 토지를 측량하는 토목까지 가르쳤고 “본숙(本塾) 4년 급 정한 과정에 학력이 우등하기에”라는 기록으로 미뤄보아 4년 과정으로 운영됐음을 증명한다.

광성의숙이 폐교에 이르자 그 건물을 ‘500 나한전’으로 개조해 사용해 왔으나 6·25당시 불행하게도 화재로 잿더미가 돼버렸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광성의숙의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며,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불교 전통을 수호하기 위한 임제종을 설립하는 근간이 계기가 됐음을 알려주고 있다고 학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



자료의 주인공인 봉하스님은 1877년 전북 고창출신으로 한학을 공부하다 15세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호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호운스님에게 사미계를, 처은스님에게 구족계를 수지하고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는 등 교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수행 정진했다.



전남종무원장을 역임한 봉하스님은 백양사와 불갑사 강사를 비롯해 정광중고등학교 이사장을 지내며 후학을 양성했다. 백양사 주지 소임을 28년간 지내며 도량외호에 공을 세운 스님은 1968년 8월 나주 심향사에서 법납 92세, 세수 77세로 열반에 들었다.

한편, 성오스님은 “큰스님들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국사나 국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500 나한전을 복원 불사하기로 했다”며 예전 광성의숙의 자리에 있다 잿더미가 돼버린 500나한전 올해부터 복원하기로 하고 작년에 이어 음력인 1월 23일 2번째 나한제를 지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전라남도 장성군 영천로 168 3층
  • 대표전화 : 061-392-2041~2042
  • 팩스 : 061-392-2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변동빈
  • 법인명 : (주)주간장성군민신문사
  • 제호 : 장성군민신문
  • 등록번호 : 전남 다 00184
  • 등록일 : 2003-07-04
  • 발행일 : 2003-08-15
  • 발행인 : 류이경
  • 편집인 : 변동빈
  • 장성군민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성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snews1@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