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한상을 찾아
남도 한상을 찾아
  • 변동빈 기자
  • 승인 2007.12.12 14: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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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조총련 - 이념이 아니라 핏줄, 상생이 더 소중


 

조총련은 대부분 이북 출신일 것이라는 선입감을 갖고 있었던 취재진은 그들의 80% 이상이 이남 출신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민단과 한인회 그리고 조총련에 가입한 재일교포들은 집안의 경조사 등이 생기면 서로 문상을 하고 축하를 한다. 이들은 고향이 같거나 친인척으로 인연이 맺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조총련의 민족적 자긍심은 그들의 명함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민단 또는 한인회 교포들의 명함에서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를 개명한 경우가 많지만 조총련 교포들은 창씨개명이 내 조상을 배신하는 것이라며 성(姓)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조총련 재일교포들은 남북화해와 더불어 하나의 민족, 남과북 그리고 재일교포와 조국이 상생하는 투자와 지원을 바라고 있었다.

일본 조선대학교 총동창회장 - 박충우 국제상사 대표



<나의 고향은 구례>
박충우 사장은 구례출신의 재일교포 2세다. 조선인 학교에서 소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재일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으로 대표적인 조총련계 사업가다. 수십억 엔의 재산을 가진 재일교포라고 들었는데 그의 사무실은 서너 평 내외의 소박하고, 조촐했다. 사무실 벽에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현대적 판화로 재현한 액자가 걸려있었는데 그의 사상과 가치관을 짐작케 했다. 사무실 근처의 편의점 앞에서 취재진을 기다리던 그는 토요일이라 직원이 출근하지 않았다며 손수 차를 대접했다. 큰형과 둘째형이 일찍 작고한 탓에 부친의 사업을 물려받은 그는 일곱 명의 조카와 세 명의 자녀를 교육시켰다고 한다. 전통적인 우리나라 대가족제도의 가장으로서의 모습은 그의 큰조카를 자신의 사업장에 점장으로 앉히고 자신의 아들은 불고기 식당을 운영하게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는 매년 재일 조선인 학교에 1천5백만 엔(1억 2천만 원)에서 2천5백만 엔(2억1천만 원)의 기부금을 내고 있다. 지난해 조선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사업회장을 맡아서는 3천만 엔의 학교발전기금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한마디로 “조선인이라고 하더라도 조선학교 출신은 조선인으로 살아가지만 일본학교 출신은 거의 일본인으로 살아간다. 우리말을 모르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모르는데 어떻게 조선인으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가 조선인 학교에 매년 기부금을 내고 있는 이유는 한민족이 비록 일본에서 살더라도 한민족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박사장은 2000년 제2차 조총련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처음 아버지의 고향이며 자신의 뿌리인 구례를 방문했다. 이 때 한 할머니가 “네 아버지와 꼭 닮았구나”라는 말에 가슴이 찡하며 내 교향이 여기구나라는 것을 실감했다고 한다. 2002년 월드컵 경기 때는 조카와 아들을 데리고 구례를 방문했고, 광주 경기장에서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를 관람하며 한국을 응원하기도 했다. 내년에는 자녀들과 조카들을 모두 데리고 고향을 방문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조선인의 자긍심을 지키는 사람>
그는 일본에는 80년대 이후에 들어온 한인회를 제외하면 이남출신 제일교포는 민단과 조총련 그리고 일본으로 귀화한 귀화인 세 부류로 나뉜다고 했다. 하지만 50~60년대 일본에 남아있던 재일교포 대부분은 조총련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는 해방이전 좌익 독립 운동가들이 많았고, 48년 이후 남한에 세운 정부가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하고, 매판 자본가 등이 집권하면서 독립 운동가를 탄압하던 친일 군인, 친일 경찰 등이 권력의 한 축을 형성하자 고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남아버린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박사장은 “재일교포들은 북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남한정부는 재일교포에 대해 기민정책(棄民政策)을 쓰며 일본에 귀화해 살기를 바랐지만 북조선은 재일교포에게 민주주의 , 민족교육을 실천했다”며 한 때 조선인 학교가 140여 개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조선대학교에는 현재 8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박사장은 이들이 한국의 대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또한 한국정부가 일본의 조선학교에 재정 및 인력 지원을 원했다. 물론 조총련계 성향의 조선인 학교가 한국에서 파견되는 교사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았다.
박사장은 조선인학교 국어교사가 우리말의 충분한 어휘력과 표현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남한 정부에서 교사들을 파견하면 교포 학생들의 우리말 실력이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박사장은 조총련과 민단이 협력해야할 첫째 사업으로 조선인학교 지원을 꼽았다.

<재일교포 고국 투자 - 지금이 시기다>
재일교포들은 주로 빠찡코, 금융업, 불고기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빠찡코의 사행성을 줄이면서 1천800개의 업소가 현재는 1천200개로 줄었고, 내년에는 800여개까지 줄어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금융업(사채)은 연이율이 17% 이하로 줄게 됨에 따라  사채업도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불고기 집을 운영하는 재일교포들은 소고기 값의 상승으로 일본 식당과의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어 폐업이 속출하고 있다.
갈수록 우경화하고 있는 일본 정부는 조총련의 성장을 원치 않고 있고, 이에 따라 조총련 기업에 대한 세무조사 등의 방법으로 노골적인 탄압을 하고 있다. 새로운 투자처를 찾고 있는 이들은 정치·경제가 불안한 이북에 투자하는 것을 꺼리고 있으며 한국에 그리고 이왕이면 고향에 투자하기를 바라고 있다.
박사장은 화교들이 중국에 어떻게 투자했고, 본국에서는 그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살펴보고, 지금까지 한국정부는 교포들의 투자를 어떻게 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중국 정부는 일반 외국인에 개방하지 않은 업종도 화교와 홍콩인에 대해서는 먼저 개방함과 동시에 세금혜택을 부여해 화교들의 투자를 적극 유도했다. 박사장은 전라도 출신의 민단과 조총련계 사람들이 모여 법인 형태로 고국(전남)에 투자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현재의 제도와 법으로는 조총련계 교포가 고국에 직접 투자하는 것은 여러 가지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민단과 조총련 그리고 새로 일본에 와서 정착한 뉴카마가 하나 되어 고국에 투자하는 것이다. 박사장은 힘주어 말했다. “나에 뿌리는 전라도 구례이며, 나에 성씨는 박가고, 내 아들과 딸도 박가다. 나는 내 손자와 후손들이 박가로 살기를 원한다.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조상의 산소가 구례에 있다. 언젠가는 나도 내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



교포 투자 - 제도부터 고쳐야. 프라자호텔 이준덕 사장
이준덕 사장은 아카바네에서 호텔을 경영하고 있는 재일교포다. 그는 재일교포의 구성을 민단(우파), 조총련(좌파) 그리고 무관심파와 뉴카마로 분류했다. 하지만 조총련과 민단의 임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재일교포는 무관심파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준덕 사장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부터 한국에 자주 왕래하며 한국정부의 관료는 물론이요 대학교수들과도 많은 교분을 나누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조국이 통일되는 날 나는 비로소 조선인으로서 국적을 갖게 될 것”이라며 “나는 북조선국적도 남한국적도 가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이라는 것은 국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출신을 표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준덕 사장은 남과 북 그리고 민단과 조총련이 일본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를 크게 세 가지로 손 꼽았다. 첫째, 과거사 청산이다. 조선인의 강제 징용, 위안부,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이북으로 간 히로시마 피폭 피해자에 대한 보상 등이다. 둘째, 일본의 공교육에서 역사 교육을 바로잡는 문제다. 일본은 1925년 이전의 역사 교육만 하고 있고, 그 후의 역사교육은 하지 않거나 왜곡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재일교포의 민족교육에 대한 공동지원이다. 한글과 우리말, 한국문화와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재일교포 3세는 일본어가 모어(주로 사용하는 말)된 세대들이어서 우리말의 표현력과 어휘력이 많이 부족하다. 그는 가장 시급한 국어교사와 역사교사가 100여 명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준덕 사장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15장이 넘는 입국 서류와 일본에 재입국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북한은 일본과 국교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으면 무국적자 즉 난민의 처지가 된다. 따라서 조총련계 재일교포가 해외에 나갔다가 일본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입국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사장은 “조총련계 재일교포의 고국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고국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을 요구했다. 재일교포(조총련) 부자들이 한국에서 부동산 구입은 물론 예금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국투자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외국인도 한국에서 부동산 구입이 가능한데 재일교포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재일교포 가운데 다수는 북조선이나 남한 어느 한 쪽이 아니라 분단되기 전의 조선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있다.
또한 밀입국 등의 이유로 부득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했다. 그는 고국에서 문화, 축제 등으로 재일교포와 교류하여 네트워크를 이루어가면서 서로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특히 재일교포 가운데는 자녀들을 일본인이 아닌 조선 사람과 혼인하기를 원하지만 수가 적고 여건이 맞지 않아 결혼 적령기를 넘기는 경우도 많다며 한국 남성이나 여성 가운데 배우자를 찾는 교포가 많다고 했다. 자식이 일본인과 결혼하여 손자·손녀가 일본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일교포 가운데 고국에 투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요건을 갖춘 사람들은 조총련계였다. 민단계 2·3세 대부분이 한글은 물론 우리말을 할 수 없지만 그들은 한국에서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또한 일본 정부가 이북으로 투자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는데다 일본 경제의 침체로 새로운 투자처를 찾고 있다.
하지만 제도적인 한계는 물론 교류와 소통이 되지 않아 신뢰가 쌓아지지 못한 것도 원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인적 네트워크와 단체간의 교류 등을 통해 감성적으로 서로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런 역할은 정부 차원보다는 자치단체와 시민단체 지역 언론이 앞장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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