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재일교포 1세대
우리는 재일교포 1세대
  • 마스터
  • 승인 2007.12.0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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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카마의 새로운 도전

 

1980년대 이후 재일교포 유학생이 급증하면서 이들 가운데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 머물고 있는 젊은 세대(뉴카마)들은 I.T(컴퓨터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통신장비 관련 서비스와 부품을 생산하는 산업)분야와 전문직(변호사, 회계사 등)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1945년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 1세대가 강제징용이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면 뉴카마들은 유학 또는 사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고학력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의 특징은 민단이나 조총련 어디에도 가입하지 않고, 이념이나 남북을 떠나 재일교포를 한민족 한핏줄로 여긴다는 점이다. 이들은 부모나 친지가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고국에 자주 왕래하고 있으며 사업상 1년에 수십 차례 방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이들은 한국에 투자하려는 의욕이 높고, 계획을 세워놓은 사람도 적지 않다. 1970-80년대 재일교포들의 한국투자가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향수 때문이었다면 뉴카마는 경제발전의 비전과 투자효과를 철저히 따진다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들의 투자는 철저한 준비와 계획에 따라 추진되기 때문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먼저 뉴카마의 성공사례와 비전을 들어본다.



<일본에 부는 막걸리 바람 - 이동막걸리 김효섭사장>

막걸리하면 농부들이 논두렁에 둘러 앉아 새참을 곁들여 먹는 농주(農酒)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엔 농촌에서도 막걸리보다 맥주나 소주의 소비량이 훨씬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더구나 일본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막걸리 선호와 소비량이 늘어나고 있다면 믿기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물산 대표 김효섭 사장은 한국 막걸리의 일본 전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에 서 이동막걸리를 판매하고 있는 김사장은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1986년 일본으로 유학을 왔다. 오사카에 있는 전자회사에 입사한 그는 우연히 막걸리가 1년 이상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일본에서 막걸리를 팔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전자회사를 그만두고, 6개월 동안 시장조사를 마친 뒤 ‘인천탁주’를 일본으로 수입해 판매하는 사업을 했는데 1년여 뒤 동업자에게 판매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일본 주류업계의 유통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주류유통회사에 입사해 3년 동안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이 때 주류업계가 거래하고 있는 영업판매소, 대형거래업소의 영업현황 등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1995년 한국의 이동막걸리 회사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본사의 승인이 떨어지자 자본금 1천만 앤으로 [주식회사 이동저팬]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일본에 이동막걸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사장과 영업사원 등을 모두 김사장 혼자 해야만 했다.
일일이 식당을 찾아가 영업을 시작한 김사장은 일본 식당에서는 물론 한국 식당에서조차  문전박대를 당한 경우가 허다했다. 김사장이 사업을 시작할 때는 한류열풍이 불기 전이라서 일본인에게 한국의 술 그것도 막걸리는 너무나 생소했다. 하지만 김사장의 철저한 시장조사와 꾸준한 노력으로 1년여 만에 한국으로 주문량이 한 컨테이너가 될 만큼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동막걸리는 2000년대에 와서 매년 120% 이상의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 판매하고 있는 이동막걸리는 100% 본사에서 완제품으로 생산하여 일본으로 수입하여 판매하고 있는데 본사의 생산량 가운데 절반이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다. 보통 한 달에 20컨테이너를 판매하고 있는데 한 컨테이너에 1천 케이스가 들어간다고 하니 적은 양이 아니다. 그렇게 판매하는 매출은 1년에 약 10엔(우리 돈 80억 원)이다.

김사장은 99년에 이동막걸리 뿐만 아니라 유자차, 전통김, 김치 양념장 등을 판매하는 ‘우리물산’을 창업해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식품 개발과 한국의 특산물을 수입 판매하는 유통업을 시작했다. 재일교포 소비자를 상대로 하는 사업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김사장의 전략은 맞아 떨어져 우리물산과 이동막걸리 소비자의 80%는 일본식당과 일본인이다. 김사장은 앞으로 한국의 막걸리와 전통식품을 중국시장으로 판매하겠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그는 2005년 재일 ‘한국농식품연합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일본에서 한국식품업을 하고 있는 재일 한국인의 권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일본에서 한국식품의 수입규모는 연간 2백 억엔(1천6백억 원)에 이르고 있다. 한국농식품연합회에서는 성주군과 계약을 맺어 성주참외를 일본에 수입해 판매하고 있고, 한국의 농특산물에 대한 수입을 꾸준히 늘리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김사장은 장성의 특산물인 파프리카와 담양의 멜론에도 관심을 보였다. 환율과 소비자가의 변동에 농민들이 영향을 받지 않도록 공동투자와 생산비 보장 방식의 계약제배에 대해서도 꾸준히 논의하기로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점차 일본 사회에서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뉴카마들이 민단과 조총련의 가교 역할을 해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핏줄로 서로 돕고 화합하는 재일교포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돈을 벌고 싶어 왔다 - 주)영건 김영건 사장>
1987년 일본으로 건너온 주) 영건의 김영건 사장은 무역, 부동산 그리고 신발제조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김사장은 중국 현지에 공장을 설립, 신발을 제작해 일본에서 판매하고 있다.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간 김사장은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돈을 벌기 위해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 김사장은 식당에서 그릇 닦기와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일본어를 배우고, 사업을 구상했다. 신발 제조로 사업기반을 쌓은 김사장은 부동산 개발에 눈을 돌려 지금은 건실한 중견 기업인이 되었다.
김사장은 고국에서 사회복지사업을 하는 것이 목표다. 국가나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립형 노인복지시설을 운영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가난했던 소년시절을 보낸 김사장은 자식들이 돌보지 않거나 돌볼 수 없는 외로운 노인들을 모시고, 살겠다는 생각에 노인복지 시설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일교포 가운데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고국에 투자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재일교포들이 고국의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정보가 빈약하다는 것을 꼽았다. 그는 “고국에 투자하는 것이 단순한 애국심이나 감성에 호소할 때는 지났다”며 “투자의 효율성과 효과를 따지며 고국과 재일교포가 상생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전남·광주 출신의 교포들은 자신의 고향에만 국한하지 않고, 전남 지역 어디에나 투자 여건이 좋은 곳에 공동 출자하여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한 시도”라고 주장했다. “재일교포들은 어렵게 고생해서 돈을 벌었다. 그들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고 단 돈 백만 엔도 함부로 쓰지 않는다. 재일교포의 투자유치를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먼저 고향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문화교류는 물론 지방자치단체와 언론이 함께 나서서 재일교포와의 유대를 돈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야 지역의 인프라에 대한 정보와 행정적인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의 의지와 노력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포 가운데 고국에 투자하겠다고 나섰다가 사기를 당하거나 실패한 사례가 적지 않아 많은 교포들이 고국에 투자를 꺼리고 있었다.



<한류바람을 일으킨 케이블 티브이 -KNTV 이창준 관서지사장>

이창준 사장은 우리 취재진을 만나기 위해 오사카 남부 오리엔탈 호텔을 찾아왔다. 그가 일하고 있는 KNTV는 케이블 티브이 유선방송회사로 한국 드라마, 한국 영화, 한국 뉴스를 전하고 있다. 본사는 도쿄에 있지만 가입자는 교토, 오사카 등 관서지방에 가장 많다. 60만 명 재일교포 가운데 오사카에 30만 명이 살고 있고, 관서 지방에 40만 명이 살고 있다.
그는 85년 일본에 유학하여 96년 KNTV 창업에 가담했다. 그러나 경영이 어려워지자 97년 일본인에게 매각했다가 한류 바람이 불기 시작한 2003년 재일교포 사업가가 인수해 지금은 관서 지사장을 맡아 사업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
KNTV 시청자는 일본인이 80% 재일교포가 20%를 차지하고 있으며 오사카에서는 그 비율이 5대 5로 일본인 가입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특히 재일교포 가운데는 조총련계 동포들의 가입률이 높은데 이는 조총련 교포 2·3세대들은 조선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우리말을 잘 아는 반면 민단계 교포 2·3세대들은 일본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우리말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사장은 재일교포 가운데 조총련 2·3세들의 한국 합자 투자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말을 알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자유롭고,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상영된 영화 ‘쉬리’ 등을 수입 배급하는 일을 조총련 출신이 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남북이 평화와 공존 그리고 화해의 분위기가 되고, 일본 재일교포사회도 민단과 조총련이 재일교포의 지위향상과 권익을 위해 협력하는 무드가 조성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는 민단과 조총련이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가칭 ‘한민족 NGO 센터’ 설립을 구상하고 있었다. 한민족  NGO 센터는 한국의 시민사회단체와도 연대하여 네트워크를 이룬 다음 다양한 교류와 협력을 통해 서로 정보를 공유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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