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한상을 찾아
남도한상을 찾아
  • 마스터
  • 승인 2007.11.2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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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 사랑이 아닌 고국과 한 몸



 

<2천여 점의 그림 기증한 하정웅씨>

(가난 때문에 화가의 꿈을 접고)
자신의 고향 영암과 광주시립미술관 그리고 조선대학교에 무려 2000여점에 가까운 그림을 기증한 재일교포 2세 하정웅씨의 삶에서 그의 고국사랑과 가치관 그리고 역경을 딛고 성공하기까지 재일교포들의 한국인이라는 자존심과 긍지를 엿볼 수 있다.
하정웅씨는 도쿄에서 전철을 타고 한 시간여 거리에 있는 사이타마현 가와구치시에 살고 있다. 전철에서 내리자 하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2천여 점의 그림을 기증한 하씨의 집은 우리나라 재벌들이 사는 집처럼 넓고 화려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깨진 것은 변두리 작은 동네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자수성가한 재일동포 2세 기업인쯤으로 생각한 우리 일행은 그의 소박한 집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씨는 2층 가운데 1층만 사용하고 2층은 사글세를 주고 있었다. 겨우 열 명이나 앉을 수 있는 거실 겸 서재는 미술과 관련된 책과 도자기 등으로 4면이 가득 차 있었고, 안주인이며 수수한 외모의 하씨 부인 윤창자(尹昌子)여사는 예의를 갖춰 손님을 맞았다.

하씨는 1939년 일본 오사카에서 한 재일교포 이주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열 여섯 살 나이에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간 아버지 하헌식(작고)씨는 당시 일자리를 찾아 공사장 이곳저곳을 떠돌던 막노동자였다. 고향 영암에서는 더 이상 먹고 살길이 없게 되자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하지만 토목공사장의 잡부, 유리공장의 일용노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고된 노동과 망향의 한을 술로 달래는 알콜 중독자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일본에 가면 잘생기고 멋진 총각이 있다는 말만 믿고, 얼굴도 모르는 그의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알콜 중독자가 되어버린 아버지 대신 가족의 생계를 대신하기 위해 막노동판을 전전하지 않으면 안됐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희망조차 없는 일본생활을 견디다 못한 그의 어머니는 두 살배기 하씨만 데리고 아버지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도망치듯 전남 영암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의 배 속에는 하씨의 동생까지 있었다. 어머니는 동생을 낳은 뒤 1년여 만에 다시 일본에 돌아갔다.

(문화를 통한 고국 사랑)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이미 고향에 갈 짐까지 보내 놓은 상태에서 이들을 싣고 갈 배편이 마련되지 않아 불가피하게 다시 일본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씨는 조센징이라는 멸시를 받으면서도 교사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학생 가운데 한명이 되었다. 특히 조선인 출신으로는 드물게 중학교 학생회장을 맡기도 했고, 미술에 남다른 소질을 발휘해 학생미술대전 등 각종 대회의 상을 휩쓸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교내 미술부를 창립하는가 하면, 아키타현 고교미술협회 회장으로 학생전람회를 이끌기도 했다.

1959년 우수한 성적으로 아키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조선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시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그는 가난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수도 없었다. 무작정 도쿄로 상경한 그는 낮에는 작은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디자인 전문학교를 다니다 결국은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가전제품 판매사원으로 일하다 작은 가전제품 가게를 시작했다. 사업 수완도 좋은데다 때마침 도쿄올림픽(64년)이 일본에서 개최되면서 컬러 티브이가 보급되던 시기와 맞물려 그의 사업은 호황을 누렸다. 그때부터 재일동포 작가들의 미술품에 눈을 돌렸다. 가난 때문에 이루지 못한 화가의 꿈을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 꿈을 대신 이루는 것이었다. 하씨는 그동안 수집한 미술 작품들을 모아 어릴 적 강제징용 조선인들의 아픔이 배인 아키타에 미술관 건립을 추진해 오던 중 광주와 인연을 맺게 됐다. 작고한 오승윤 화백으로부터 미술품 기증 제의를 받은 것이다.


1993년과 1999년, 2003년 광주시립미술관에 세계적 거장 파블로 피카소와 마르크 샤갈 작품을 포함 국내외 유명작가 작품 1천800여 점을 기증한 하씨는 고향인 영암 망향 미술관(하씨가 기증한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건립 중)과 조선대학교에도 작품을 기증했으며 현재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과 조선대 초빙교수를 맡고 있다.
우리가 자리를 떠나려할 때 하씨는 갑자기 일행을 2층의 한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조선대학교와 영암에 보낼 그림과 관련한 여러 자료집과 작품들을 선별하고, 포장하는 일을 하는 하씨의 작은 공간이었다. 하씨와 부인 윤씨는 일생동안 고급 승용차, 고급브랜드의 옷이나 장식품을 사본 적이 없다고 한다. “60만 엔의 빚을 얻어 결혼을 했고, 자식에겐 부모가 열심히 살다간 모습으로 훌륭한 유산을 준 것이다. 우리가 죽고 난 뒤 내 고향 사람들이 내가 마련한 컬렉션을 보고 감동을 느끼며 기뻐할 때 내 그림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하씨가 헤어지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순천 청암대학교 강명운 이사장>

(고국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오사카는 재일교포가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현재 2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쯔루하시에는 코리아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취재 마지막 날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찾아간 것은 재일동포 전남도민회장을 맡고 있는 강명운(60세) 순천 청암대학 이사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강사장은 두 살 때인 1949년 아버지 강길태(86세) 순천 청암대학장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왔다. 강 이사장의 큰아버지가 먼저 일본에서 자리를 잡고 생활했기 때문에 비교적 일본에서 정착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한국인 차별로 인해 사업에 많은 지장이 있었다고 한다. 빠찡코와 부동산업으로 돈을 번 강사장의 부친 강길태 학장은 고국에 돌아가 봉사하며 여생을 마치겠다는 결심을 했다.


강길태 학장은 1976년 순천여자상업고등학교(현 순천청암고)를 설립하여 고국에서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1983년에는 도립 순천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해 1993년 순천전문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여 학과를 증설했고, 1998년에는 청암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강길태 학장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에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였고 사업에 성공하면 고국에 돌아가 교육사업을 하겠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강명운 이사장은 서른 살에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아 교육사업에 전념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를 뒷바라지해야 했다.
청암대는 I.T분야와 호텔 요리 등의 분야에서 4년제 대학 졸업생을 능가할 만큼 실력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I.T분야 졸업생 가운데는 일본의 소니회사에 매년 취업하고 있고, 호텔요리 전공 학생들도 일본의 유명 호텔에 취업하여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청암대는 오사카에 분교를 세워 봄·겨울방학 때 일본 회사에 인턴으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강명운 사장은 빠징코와 부동산 그리고 테니스 코트장 등을 운영하며 건실한 기업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고국에 투자하게 하려면)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보다 재일교포 상공인 특히 광주·전남 출신 교포들이 고향에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를 위한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사장은 한국은 기업인이 투자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강사장은 “한국은 기업인이 투자하기에 법의 규제가 많고, 노사분규가 잦아 성공한 교포들이 주저하고 있다”했다. “투자를 원하는 나라는 세계 수 십 개인데 애국심만으로 고국에 투자하기는 어렵다”고 단언했다.
“오사카 샤프전자가 한국에 투자한 뒤 노동조합의 경영권 참여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여 결국 투자 원금도 회수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강사장은 “시장 경제논리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오너도 전문경영인을 수입해야 하는 시대에 노동자들이 경영에 관여하겠다고 주장하면 그 누구도 투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술력에 비해 인건비가 너무 비싸다는 얘기도 했다. 동남아나 중국에 비해 한국의 인건비는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비교적 인건비가 싼 개성공단에 투자할 의향에 대해 물었다. 강사장은 “투자자는 그 곳의 정치적 안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투자원가를 보장받기 때문이다. 더구나 북한의 핵실험 이후 일본 정부에서 북한(개성공단 포함)에 대한 제재가 심해 현재 상황으로는 어렵다”고 했다.
강사장의 말 속에서 재일교포들의 투자는 매우 현실적이고, 냉정하며 애국심에 호소한 일방적인 지원이나 무모한 투자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해방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 1세대들은 대부분 작고했거나 현역에서 은퇴했고, 현장에서 상업이나 기업활동을 하고 있는 재일교포 2세들은 일본 학교에서 일본식 교육을 받고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록 자신의 뿌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지만 어떻게 어디에 투자해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고 있다. 강사장의 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교포들이 투자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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