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대산 자락 유서깊은 ‘읍터’
불대산 자락 유서깊은 ‘읍터’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03.10.17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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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원면 진원리 고산마을





















들녘엔 추수가 한창이다. 황금빛으로 물결치던 들녘이 군데군데 흙빛을 드러내고… 아스팔트길 위에 널린 나락을 밟지 않으려고 자동차는 속도를 내지 못한다.

진원면 소재지의 시가지를 거의 빠져나오자 궁구제의 제방이 눈앞에 놓이고 옛 진원현의 읍터였던 진원리 방향을 알리는 표석이 보인다.

진원현감의 송덕비들이 서있는 비석거리를 지나고 고산서원을 지난다. 불대산의 서남쪽 능선에 펼쳐진 넓은 들을 뒤로하고 진원리1구 고산마을회관에 들어서니, 기와 조각과 자기 파편 등 마을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어 유서 깊은 마을임을 일깨워 준다.

“이 마을의 역사가 곧 진원현의 역사”라고 말하는 마을의 원로 김창현(68세)씨와 이장 김순기(49세)씨. 노사 기정진 선생의 영향을 받아 학문의 기풍이 배어있고 권선징악과 상부상조하는 협동정신이 뿌리 깊은 마을이다.

원로 김창현씨는 “주민들이 순박하고 근면 성실하며 단결심이 강하다”고 자랑한다. 또 “주민 누구나 마을을 찾아오는 외지인들에게 친절하고 예를 다한다”고 말한다. 이는 유서 깊은 마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 마을은 한 고을의 읍터였기에 인구의 이동이 잦았기 때문에 집단을 이룬 성씨가 없고 다양한 성씨가 모여 산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가구도 80여호에 달하는 꽤 규모가 큰 마을이다. 그러나 농촌인구의 노령화는 이 마을인들 예외일순 없다. 마을의 김순기 이장은 “195명의 주민 중 90%가 60대 이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농사일에 어려움이 많지요. 앞으로 수 년 후가 더욱 걱정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돌아와야 되는데…”라며 안타까워 한다.

진원리는 옛 진원현의소재지로 매우 유서 깊은 곳이다. 불대산(불태산) 기슭에 자리한 진원면 북구 3개리 중 중앙에 위치하며 불대산과 삼성산이 만든 계곡에 자리잡은 고산·연동·묘동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진원리는 고산리라고도 부르는데 계곡 중앙 들 가운데에 고산마을이, 그동쪽 안마산 서쪽 기슭에 연동마을이, 또 남쪽에 묘동마을이 마치 한 마을처럼 근접해 있다.

삼한시대 마한 54개국 중 <구사오단국 designtimesp=10191>이 이곳으로 추정되며 백제대는 <구사진혜현 designtimesp=10192>이 설치되었고 신라 경덕왕 때 진원현으로 개칭되었으며 고려 현종 때 나주에 합병되었다가 명종 때 다시 진원현이 설치되어 감무가 파견되었으며, 1600 장성현과 합병되었다.

정조 13년(1789)에 발간된 <호구총수 designtimesp=10195>에 내동면에 고산촌, 창촌리, 갈마리, 대장리와 외동면에 고산리, 중동리, 흥동리, 광안리 등의 기록이 보인다.
읍터 였던지라 주민들의 입향성씨도 다양하다. 광산이씨, 황주변씨, 행주기씨, 광산김씨, 전주이씨, 진원박씨 등 무려 20여개에 이른다.

불대산과 삼성산에서 흐르는 물이 진원제로 모였다가 마을을 지나 남쪽으로 흐르고, 유황샘의 물과 묘동쪽의 물이 고산마을 뒤를 지나 연동 앞에서 만나 이웃 산동리로 빠진다. 이 마을 사람들은 진원제와 유황샘의 물을 이용해 주동들과 샛골들, 한절들, 송림들을 주로 경작한다. 1962년 진원제 확장공사 이후 물이 풍부하여 모두 기름진 옥토들이다.

진원제는 일제때 진원리 주민들이 모두 동원되어 울력으로 힘들여 만든 곳이며, 마을 사람들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비가 많이 오면 온 동네 주민들이 대피를 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으나, 60년대 재축조 후 고산리의 젖줄이 되었다고 한다.

진원제는 물이 맑고 주위의 경관이 아름다워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다. 특히 현 고건 국무총리가 70년대 전남도지사 재임시절에 낚시를 하러 이곳을 자주 찾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유물과 유적으로는 우선 남쪽의 뜸 월송에 위치한 노사 기정진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고산서원을 꼽을 수 있다. 한말 성리학 6대가의 한 사람이며 우리고장 학문의 명성을 높인 노사 선생의 드높은 학문과 덕을 기린 고산서원은 전남도 기념물 제 63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금빛 들녘 논가운데에 서있는 고풍스런 탑이 눈길을 끈다. 바로 묘동마을 앞의 5층석탑이다. 지방문화재 자료 101호인 이 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탑 머리부분이 손실되었다. 본래 불대산 탑생이골에 있었다 한다. 옮겨 세우는 과정에 중심이 틀어져 비뚤어져 있다. 김순기 이장은 “기울임이 점점 심해져 문화재 보존 차원에서 보수가 시급한 실정이다”고 말한다.

또 이마을엔 도요지가 많았던 탓에 사기점터가 여러곳 발견되었다고 한다. 큰호골과 고시재, 덜걱재에서 출토된 기와조각과 자기파편들의 연대는 고려말에서 조선초로 추정된다.
특히 사기점터에서 출토된 고려분청사기는KBS의 ‘진품 명품’에 출연하여 싯가 4백만원 감정을 받기도 한 귀중한 유물이다.

창촌으로 발길을 옮기면 수령 5백년 이상된 노거수가 있다. 조선 태종때 진원현감으로 부임한 위남 박희중 선생(진원박씨 입향조)이 심었다고 전해지며, 주민들은 이 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 일제때까지 당산제를 지내기도 했다.

대절봉 남쪽 기슭 도로변 비석거리에 서있는 6개의 비는 옛 진원현감들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이다. 원래 마을 주변에 산재해 있었던 것을 1973년 마을 유지 박남순씨와 주민들의 협조로 현 위치에 세웠다 한다.

고산마을 회관에서는 특이한 것을 하나 볼 수 있다. 마을회관에 설치된 "주민정보이용실"이 그것이다. 주민정보이용실은 장성군 관내 불과 4곳 뿐이다. 그중 한 곳이 이 마을 회관에 있다. "컴퓨터 5대를 설치하고 주민들에게 개방해,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함으로써 주민정보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김순기 이장의 설명이다.

그런 이유인지 이마을 주민들의 컴퓨터 활용능력은 수준급이다. 특히 마을을 안내한 원로 김창현(68)씨가 오는 21일 열리는 군민PC경진대회에 이 마을 대표로 참가한다고 한다.

유서깊은 마을답게 인물도 많이 난 곳이다. 이 마을 출신 인물로는 농협조합장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냈으며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기세근씨가 있으며, 전남도청 서기관으로 재경과장인 박옥현씨, 행시 출신으로 농림부 서기관으로 있는 김덕호씨, 해군대령인 박병환씨, 의학박사이며 의정부 국민병원장인 조경종씨, 육군중령인 차정호씨, 박창순씨, 박상천씨, 진원면장을 역임한 차기옥씨 차은종씨, 독립운동가였던 박중진씨 등이 있다.


<고산서원과 노사 기정진 designtimesp=10222>
고산서원은 한말 성리학 6대가의 한 사람이자 위정척사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 정조 22∼1879 고종 16) 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에 그를 추모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문인과 후학들이 건립한 것이다.

서원의 대지면적은 484평으로 여기에는 7동의 건물이 있다. 사당의 명칭인 고산사(高山祠)는 ‘높은 산은 우러러 보아야 하고 길은 큰 길을 가야 한다’는 시경(詩經)의 소아편(小雅篇)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는 기정진 선생의 높은 학문을 비유한 것이며 이 마을의 이름도 본래는 고산(古山)이었는데 서원이 건립된 후 고(高)로 바꾸었다고 한다.

중앙의 강당으로 이용된 담대헌(澹對軒)을 중심으로 동재(東齋)인 거경재(居敬齋와 서재(西齋)인 집의재(集義齋)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거경재는 <논어 designtimesp=10228>의 옹야장편에 나오는 ‘항상 반성을 통해 몸가짐을 신중하게 조심하라’는 말로, 집의재는 <맹자 designtimesp=10229>의 공손추와 문답한 부분에 나오는 부동심, 즉 호연지기를 가르침으로 삼아 명명하였다. 마당에 있는 위성류나무는 기정진 선생이 경상도를 다녀오면서 지팡이로 썼던 나뭇가지가 뿌리를 내려 지금에 이른다는 전설이 있다.

특히 14평의 장서각에는 <노사문집(蘆沙文集) designtimesp=10232> 목판 980매와 노사집 12편(1질)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기정진 선생은 1815년에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장성 하남(河南)으로 이사하여 장성에서 몇 차례 집을 옮기며 살았다. 병인양요(1866)가 일어나자 서양세력의 침투를 염려한 끝에 그해 7월 흔히 〈육조소 六條疏〉라 불리는 첫번째 〈병인소 丙寅疏〉를 썼다. 이는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여섯가지를 제시하고,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하여 당시의 쇄국정책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뒤에 나타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은 이 소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 소는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정에서 식견이 높이 평가되어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두번째의 〈병인소〉를 올리면서 당시의 국가적 폐습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지도층인 사대부에게 청렴결백한 기풍이 있어야함을 역설하였다. 1877년 장성 하리 월송(月松: 지금의 高山里)으로 이사하여 다음해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무등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이 곳에 토담으로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를 짓고 많은 문인과 함께 거처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고산마을의 재미있는 지명들 designtimesp=10242>
깃 대 봉 : 불대산의 제일봉. 정상에 헬기장이 있다.
호 미 골 : 불대산 치마바위가 있는 산등성이 주변 골짜기. 호랑이 꼬리처럼 생겼다한다.
방망치재 : 안마산 사직골을 지나 상림으로 넘어가 는 고개.
고 시 재 : 주동에서 사기점터로 넘어가는 고개.
의기바우 : 불대산의 큰 바위 세개중 가운데에 있는 바위. 김덕령장군이 무등산에서 누나와 함께 말을 타고 이곳까지 뛰어 생긴 것이라고 한다.
문턱바우 : 의기바위의 동편에 있는 바위로 문턱처럼 5개의 층층대가 있다.
궁 구 제 : 제방의 모양이 활처럼 휘어져 있어 궁구제라 하였으며, 옛날 장성-담양간의 모든 행인들이 이 제방을 길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오 동 샘 : 고시제 밑에 있는 샘으로써, 이곳의 물은 큰재와 큰호골 물과 합쳐 마을로 흘러 내린다.
옥 샘 : 산정 입구의 가파른 수십미터 낭떠러지 밑에 있는 샘. 옥같이 어여쁜 아가씨가 이곳에서 머리를 감았다는 전설이 있다.


<마을의 역사와 유래 designtimesp=1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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