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천 흐르는 명당
약수천 흐르는 명당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03.08.08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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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하면 중평리 중평마을






가세 가세 가세/ 집지러 가세
첩첩암암 백양산이요/ 호호양양 황룡강이라
별유천지 이 강산에/ 이 명당이 생겼어라 [후렴]

- 중략 -

오간팔척 황학루같이 /아담하게 집을 지어
우리마을 김진사님/ 모셔나 보세 [후렴]

어기 어기 엉차/ 뫼시어라 뫼시어라
영웅호걸 뫼시어라 /시중천자 뫼시어라 [후렴]

- 하략 -



이 노래는 1966년 제1회 남도문화제에 출연하여 상을 받았던 북하면 중평리 중평(中坪)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민속 <집짓기놀이 designtimesp=10512>의 일부다. 이 노래에서 처럼 중평마을은 우리고장 "명당" 중의 하나.

남도의 젖줄이라 일컫는 장성호 상류를 구비돌아 북하면 소재지를 지나 백양사 입구에 이르면 백양골에서 시작된 약수천이 흐르고 이 천을 건너면 중평마을이다. 집집마다 집안과 텃밭에 감나무가 무성하여 해마다 가을이면 주렁주렁 열려 빨갛게 익어가는 감이 관광객들을 감탄케 했던 곳.

백양골에서 흘러내리는 약수천이 마을 서쪽으로 흐르며 이웃 약수리와 경계를 짓고, 대각산의 한자락인 노적모양의 뒷뫼를 등지고 있는 해발 100m의 서향마을이다.

마을 뒤에는 외얏골을 사이에 두고 박뫼가 있고 마을 우측에는 뒷들을 사이에 두고 앞재봉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남쪽에는 담양-고창간 도로가 지나고 그 길 너머엔 외얏들이라는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도선국사가 말하기를 "白羊入口外水口東便에 有天基富豪之地하고 左輔右弼하여 星水가 津津하니..."라 했으니 중평마을은 "살기좋은 곳" 임이 틀림없다.

중평은 원래 회촌(晦村)과 중평(中坪) 두 마을로 이루어졌으나 큰 마을이었던 회촌은 수차례 불이나 작아지더니 6.25사변땐 회촌 전가옥이 소각되어 없어지고 중평마을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 남양방씨와 울산김씨가 가장 오래전에 입향한 성씨이다. 남양방씨는 300여년전 계철(戒哲)이 남원에서 이주하였으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울산김씨 하서 김인후의 5대손인 익서(翼瑞)와 두서(斗瑞) 형제가 황룡면 맥동에서 이주하였는데 이들의 당숙인 김명하(金鳴夏)와 가옥을 맞바꿨다는 말이 있어 울산김씨는 최소한 김명하의 부친때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울산김씨가 오래전에 뿌리내린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마을 복판엔 하서 김인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하서 김인후 부조묘 designtimesp=10527>인 <문정묘 designtimesp=10528>가 있다. 사당은 순조 32년에 이웃 용두리에 창건됐으나 이후 옥과, 창평, 황룡면 장산리를 거쳐 1957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문정묘 designtimesp=10529> 내에는 인종이 친히 그려 하사했다는 <묵죽도 designtimesp=10530>를 비롯해 고문서와 유물이 보관되어있다.
정월 대보름은 하서 선생의 기제일로 울산김씨 문중 사람들은 이날 <문정묘 designtimesp=10532>에 모여 다례를 올리고 기제를 모신다.

약수천이 흐르는 마을 서편에는 마을의 수호신처럼 서있는 <시무나무 designtimesp=10535>가 있다. 이나무는 國朝를 3차례나 겪었다고 하니 수령이 1000년은 족히 되는 고목이다. 원목이 고사하고 새움이 자라났다는 현재의 나무도 수령이 수 백년... 나무를 온통 뒤덮고 있는 푸른 이끼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예전엔 이 나무를 신성시하여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굿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나무에 얽힌 전설마저도 잊혀진지 오래다.
마을의 원로인 김용익(74세)씨는 "이 나무의 전설이야 있었지만... 아는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으니 이젠 알 수가 없제..."라며 긴 세월 속에 묻혀버린 전설을 안타까워 했다.

마을 동쪽에는 웃정자 나무라 부르는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가 있다. 100여년 전 이 나무가 며칠간 윙윙 울더니 마을에 큰 불이났으며 6.25때는 나무가 윙윙 울고 피같은 물이 흘렀다고 한다. 피같은 물이 흐르면 젊은 사람들이 죽고 나뭇잎이 일시에 피면 풍년이 들며 차례로 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 나무를 <도나무 designtimesp=10539>라 부르기도 한다.

중평은 한때 "곶감마을"이라 불리울 정도로 곶감으로 유명한 곳이다. 가을이면 가구마다 곶감을 깎아 말리는 모습이 장관이었고 마을 전체 출하량이 5천접을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감나무 개체수의 감소와 더불어 수익성마저 떨어져 곶감을 깎는 가구수가 줄어 지금은 10여 가구에서 400~500접 출하에 그친다.

중평마을 남쪽에 드넓게 펼쳐진 외얏들.
외얏들은 우리고장 대부분의 마을이 그렇듯이 자자손손 논농사를 지어온 중평마을의 삶의 터전이다.
외얏들을 비롯한 인근의 구름보들, 한보들, 용남들, 용동앞들 또한 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손에 흙을 묻히며 일궈온 곡창이다.
산업화 이후 전국적인 이농현상에도 불구하고 이곳 중평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을의 홋수는 점점 늘어 현재 거주하고있는 가구수가 93호나 된다. 이들중 80여호가 전업농가이다.

중평마을 장홍석(53세) 이장은 "마을엔 40~50대의 젊은층이 많아 영농에 큰 어려움이 없다"며 "상부상조하는 미풍양속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이 마을 사람들이 땀흘려 일군 드넓은 들에는 지금 한창 따가운 햇살아래 벼들이 영글고 있다.



<중평마을의 재미있는 지명들 designtimesp=10555>

곤분이 : 옛 회촌마을 자리에 있었던 지명으로 안곤분이와 밖앗곤분이가 있다.
채알봉 : 밖앗곤분이에서 안곤분이로 넘어가는 재의 봉우리
창밖골 : 중평에서 강선으로 넘어가는 골짜기로 이곳에 포장도로가 생겼다.
이금짝 : 앞재 아래 백양사 입구쪽에 있다.
외얏골 : 마을 좌측에 있는 뒷뫼와 박뫼 사이에 있다. 외야사라는 절이 있어 외얏골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달도지 : 외얏골과 뒷뫼 뒤 능선이 만나는 곳으로 달맞이를 하였다고 한다.
우동(牛洞) : 박뫼 밑에 소(牛)형국이 있다고 한다.
한사까끔(황새) : 빨딱재 모퉁이 산으로 황새까끔이라고도 한다.
외얏들 : 마을밖(남쪽)의 큰 들. 外野들 인듯함.

<자료제공:장성문화원 designtimesp=10568>


변중섭
<마을의 역사와 유래 designtimesp=10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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