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하서 김인후 선생
뿌리를 찾아서-하서 김인후 선생
  • 김은정기자
  • 승인 2003.06.09 1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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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선생추모 필암서원 대대적인 성역사업추진중



하서 선생의 도의와 절개
하서 김인후 선생 (1510~1560)은 조선조 중종때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에서 태어났다. 열살 때 김안국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22세때 성균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31세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34세때 세자 보도(輔導)의 시강원 설서가 되었다.

하서선생은 김안국의 제자였고, 김안국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에게서 배웠고 김굉필은 바로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순의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조광조의 기치주의 노선을 밟을 수 밖에 없었고, 조광조를 죽인 중종에게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말하고 희생자들의 신원(伸寃)을 주청한 것은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니 감히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그가 세자때 가르치고 인도하던 인종이 등극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기묘사화로 인한 파면에서 신원되었으니 인종과 하서간의 묵계를 알만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인종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조광조의 지치주의는 다시 꽃을 피울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크게 탄식하여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에 돌아와 부모님을 봉양하였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여 10여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당시 퇴계 이황과 기대승사이에 논란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이황의 태극음양일물설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여, 인심과 도심은 다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오직 성·경의 실천궁행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논설과 의리가 명백했던 선생은 내실에 소홀하고 밖으로만 열심인 선비들을 호되게 꾸중했다고 하며 도의와 절개로 일관했던 선비의 표상이었다.

그의 학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심(心)은 일신만사(一身萬事)의 주재자다. 그러나 심만으로 주재가 되는 것은 아니고 심에 내재한 이(理)를 타야만 주재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심을 정위(正位)시켜야 하는데 이 공부가 구방심(救方心), 입대본(立大本)의 경(敬)이요, 밝혀진 대심(大心․至理)을 다시 밖으로 확충해나가는 과정과 추진력이 수도요 지성(至誠)이다. 이 지성으로 진기성(盡己性)―인성(人性)―물성(物性)해서 천지의 화육을 돕고 천지와 상삼(相參)함으로써 우주생명의 대역사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지는 부모요 인간은 형제며 만물은 동포다. 어찌 이물(異物)로 대할 수 있겠는가. 오직 순수감정으로 교류하고 사랑할 뿐이다. 천지를 슬퍼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 정반(正反) 시비(是非) 득실(得失) 호오(好惡)가 가려질 것이니 여기서 정치가 시작된다.” 하서가 단순한 성리학자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도학자임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백련초해 》 등이 있다.

제자로는 정철, 변성온, 기효간, 조희문, 오건 등이 있으며, 1796년 정조대왕은 선생을 가리켜 "도학과 절의 문장 어느 하나라도 갖추지 않음이 없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고 칭송하며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내려 문묘에 배향되었다. 장성의 필암서원, 옥과의 영귀서원에 제향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그래서 선생은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세워지는 문묘에 모셔지는 우리 나라 18명의 현인 가운데 유일한 호남 출신으로 이 지방 유림들의 큰어른으로 추앙받아 왔다.

또한 광주 북구 운암동 광주어린이대공원 중심부에는 하서선생의 동상이 있다. 그곳엔 인종이 그린 그림에 시를 지어 넣은 "묵죽도"와 도학사상을 집약도해한 "천명도", 한시 "자연가"를 비롯한 작품 9점이 새겨져 있다. 이 동상건립사업은 91년 울산김씨 대종회와 하서기념회가 주축이 돼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 일민 김상만(94년 작고)동아일보사 명예회장이 위원장을 맡으면서 본격화되어 설립되었다. 그 외 16대손이신 김진웅씨는 『인조승하와 김하서 절의』책을 펴내 하서선생의 연구성과에 관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하서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필암서원에는 보물 제 587 호로 지정된 서책과 고문서들이 있다. 고문서 중 가장 대표적인 문서는 노비 60여명의 족보를 기록한 <노비보>, 역대 원장에 관한 <원장선생안>, 서원 일을 주관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놓은 <필암서원집강안> 등은 조선 시대 중기 지방 교육 제도 등 당시의 사회상과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인종께서 세자로 계실 때 친히 그려 하서선생께 하사하신 묵죽도와 지금도 원행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하서선생의 문집을 발간할 때 사용한 목판(645매)인 장판각 등이 있다. 현재 서원의 관리는 울산김씨 문중에서 하고 있다.

현재 필암서원은 대대적인 정비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문화재와 주변 지역간의 통합적 정비를 추진하여 서원의 역사와 문화 환경 창출을 도모하기 위해 구상된 이 사업은 2000~2005년까지 총 면적 16,422평(기존면적의 거의 10배), 총사업비 177억원의 투자계획을 세우고 있다. 추진사업으로는 토목공사(부지조성, 배수공사, 오수공사, 도로포장공사, 공동구공사, 개거정비공사, 운반공사), 조경공사(내부포장공사, 식재공사, 시설물공사), 서원 및 주변시설 정비(필암서원 보수, 홍살문 이전), 주변시설물 공사(유물전시관, 진덕원 숭의관, 정자시설, 주차장, 주차장화장실, 안내소), 전기/통신(외등설비공사, 통신공사,경관조명설비공사,변전실공사), 부대비용(편입토지매입, 농지전용, 국변절차이행, 기본계획 수립, 오수차집관로, 폐기물 처리비용, 유구조사, 설계용역비)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현재(2002년)까지 완성된 사업으로는 사원 및 주변시설 정비중 필암서원 보수, 주변시설물 공사중 유물전시관공사를 완성하였고, 부대비용으로 편입토지매입, 농지전용, 국변절차이행, 기본계획 수립, 오수차집관로, 폐기물 처리비용 등이 마무리 되었고, 총 47억여원의 공사비가 소요되었다. 향후 장성의 관광코스는 기존 장성군을 통과하는 성격에서 필암서원을 중심하는 체류적인 성격으로 변한다.

문화재보호와 지역개발이라는 다소 상반적인 성격이 내포하듯 필암서원내에는 문화재보호와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려두고, 주차장은 하천아래에 두어 대상지내는 차량 진입을 금하고 보행 진입을 원칙으로 하여, 문화재의 훼손을 막고 문화경관의 조화를 맞추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김은정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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