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의 글 읽는 소리 끊이지 않고
청년들의 글 읽는 소리 끊이지 않고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03.07.29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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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서원에서 노강선생에게 논어 배우는 전주대생들









어찌 흐르는 것이 세월 뿐이라 했던가. 세상도 흐르고 인심도 흐르고 모든 것이 흐르고 흘러 결국 흐르는 것이 천지만물의 이치로 자리 잡은 지 오래 아니던가. 누가 누구를 나무랄 틈도 없이 세월은 어찌 그렇게도 빨리 흐르던지.

7월의 여름 어느 날 늘 그랬듯이 봉암서원은 젊은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한 복판에는 노강 박래호선생의 죽비가 한 낮의 땡볕처럼 우뚝 서 있다. 노령산맥과 황룡강, 그래서 노강이라던가. 봉암선생과 노강선생, 젊은이들과 장성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전주대 오종일교수가 19년 전에 전주대 한문교육과 제자들을 노강 선생에게 맡겨 여름 한철 보내게 한 것이 시작이었지만 이제 오랜 전통이 되어버렸다.

"허허 벌써 19년이 흘러 부렀당가, 참으로 속절없는 것이 부귀와 권세와 세월이여" "아니제, 봉암선생과 맺은 인연으로 치면 아 3백년이 훌쩍이제"

말이 쉽지, 오로지 한 길 학문에만 매달려온 노강 선생의 살아온 세월이 쉬울 리 없을 터였다. 노강 선생은 자식들 학비 한번 준적 없고, 학비 한번 걱정해본 적도 없었지만 3남 1녀의 자녀를 모두 대학 보내고, 그 가운데 이미 셋을 장가들이고 올 가을 시집보낼 딸만 남았단다. 사모님이 삯바느질로 가르쳤다고 쉽게 말하는 선생에게서 부끄러움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지금도 내 개베(호주머니)에 돈이 얼마 들어있는지 모르요. 있으면 쓰고 없으면 말고.”

예로부터 학문이란 돈과 거리가 멀다 했던가. 그런 무량태수 같은 선생께 사모님이 가끔 불평도 쏟지만, 만족한다고 했다며 말하는 선생의 동안엔 잠깐 미소가 스쳤다.

“나는 원래 음식과 의복 따위엔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여”
“반찬하나 없이 차린 밥상도 상대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게 생각하니까”

그래서 사모님이 만족한다고 했을까. 아버님을 선생보다 더 잘 모신다며 소문나지 않은 효부라고 강조하는 선생께 팔불출이라 한다면 가당치도 않은 말일 것이다.

노강 선생의 고향은 황룡 아치실이다. 선생의 아버님이 뛰어난 학자를 배출할 풍수를 찾아 담양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태어났지만 곧 고향으로 돌아왔고 지금은 봉암서원과 필암서원, 수산사 모두가 선생의 거처가 되었다.
봉암과 필암과 수산사는 한 번쯤 세상을 가슴에 품음직한 선비라면 거쳐 갔을 너무도 그리운 내 고향 장성의 수련처다. 한 때는 저 멀리 강원도 상지대 한의학과 학생들이 선생을 찾아와 필암서원에서 겨울을 나기도 했고, 성균관대 한림원(박사과정)생들 역시 어느 해 겨울 한 철을 선생의 품 안에서 보내기도 했다.

“새벽 다섯 시 삼십분에 일어나 밤 열두시가 넘어야 잠을 잘 수 있다”고 말하는 봉암서원 여름학당 수강생 모승환(전주대 한문교육과 1년)군은 아직 앳돼 보였지만 선생이 풀어주는 <논어>에 푹 빠져있어선지 눈에는 총기가 넘쳤고 한마디 한마디가 당차보였다.

“선생님이 올해는 필암서원의 선비학당 때문에 함께하고 있지 못하지만 지난해에는 제자들과 함께 숙식까지 하셨어요.”

“장성에 이렇게 서원이 많은 줄 몰랐어요. 봉암서원도 필암서원처럼 난방이나 화장실 식수대 등의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겨울철에도 이곳에서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노강 선생은 오전에는 필암서원에 계신다. 장성군민을 위한 선비학당 때문이다. 4년 전 <사자소학>으로 문을 열었지만 지금은 <대학>을 가르치고 있다. 월화수목. 월요일에는 장성읍 주민들이, 그리고 화요일에는 진원 남면 삼서 주민들이...... 노강 선생의 강의는 춘하추동 방학도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사람을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네가 할 도리를 다했느냐”
“여러 대중을 상대했을 때 네가 진정 믿음을 주었느냐”

<논어> 가운데서 선생이 가장 소중히 여긴다는 대목이다. <맹자>는 정치학이라고 말하는 선생은 유교는 민주주의이며 공자,맹자 역시 민주주의라고 목청을 돋았다. 의아해 하는 기자에게 선생은 다만 공부를 한 사람들이 실천을 제대로 하지 안했기 때문이지 민의 중심의 학문이라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 옛날 어느 전라감사는 “문학으로는 장성만한 고을이 없다”했다던가. 노강 선생과 노강 선생의 배움을 찾는 젊은이 끊이지 않아 장성의 학문은 오늘에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배워서 자주 읽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여 오늘 봉암 서원에는 젊은이의 글 읽는 소리만 그윽하였다. 여전히 세상 만물이치처럼 그윽한 그 소리도 단지 귀 기울여 듣는 이에게만 가슴에 여울처럼 울렁거릴 터였다.

지금은 여름, 서원 뒤 대숲에선 풀벌레마저 숨죽여 울고 있었고, 글 읽는 소리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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