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해씨의 죽음은 우리 농촌의 현실을 보여준 것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제5차 W.T.O(세계무역기구) 협상이 합의문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지난 15일 폐막했다. W.T.O 협상에서 농업부문을 제외하라는 요구를 하며 시위를 벌이던 세계 여러 나라의 농민단체 회원들은 협상 결렬을 일제히 환영하며, 앞으로 투쟁의지를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이번 칸쿤 회의에서는 한국농업경영인회 전회장인 이경희씨가 세계 각국에 한국 농업 사수의 의지를 알리고자 할복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해서 협상결과가 크게 주목되었다. 한국 정부는 이번 W.T.O 협상에서 농업분야의 개발도상국 지위를 얻는데 주력했지만 채택된 각료 선언문 초안의 내용으로 볼 때 비록 개발도상국 지위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한국 농업의 엄청난 타격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비록 칸쿤에서 열린 W.T.O 협상이 결렬되었다고는 하지만 앞으로 전개될 DDA(도하개발아젠다: 다자간 무역협상)협상과 국가간의 무역협상에서 W.T.O 회의에서 채택된 각료 선언문 초안은 협상의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W.T.O 협상에서 채택된 선언문 초안에 의하면 앞으로 우리 농산물은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는 전면적인 개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초안에는 개도국 우대 조항이 있다고 하지만 우대 조항은 무역의 양자협상에서 상대국이 이를 인정해야만 한다. 오히려 미국이나 유럽 연합 등은 우리나라가 이미 O.E.C.D(선진국 모임)에 가입해 있고, 세계 10대 무역국이라는 점을 들어 개도국(후진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설사 개도국 지위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한, 칠레 무역협정에서 볼 수 있듯이 공산품의 수출에 목을 매고 있는 우리 정부가 농산물의 수입 개방을 막아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나라 농업은 외국에서 수입되는 농산물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것으로 보호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쌀을 비롯한 마늘, 고추, 참깨, 양파 등 대부분의 농산물이 관세의 대폭적인 인하로 외국과의 가격 경쟁에서 미려날 수밖에 없게 되고, 농업의 파탄은 불을 보듯 뻔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쌀이 한가마(80㎏)당 16만 원선인데 비해 중국산은 3만 원선 그리고 미국산은 4만 원선에 불과하다. 100%의 관세를 부과한다고 하더라도 중국산은 6만원이고 미국산은 8만원에 거래가 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앞으로는 농산물의 관세율이 100%를 넘기는 어렵다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고 보면 쌀농사가 무너지는 것도 멀지 않게 되었다.
400만 농민의 80%가 쌀농사를 짓고 있고, 농업 인구의 대부분이 60대 이상이며, 한 농가당 경작 면적도 평균 1.3㏊(4000평 가량)에 불과한 우리나라가 한 농가당 60만평(150배)의 농사를 짓고 있는 미국 등과의 쌀값 경쟁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창고에는 쌀의 재고가 넘쳐나고, 풍년이 되면 남는 쌀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할 지경이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온 쌀과 농업은 이제 정부로부터 천덕꾸러기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쌀농사의 붕괴만이 아니라 과수와 특용작물 등 모든 농업이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다. 농촌에서 희망을 일구어보겠다고 꿈을 갖고 들어온 젊은 농민들은 이제 하나 둘씩 농촌을 떠나고 있다. 10여 년 전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농민운동을 하던 한 젊은 농민도 올해를 마지막으로 농업을 포기한다고 한다. 부모와 직장을 다니는 아내마저 농사일을 함께해서 시설물에 투자한 부채도 거의 갚은 그가 농촌을 떠나야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농촌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15년 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7천여 평의 산을 개간하여 사과나무와 배나무를 심은 북이면의 한 농민은 “온 정열과 모든 자본 그리고 꿈을 투자했지만 이제 남은 것은 허탈감과 무기력뿐이다”며 “무엇보다 고생만 시킨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긴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나 국제 경쟁력을 이유로 우리의 농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 농업은 우리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을 캐캐 묵은 옛날 얘기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농업이 붕괴되었을 때의 재앙을 쉽게 지나쳐 버린 것이다.
70년대 80%의 식량 자급율을 보였던 우리나라는 2002년에는 30%의 식량자급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몇 해 전 이북에서는 계속된 흉년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수십만 명이 굶어 죽고, 수 만 명이 중국 등지로 탈출했다고 한다.
세계의 식량 무역을 좌지우지할 다국적 기업이 우리의 식량을 생명산업이 아닌 이윤을 추구하는 상품으로 전락시켰을 때 우리는 식량을 얻기 위해 우리와 자식들의 목숨을 담보해야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 것이다.
우리의 농업 생산 능력이 무너지고 나면 거대 자본을 가진 다국적 기업들과 제국주의자들은 유전자 조작과 고독성의 농약 살포 등을 통한 대량 생산으로 많은 이익을 얻는데 만 전념할 것이다. 우리 몸에 어떤 병과 해로움을 줄지도 모를 유전자 조작 식품과 농약으로 뒤 덮인 먹거리가 우리의 식탁을 채우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미국은 자기들 나라에서는 유전자 변형 콩이나 식품을 판매하지 못하게 하면서 외국으로 수출하는 것은 막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판매하고 있는 많은 두부가 미국에서 수입한 유전자 변형 콩으로 만든 두부라는 것과 그 두부의 위험성을 알고 먹는 소비자가 얼마나 될까?
얼마나 많은 농약과 방부제를 살포했는지, 미국에서 수입한 밀로 만든 빵이나 식품이 우리나라에서 재배한 밀로 만든 빵보다 훨씬 보관 기간이 길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제2의 주식이 된 밀이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것은 30여 년 전부터다. 30여년 전 식량원조라는 핑계로 미국이 우리나라에 밀과 옥수수를 무상으로 주기 시작하자 우리의 땅에 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땅에서 밀이 사라지고 이제 그 밀을 수입하는데 연간 1조원이 들어가고 있다. 우리의 농업이 무너지면 먹거리의 안전성에 위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수십 배나 비싼 가격으로 농산물을 수입해야 할 상황이 닥치고 만다.
우리의 농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농민들은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되는 식량 생산이 이루어지고, 도시민들은 안전한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도시와 농촌의 도-농 연대가 실현되어야한다. 이를 위해 자치단체와 농협이 농산물의 유통 시스템을 보다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젊은 농업인 육성을 위한 정부의 과감한 투자도 절실히 요구된다. 고령의 영세 농민들에게는 생활보장 대책을 수립해 주고, 젊은 농업인들이 영농의 대규모화와 기계화를 통해 경쟁력을 기를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젊은 농업인 육성은 고품질의 유기 농산물과 수출 시장을 겨냥한 다양한 품종의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경쟁을 가질 수가 있다.
우리 정부는 외국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자동차와 반도체 그리고 선박 등의 수출을 위해 농산물 수입 개방이 불가피하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공산품의 수출을 위해서 농산물의 수입을 개방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판단이다. 농산물은 상품이 아니라 생명 산업이기
때문이다.
칸쿤에서 W.T.O 협상 반대와 세계화 정책 반대 그리고 한국 농업 사수의 결의를 나타내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이경해씨의 죽음은 한국 농업의 위기와 절박함을 보여준 것이다. 이대로 가서는 400만 농민의 생존권은 물론이요, 우리의 생명산업인 농업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농업이 무너지면 우리의 생명은 외국의 거대 자본에 볼모로 잡혀 새로운 식민 사회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변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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